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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권의 책: 세상의 모든 시간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20.06.09 09:21
  • 수정 2021.03.17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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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더워지고 코로나에 대한 경각심도 느슨해지자 다시 사람들이 밤마다 집 앞 편의점에 둘러앉아 술판을 벌인다. 초저녁부터 삼삼오오 모이는 회사원부터 시작해 자정이 가까워지면 수업이 끝난 인근 입시재수학원 수강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맥주 몇 캔 시켜놓고 학업 스트레스를 푼다. 음악은 덤. 하지만 클래식 틀어놓는건 못 봤다. 엊그제는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에 맞춰 웃고 떠든다. 분위기에 취해서 같이 따라 부른다. 어디까지나 민족성에 기인한다. 우리 민족은 흥이 넘치고 화끈하다. 술을 마셔도 밤새 마셔야 직성이 풀리고 노래방에 가서 맘껏 노래인지 스트레스 분출인지 괴성을 부르면서 감정을 토해내고 흥에 겨워야 잘 놀았다고 한다.좋게 말하면 한국인은 흥의 민족이다. '적당히'를 모르고 끝장을 봐야 하는 화끈한 감성적인 민족이다. 시끄럽다는 인식을 못 하고 술 마시면 욕하고 거센 척하며 같이 밤을 지새우면서 왁자지껄 떠들고 노는 게 즐거움이라 여긴다. 그걸 못하면 사회성이 부족한 거요 재미없는 인간이다. 흥청망청 무슨 전생에 술 못 마셔 한이 있는 사람들처럼 퍼마시며 감정을 배출하고 한 이야기 또하고 또한다. 감상은 없다. 자신이 부르고 즐겨야지 음악이자 음주 가무다. 이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클래식 음악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필자 같은 경우는 별종이다.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한 토마스 기르스트(Thomas Girst)의 '세상의 모든 시간" 원제: Alle Zeit der Welt

동지를 만났다. 토마스 기르스트(Thomas Girst)? 책 제목만 보고 손이 갔는데 저자를 보니 역시 독일 사람이었다. 이런 유의 책은 전형적인 알프스 이북에서나 찾을 수 있는 감성이다. 기후와 풍토는 사람의 체질과 생활방식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다. 여름 몇 달을 제외하곤 일사량이 턱없이 부족해 4시만 되면 어두워지고 비바람이 부는 곳에서나 사색과 내면의 성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일단 우리나라는 날씨가 너무 좋고 재미있는 게 너무 많다.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느리게 사는 지혜를 강조하다니? 무슨 한심하고 꼰대같은 소리냐고 반문할 사람 많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로, 경쟁으로 내몰린 삶의 질은 저질에 각박하고 야만스럽다고 '헬조선'이라고 아우성은 누가 지르는가? 아무것도 안 하는 무위는 게으름과 무능의 상징이요, 멍 때리기는 사치다. 3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3살부터 남이 짜준 스케줄에 자기를 맞춰 숨 가쁘게 쳇바퀴 굴러가는 듯이 살아가는 걸 강조한다. 조직에서 이탈됨은 인생 패배라 가르치고 자신도 모르게 살다보면 그렇게 순응되고 적응된다. 남과의 끝없는 비교는 상대적 박탈감만 야기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느리게 살고, 여유를 가지라는 소리는 설득력이 없다. 고독은 익숙하지 않다. 쉼은 불안하다. 제대로 쉬고 놀지 모른다. 이타적이고 의존적이기 때문에 누구와 같이 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하며 세상에 홀로 내 팽겨친거 마냥 가슴이 뛴다. 그러니 술 먹고 악쓰고 호기부리고 스크린골프든 피시방이든 화투든 게임을 같이 하든 모여서 떠들어야 한다. 그게 돌파구다. 그거 밖에 모른다.

저들을 통해 조금이라도 수익을 내는 편의점 사장님의 심정을 알기 때문에 차마 항의를 못할 뿐 24시간 벌어지는 술판과 시끄러움, 부디 갈때는 쓰레기라도 치우고 가라!

예전엔 내가 좋아하는 걸 어떻게라도 전수하고 같이 즐기게 하려고 노력했다. 내 돈 써가며 음악회, 박물관, 미술관 데리고 가고 밥 사 먹이고 열심히 설명해 주고 그렇게 하면 그들도 조금이라도 심오한 음악의 세계를 같이 즐길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루 이틀의 노력이 아닌 평생의 전도였다. 그런데 그게 심하면 심할수록 그들이 동화되는 게 아니라 반발과 괴리감만 커졌다. 왜 이런 걸 못 알아주냐는 하소연은 자기들 멋대로의 자격지심과 귀찮음으로, 울분과 비분강개는 무시와 감내하라는 조롱으로, 노력에 대한 보상은 외면으로만 다가왔다. 필자의 클래식 강좌 수업을 들은 여학생의 질문이 아직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교수님은 이렇게 수업을 오랫동안 한 분야에 강의를 오래 했는데 종강 후에도 클래식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있었냐고. 단언컨데.... 없다! 그저 음악을 틀어놓고 있는게 듣는게 아니다. 음악적 내용과 본질에 다가가려는 경지에 오른 사람은 없다. 하지만 간혹 있다. 만 명의 하나 정도? 그들은 듣지 말라고 해도 듣고 통한다. 그들을 찾아 같이 하는 게 낫다. 아님 이제는 혼자 누리는 게 편한 나이가 되었다.

산책과 묵상,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야말로 자신과 자신의 내면을 연결해 주는 가장 적절한 행위다. 그림이 있고 읽을 책이 있고 볼 영화가 있고 들을 음악이 있으니 족하지 않은가! 움직임을 멈추고 그림 앞에서 서서 오직 그림만 바라본다면,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베토벤과 브루크너, 쇼스타코비치의 심원함에 빠진다면, 사방 곳곳의 미술관에 발품을 팔아 간다면, 그리고 스탠드 조명에 꽂힌 백열등의 노란빛으로만 가득 찬 어두운 방에서 독서에 빠진다면 옆에서 재잘거리는 사람이 얼마나 귀찮은 존재인지 거추장스럽게 된다. 속세의 번잡함에 얼마나 심신이 피로한지 새삼 알게 된다.

프랑스 단어로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이라는 플라뇌느. 핸드폰 대신 토마스 기어스트의 <세상의 모든 시간> 책을 옆구리에 끼고 걸으면서 읽고, 달리다가 멈추고 아무 데나 펴고 읽어본다면 세상 평온하고 무아에 빠진다. 책의 크기도 적당하다. 이 책과 함께 유유자적(悠悠自適) 현충원에, 남산에, 아님 목감천으로 가라. 그럼 자연스레 여행, 방랑으로 날 인도한다. 방랑은 자연스레 639년간 존 케이지의 음악이 길게 울리는(울리고 있는 또는 울릴) 독일 할버스타트의 부르하르디 수도원으로, 일본 교토의 료안지 바위 정원으로 이끈다.

조선의 종묘 정전
조선의 종묘 정전

작가인 토마스 기르스트는 아직 우리나라의 '종묘'에 대해 모르거나 와보지 못한 거 같다. 101미터에 달하는 한국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이자 조선 왕조의 유구한 생명의 상징인 종묘 정전, 여기에 오면 절대적인 고요와 적막감, 그 속에 깃든 충만한 오묘한 기운이 건물과 공간을 하나로 만들어내는 장엄한 시간의 지속성에 압도당한다. <세상의 모든 시간>도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처럼 미완성이다. 하지만 슈베르트와 다른 토마스 기르트스는 열린 영원이다. 아직 종묘를 만나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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