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기 시인의 첫 시집이 나왔다. ‘시를 생각하며’ 부제는 꽃과 나무, 여행과 삶이다. 꽃과 나무에 대한 시들이 특색있다. 개인적으론 꽃보단 나무에 대한 시가 더 와 닿는다.
능소화 시가 좋다. 궁에는 왜 능소화가 많은지. 능소화는 양반집에만 심을 수 있다고 해서 양반화라고도 한다. 꽃말에 명예가 들어가서인가?
능소화
한 여름 더위에
지칠 듯 지쳐
자꾸만
그늘로 찾아드는
주황빛 옷소매.
그 옛날
연모하는 임금님
행여 오실까
궁궐 담 너머로
넘겨 보다가
가까이 하지 못한
한으로
맺혀져 꽃이 되었다더니.
오늘도 오지 않는
님 기다리는
궁녀 차림새로
목 빼고 긴 하루를 넘기도 있네.
능소화 설화를 제대로 녹여냈다. 소화라는 궁녀가 성은을 입은 후 오지 않는 임금을 기다리다 죽었다는 설화가 시로 잘 승화됐다. 궁녀의 둥근 치마가 연상되는 꽃이다.
키 큰 나무
나무한테 함부로 하지 마라.
너보다 키 등치 훨씬 크고
그 침묵은 바위처럼 무겁다
너보다 오랜 세월
온갖 풍상 다 겪었어도
별 말이 없지 않느냐.
나무와 비교하려 들지 마라.
너 보다 온갖 병 풍수해 잘 이기고
기 백년, 수 천년 살기도 한다.
로마시대 키케로를 지켜 본
올리브 나무는 2,000살이 넘는단다
네가 얼굴조차 모르는 너의
조상들이 사는 모습도 모두 지켜본
묵묵한 역사가가 그들이다.
사람보다 자연이 그 자리에 더 오래 있다. 오래 남아서 생로병사를 겪으며 역사를 겪으며 세상을 겪는다. 일희일비하는 마음을 버려라. 당신이 웃고 우는 몇 날 며칠 나무는 수천 년을 삭였다.
웃어도 울 날이 있고 울어도 웃을 날이 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만 하라.
별
사랑하고
사랑받던 사람들
이내 각각이 별이 되어
한 세상 살고 간
이녁 땅 내려보지만
바삐 사느라
간혹 올려다보는 이
있을 뿐
거기서도
외롭기는 마찬가지.
삶에 대한 시가 가장 좋다. 첫사랑에 대한 시도 좋고 어머니에 대한 시도 좋고 그리움에 대한 시도 좋다. 죽어서도 외로운 게 인간의 숙명이다. 하늘의 별이 되어도 그리움에 내려다보아도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없다. 이 겨울 이 추위 마음이 더 얼어가지만 시인의 시가 대신 위로해 준다.
이은기 시인은 1954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학박사로 사법시험 합격 후 변호사로 활동하다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서울고등학교 1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시 부문을 수상할 정도로 타고난 실력이 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