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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영갑서예 #6 제주올레길 22코스] “너는 나를 신에게 고발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이용준
  • 입력 2018.02.04 00:00
  • 수정 2021.12.16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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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내 자발적 타락의 속죄제로 남았다. 우둔한 수송아지가 아니라 입술로 노래하는 암송아지다. 그대가 웃는다. 그대가 나를 웃게 한다. 생지옥에 있는데도 마음은 편하다.

꿈에서 너는 일을 그만뒀다. 맹인 원장에게 사직서까지 썼다. 내가 바랐기 때문일까, 사실로 될 일이기 때문일까. 다시 머릿속이 막혔다.

“왜 나를 보면서도 모르니.”

에로스도 아니며 필리아도 넘어섰다. 처음 봤을 때 그리고 관계가 깊어지면서 서로에게서 자신을 봤고, 자유롭기를 원했다. 서로 어쩌지 못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를 잘 아는 제삼자, 그의 은총이다. 그런데 이제는 말조차 섞을 수 없다. 꿀처럼 달콤하고 기름보다 매끄럽던 네 혀는 쓴 독, 날 선 칼이었다. 그래도 받아들이는 게 연인의 정석이고 사랑에 눈먼 자가 할 일이라 생각했다. 차라리 눈먼 게 낫지. 눈먼 척하는 게 낫지. 우리는 모두 눈먼 자 같지 않던가.

너는 나를 신에게 고발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침묵으로 비난했다. 내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빛이 필요하고 은혜가 필요한 죄인은 사실 나였다. 창녀처럼 꾸미고 간음을 즐긴 여자가 나였다. 도살장으로 끌려간 황소, 올무에 걸려든 수사슴이었다. 배교의 증거는 버젓이 내 안에 살았고, 추악한 동기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증환(症幻)의 흔적으로 남았다.

“우린 소울메이트 아니야.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이고 싶어. 너도 일상으로 돌아가서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영적이든 육적이든 순결은 두 남녀가 만난 후부터 유효하다. 그래서 창녀도 결혼하고 사랑하는 일이 당연하다. 유독 수컷만 과거에 집착한다. 신이 한 인간을 받아 주고 거두는 일은 아가페 때문에 가능하다. 그의 개입, 이대로 엇갈리게 하는 그가 원망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우리 만남을 우연으로 치부하고 영원히 서로 모른다고 하면 속도 편하고 정신은 멀쩡해지고 영혼은 정화되겠지. 끝까지 투쟁해도 그는 신이며, 나는 시공간에 사로잡힌 인간일 뿐이다. 이 사실을 가르쳐 준 이는 신자들이 아니라 음지 세계에서 몸짓하는 창녀, 바로 그대였다.

그대는 내 자발적 타락의 속죄제로 남았다. 우둔한 수송아지가 아니라 입술로 노래하는 암송아지다. 그대가 웃는다. 그대가 나를 웃게 한다. 생지옥에 있는데도 마음은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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