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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영갑서예 #4 한라산 영실 코스] 눈먼 사람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용준
  • 입력 2018.01.31 00:00
  • 수정 2021.12.16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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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눈먼 사람처럼 청각, 촉각, 후각, 기억 등에 예민할 수 없으면서 그런 척했다. 눈먼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건 결코 믿으려 하지 않았다. 눈멀어야 할 것엔 눈 뜨고 눈 떠야 할 것엔 눈먼 척하며 전지전능하게 굴었다. 그래서 나는 네게 잔인했어야만 했다.

제주 6일째. 여전히 흐리다. 한라산 영실 코스를 오르기로 했다. 해발 1,600m. 온통 구름에 싸여 5m 앞도 보이지 않는다. 찬바람 가득 품고 주문 외우며 걷는다.
‘잊어야 해. 잊을 수 있어.’
현실은 끝이지만, 꿈은 아니라 한다. 언제든 발 한 번 내밀면 낭떠러지다. 생각도 사라지고 우유부단함도 사라지고 너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진다. 그럼에도 저 낭떠러지로 뛰어들지 않은 것, 거센 파도에 뛰어들지 않은 건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너와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갈망에 대한 투사(wishful thinking)가 죽음에 대한 독사(doxa)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넌, 죽어도 끝이 아니라고 말했다. 죽지 못하는 구차한 이유로 대출받은 돈,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아이들을 줄줄이 읊어댔지만, 내 마음은 내세를 갈망하는 네 맥락, 그 침묵을 읽었다. 내세에서 만나지 못할,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잘할 필요는 없다지만 그거야말로 모르는 일. 걸레면 어떻고 창녀면 어떻고 술 먹은 핑계로 아무 집에서나 길거리에서나 추태 부리고 팬티 내리면 어떤가. 자신에게 솔직하고 타자에게 진심으로 말한다면, 신을 의식하고 양심에 꺼릴 게 없다면 괜찮은 것. 네 내공과 촉, 절제 그리고 내 침묵과 회피, 분열은 영혼의 오욕과 욕망에서 비롯됐다.
한순간에 돌이키는 건 인간 의지에 달려 있지 않다.
“넌 헛똑똑이야.”
“사람이 제일 무서워.”
“너 또 나를 테스트하니?”
나중에서야 알았다. 자격지심 때문에 ‘테스트’란 외래어를 입에 올렸다는 것. 이십 대 사회 초년병 시절, 새벽 출근길에 외진 골목에서 성폭행당했던 너로서는 나란 남자를 확인하고 확증하고 검토하고 믿어야만 할 이유가 필요했을 것이다. 신랑에게 맞고 살다가 버림받았기에 나란 인간은 알아서 존재 증명을 했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나는 원래 타자들이 경계하도록, 믿지 못하도록 생겨 먹지 않았나.
나 역시 너를 믿을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너는 감당할 수 없는 여자이지 않았던가. 맹인과 작당해서 전(前) 실장 뒤통수 치고 자리 꿰차는 걸 목격했고, 몸 파는 아가씨들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 역겨운 포주 짓거리에 동참했고, 태업하는 직원을 음해해서 쫓아내는 일엔 내가 앞장섰고 네가 후견했다. 그래서 내 먹잇감이 되지 않았나.
하산할 때가 되어서야 백록담이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요망 진 것. 윗세오름에서 어리목으로 내려올 때 시내를 보라고 구름 커튼이 걷히는 기적도 열린다. 왕복 네 시간여, 비 쫄딱 맞고 주문은 제대로 못 외우고 경치 구경은 잘했다. 평생 못 잊을 값비싼 체험 했다.

7일째. 여행 온 이래 가장 좋은 날씨다. 날씨에 예민하기 싫은데 그럴 수밖에 없다. 제주 날씨도 너처럼 변덕스러울 뿐이다. 나도 안다.
봄꽃과의 인연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모슬포 읍내 폐가가 눈에 자꾸 밟힌다. 저걸 개조해서 눌러살고 싶은 욕심이 솟구친다. 올레길 10-1코스가 있는 가파도로 가려다 마라도로 급선회했다.
같은 바다는 단 한 번도 있었던 적 없다. 우린 그저 바다라고 부를 뿐, 저 수억만 개의 응결체를 존중하지 못했다. 여전히 우리는 모른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듯 미래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너는 헤어져야 할 현실적 이유만 알았을 뿐 우리가 이뤄낼 미래적 근거는 몰랐다. 현실에 억눌려 현재를 살지 못했기 때문에 네게 질색했다. 너는 눈먼 사람처럼 청각, 촉각, 후각, 기억 등에 예민할 수 없으면서 그런 척했다. 눈먼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건 결코 믿으려 하지 않았다. 눈멀어야 할 것엔 눈 뜨고 눈 떠야 할 것엔 눈먼 척하며 전지전능하게 굴었다. 그래서 나는 네게 잔인했어야만 했다.
‘인생 좆같지.’
아이들 재우고 부스스하게 나온다더니 머리 막 감고 화장하고 새로 산 옷까지 입고 신랑 몰래 나왔던 밤, 나도 한때 호스트바에 몸담았다고 위안하자 창녀 주제에 나더러 “더럽다”고 쏘아붙인 그날, 그렇게 싸우고 헤어진 뒤 다신 안 보겠다고 또 맹세하고 학교에 가려는데 태연하게 연락하더니 만나자고 했다. 해장술을 먹다 말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꼬여서 밑바닥까지 왔는지 모르겠어” 하고 말했다.
추락하기가 쉬울까, 올라오기가 어려울까. 추락은 그저 포기하고 계단 없는 바닥으로 몸을 던지는 것. 올라오는 일은 자아를 벗고 제 고집을 꺾어야 가능하다. 중간 지대란 없다. 어디 있든 자유로울 수도 없다. 차라리 즐거운 구속을 누리는 게 낫다.

“그 아름다운 광경 이야기는 그만하십시오. 그것은 결코 나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생애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초자연적 경이를 언급하십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과 당신처럼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증거가 됩니다. 내가 신을 믿기를 원하신다면 당신은 내가 신을 만지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디드로,『맹인에 관한 서한』, p. 83.

“진심을 몰라서가 아니야. 장 실장이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한 거야. 걔는 생활이 급한 애야. 힘들 때 잘해준 사람한테 잠깐 기댄 것뿐이야.”
앞도 못 보는 맹인 주제에 입은 살아서. 나를 내친 뒤 너를 이용하려는 수작을 모르는 줄 아나. 못 배우고 갈 곳 없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포주 짓거리 하나뿐인 너를 맹인 가족 만들려는 무책임한 수작을. 하지만 인정한다. 맞아, 너를 잊어야 하는 게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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