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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영갑서예 #3 제주올레길 10-1코스] “너는 신의 목소리였나, 악마의 속삭임이었나”

이용준
  • 입력 2018.01.29 00:00
  • 수정 2021.12.16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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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천으로 뛰어들고 싶다. 다자이 오사무가 그랬듯이 심심하면 바닷가에 뛰어드는 객기가 부럽다. 그러면 용천을 따라 바다로 흘러 흘러가고, 다시 흘러 흘러 꿈에서 함께한 그 바다에 머물 수 있겠지.

신기록.
못 본 지 벌써 나흘째. 내가 해야 할 건 네 바람대로 일상으로 돌아가 공부에만 충실히 하는 일.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걷는 것일 뿐. 여행을 떠나면 신의 목소리가 더 명확하게 들린다. 피안의 진위도 가늠할 수 있다. 너는 신의 목소리였나, 악마의 속삭임이었나. 너는 내 삶의 가장 큰 유혹이자 도전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선 안 될 안정된 직장과 행복한 가정의 중요성을 역설했지만, 우리 사이는 진지한 그리고 태연한 불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았는가.
늑장 부렸다. 쪼리로 갈아 신었다. 짙은 안개는 여전하다. 한라산은 연기, 오늘은 강정마을로 향한다. 가장 아름답다는 올레길 7코스를 계속 걷는다. 쪼리를 신었으니 자갈에 차이고 진흙에 미끄러진다. 일곱 시간 내내 걸어 강정마을에 도착했다. 해군 기지 건설 현장 입구를 지나는 올레길. 길이나 걷는 올레꾼들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강정항에서는 평화의 배를 띄우려는 사람들과 전경 수십 명이 대치 중이다. 다른 시위자가 채증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제 몫의 삶, 제 본분의 일, 제 운명이 있다는 말이 지금 따라 왜 이리도 실감 날까. 그래서 내 인생 내가 살고 네 인생 네가 살겠다고, 각자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한 걸까. 함께할 방법은 전혀 없나. 학자와 실장, 작가와 포주, 총각과 애 엄마는 이뤄질 수 없는가. 짜증 나서, 다 짜증 나 미쳐 버릴 것 같다. 수개월째 대치 중이면서 나아질 기미는 없고, 대법원 판결까지 대기업과 국가 손을 들어준 지금, 다 포기하고 그냥 강정천으로 뛰어들고 싶다. 다자이 오사무가 그랬듯이 심심하면 바닷가에 뛰어드는 객기가 부럽다. 그러면 용천을 따라 바다로 흘러 흘러가고, 다시 흘러 흘러 꿈에서 함께한 그 바다에 머물 수 있겠지.

한국 여자 춘화 씨와 영국 남자 딘이 결혼한 뒤 제주도에 정착하며 만든 게스트하우스 ‘봄꽃.’ 모든 게 싫어서 길을 회피한 뒤 버스 타고 모슬포까지 왔다. 유독 바람이 거세고 사람들도 억세다고 해서 ‘몹쓸포’라고 불리는 이곳.
마음이 참 아픈 이유는,
“나 같이 쓸데없는 거에 맘 쓰고 아파하지 말고 기억에서 지워.”
“너가 유명해져도 나 같은 건 모를 거야.”
“고양이가 쥐 생각하니.”
“이런 저속한 곳 말고 공부하는 길 찾아서 가야지” 했던 말이 아직도 내 안에서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너는 내게 한갓 어쭙잖은 글감, 스치는 인연, 잊힐 연인, 지나가는 경험자, 내 미래의 반면교사로만 남을 것인가. 내 주(lord)는 그러라고 한 적 없는데. 마음과 지성을 다해 돕고 사랑하라 들었는데. 그렇게 타협점을 찾았는데.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면 이래서는 안 되는데.
천국 문이 어쩌고 했던 이후로 그대와 교회에 가고 싶었다. 나를 ‘착한 길’로 인도한다던 그대, 왜 나쁘게 변해 가느냐고 걱정하던 그대, 이런 저속한 곳에 있지 말라던 그대에게 교회란 바닥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 그대가 뒹구는 밑바닥보다 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두운 구덩이 깊숙한 곳에 처박혔어도 빛의 자녀끼리는 서로 알아본다. 사실 먼저 알아본 건 그대였다. 원래가 브릴린트한, 어둠의 자식인 나는 빛의 자녀인 것처럼 위장했을 뿐이다. 육욕과 호기심에 눈멀어 그대 안에서 환하게 타는 빛을 보지 못했다.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상한 감정과 타락한 본성의 구덩이는 그만 파고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믿음이 없어지면 시야가 좁아지고 구덩이를 파서 더 숨고 싶어지기 마련입니다. 구덩이에 빠진 걸 알았다면 더 깊게 파지 마십시오. 믿음 안에서 생각하고 노력하는 일은 구덩이에서 나오는 첫 시작입니다.”

103년 된 모슬포제일교회에서 예배. 기도하다 말고 오열했다. 너를 잡으려는 것이 구덩이를 파는 일일까. 놓치기 싫다는 감정이 타락한 본성의 발로일까. 포기해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고 말했는데 대답은 “안 된다” 뿐이다. 다시 돌아가겠다고 해도 아니란다. 너만큼이나 하나님도 냉정하다.
“너하고 잘 수 있어. 그런데 그러면 너 못 봐.”
“진심은 아는데 받을 수가 없는 현실이잖아.”
“처음부터 상처로만 끝날 사이였어. 그래서 더 정 안 준 거야.”
말도 안 되는 변명들. 사랑한다고 심지어 좋아한다는 말조차 안 했으면서 사랑한 적 없다고 끝내자는 건 사랑을 아낀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말을 아낀 것뿐이다. 사랑의 다양한 종류는 알지 못하면서 사랑은 그저 ‘목숨까지 내어주는 것’이니, ‘책임지는 것’이니, ‘마음이 통하는 사람에게나 하는 말’이니 하는 네 처녀 적 사랑 타령은 순진할 뿐이었다. 사랑을 받은 적 없으므로 누군가 사랑한다 하면 자길 우습게 본다는 동일화를 저지르는 건지도 모른다. 사랑이 없어야 섹스할 수 있다는 밑바닥 본능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저 잘해주고 비위 맞추다가 쿨하게 따먹고 먹히고 깨끗하게 끝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제멋대로인 공주인지도 모른다.
너란 존재 자체에 끌린 이유를 여전히 모르겠다. 애 엄마 특유의 현실 감각에 반했기 때문일까. 부모에게 잘하라고 했기 때문일까. 안정된 직업을 가져야 어느 여자를 만나도 잘해 줄 수 있다고 충고했기 때문일까. 결혼하면 한사람에게 잘할 거라는 질투 어린 말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유부녀의 고유하고 능숙한 테크닉에 맛 들였기 때문일까. 손톱으로 등을 할퀴고 팔뚝에는 진한 키스 마크를 남겼기 때문일까. 도도한 실장인 척, 평범한 애 엄마인 척하지만 원래 아가씨 출신임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누구나 아가씨이길 원한다.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을 한탄하는 노파도, 결혼을 앞둔 신랑도, 창녀를 찾는 남자도. 하지만 정작 아가씨로 남고 싶은 여자는 없다. 아줌마든 아가씨든 내겐 중요치 않다. 모정 없는 엄마는 없기 때문이다. 이혼했기에 아무리 남자 따위가 지겨웠어도, 섹스만 필요했다 해도 괜찮았다. 쪼그라든 노인이든 고추만 한 애들이건 간에 모든 남자는 네겐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기에 무조건 깔보는 식이어도 상관없었다. 탕방에서 바디 타는 아가씨들과 어울리면서도 왜 너만 보면 발기했는지 모른다. 십 년 경력의 실장인 너는 특정 감식안을 통해 삼촌들의 속성을 줄줄 꿰고 있으니 먹지 않고도 알 수 있지 않았나. 그러면 간만 보고 끝냈을 일이지. 내가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러운 간식거리여서 맛만 보고 떨쳐 낼 심산이었나. 나는 네게 관리 잘해서 만날 좋은 사람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 다른 계층에 사는 호기심 대상, 순진해 보여서 정체를 파악하고자 몇 번 대 준 그런 인간일 뿐이었다. 이젠 나도 내 진심 모른다. 그래, 넌 원래 그런 애였다. 네 진심, 속마음 따위에는 관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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