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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시작 #20] “진아 임신했어. 그것도 눈치 못 챘어?”

이용준
  • 입력 2017.11.17 00:00
  • 수정 2021.12.16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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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한겨울의 바다

그 무한한 반복, 자연의 양보와 섭리를 보면서 순간, 희랍인들의 경이(驚異)를 동감했다. 섭리의 과정과 결과가 유치하다면, 우리는 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시작된 용궁의 신화를 잊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일까? 바다 밑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다의 정수(淨水)는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바다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자, 이 방드이레이. 젊은 총각, 처녀가 쓰기엔 딱 좋을 것이라꼬. 보일러도 넣어서 복딱하이 뜨시하고.”
인심은 좋아 보이지만 서울 사람에게 밑지지는 않겠다는 표정을 한 할머니는 한겨울에도 짧은 스커트를 입고 짙은 화장을 한 진아를 힐끗 보고는 총각, 처녀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틀 밤 있는다구 헜지? 이 할무이가 쪼매 받을 테이 여기 있으라꼬. 가스도 쓰고, 뜨신 물도 펑펑 나오니께.”
“자 여기, 오만 원이요.”
진아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할머니에게 건넸다.
“하모, 그럼 편히들 쉬라고. 대게 먹고 싶으면 기똥차이 맛있게 하는 곳을 안데이 마 물어들 보레이.”
“네, 감사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의 언어는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단지 우리가 서울 사람이기 때문에 사투리를 구분 못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강구에 도착하니 오후 4시였다. 버스 안에서 진아는 잠만 잤다. 그날 이후로 진아는 특별한 용건이 아니면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약속대로 바닷가에 오게 됐다. 어제 일을 나가면서 진아는, 약속을 확인하는 것뿐이라는 듯 “내일이야”하고 간단히 말했었다.
방에 짐을 풀고 진아와 나는 바다를 보러 나갔다. 조용한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한옥 민박집은 정겨워 보였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50m도 채 안 떨어져 해일이나 태풍이 온다면 무사할 것 같지 않았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 대단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크리스마스이브라 그런지 바닷가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물을 손질하는 노인 두 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계속 말이 없었다. 나 또한 섣불리 말을 꺼내 진아의 상처를 들추기는 싫었다. 하지만 무언가 해야만 했다.
“일몰이야. 동해의 일몰은 정말 이상해.”
“해가 없어. 아니 안 보여.”
진아는 신기하다는 듯 대답했다. 너무나 쉽게, 하지만 명확하게.
“해가 없는데도 날은 저물고 어둠은 찾아오잖아. 저렇게 정체를 숨기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게 난 싫어.”
“나도 싫어. 준이가 싫다면….”
“…….”
“많이 생각했어.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했지? 하지만 그런 일이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준이가 말했잖아. 나를 생각해서 한 말이라는 거 알아. 그런데도 화가 났어. 그냥 나 자신에게 화가 났던 거 같아. 미안해, 준이야.”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어.”
“그 일을 평생 할 수 없겠지? 나도 꿈이 있어. 준이처럼 검정고시 공부해서 간호학원이라도 가고 싶어. 그런데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잖아.”
“내가 빨리 대학에 가서 돈 많이 벌게. 좋은 곳에 취직도 해서 진아 공부도 시켜주고 그럴게.”
“정말이지? 나 이렇게 두지 않을 거지?”
진아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응, 나 진아를 많이 사랑해. 진심이야.”
“나도, 준이야….”
“이거 반지… 얼마 전에 맞춘 건데 이제야 주네.”
호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진아의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진아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지만 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진아를 꼭 안았다. 진아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순간 가슴에서 쓰라린 통증이 시작됐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몸이 아픈 것은 아닌데 선명한 통증이 느껴졌다. 몸과는 단절된 어떤 내적 고통이 뇌에 그대로 전해진 것 같았다.
통증이 멈출 무렵, 짙푸른 어둠이 사방에 깔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 바다 위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다….”
“그러네. 남쪽이라 못 볼 줄 알았는데.”
“오늘 그렇게 춥지도 않았는데.”
왜 바다는 사람들을 부르는 것일까. 여름엔 덥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시원한 곳을 찾는다지만, 겨울 바다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거친 파도가 모래를 삼키고 있었다. 눈을 이미 머금은 파도는 눈이 쌓여야 할 모래를 강하게 때리고는 모래의 속을 뒤집어 작은 결정까지도 앗아갔다. 그 무한한 반복, 자연의 양보와 섭리를 보면서 순간, 희랍인들의 경이(驚異)를 동감했다. 섭리의 과정과 결과가 유치하다면, 우리는 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시작된 용궁의 신화를 잊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일까? 바다 밑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다의 정수(淨水)는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바다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바다를 뒤로 한 채 진아와 나는 반지를 낀 손을 맞잡고 어둠과 눈을 피해 민박집으로 들어왔다.

그해 겨울에는 많은 눈이 왔다. 봄이 되자 눈들은 다시 녹기 시작했다. 엘니뇨 현상 때문에 지구 곳곳은 이상 기후를 보였다. 인도에서는 영하의 기온도 아닌 추위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갔고 시베리아에서는 이상 기온으로 만년설이 몇십 년 만에 녹기 시작했다. 남극의 빙하가 녹아 해수면의 상승을 걱정하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자연의 대순환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결국엔 종말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 당분간 일 안 나가.”
벚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 진아는 당분간 일을 쉰다고 말했다.
“무슨 일 있어?”
“요새 단속이 심하다고 엄마가 당분간 좀 쉬래.”
언제부턴가 진아는 포주인 그 여자를 엄마라고 불렀다. 진아가 한 말에 따르면, 그 여자는 사십 대 중반 미혼으로 사생아 한 명을 데려다 키우고 있었다. 물론 과거엔 청량리에서 알아주는 창녀였다. 최근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가면서 그나마 수하에 있던 여자들에게 잘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그러면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어디 놀러 갈까?”
“별로… 몸도 좀 안 좋고 그냥 집에서 푹 쉴래. 나중에 컨디션 좋아지면 벚꽃도 보고 놀이동산에도 가고 그러자.”
“그래….”
그로부터 일주일간 진아와 나는 둘도 없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진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정성스레 도시락을 준비했고, 수업이 끝날 때쯤 학원 앞으로 마중을 나와 함께 귀가했다. 마치 부부가 된 것처럼 같이 장을 보고, 저녁이면 함께 운동도 했다. 우리는 하룻밤에도 몇 번씩 섹스를 했다. 다투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서로 천생연분일 거라며 즐거워하고 행복해했다.
벚꽃이 지기 시작했다는 뉴스를 들은 어느 일요일 아침, 진아는 교회에 가자고 난데없이 졸랐다.
“준이도 교회 다녔다며? 애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며? 나도 교회 가고 싶어.”
“왜? 교회 가면 불편할 거야. 사람들이 얼마나 성가시게 구는데. 나도 뭘 모르고 다닌 거였어.”
“상관없어. 복음송이라고 했지? 찬송가 같은 거 부르면서 기타치고 그랬다고 했잖아. 아이들도 좋아했다고.”
“그거야 어렸을 때 얘기지. 지금은 안 가.”
“난 가보고 싶단 말이야. 어떤 곳인지 궁금해. 응? 한 번만 가자.”
하긴 며칠 전부터 진아는 좀 유별났다. 소형 오디오를 사 오더니 어디서 났는지 찬송가와 복음성가 시디들을 구해 와서는 밤낮을 안 가리고 음악을 틀었다. 아주 오래된 책이나 시디를 다시 꺼내보는 것만큼 귀찮은 일도 없다. 진아는 그때 잠깐 했던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지금 와서 나보고 교회를 가자고 조르는 것이다.
“왜 교회에 가고 싶어졌어? 난 진아한테 별다른 말 한 적 없는데.”
“기억 못 하는 거야? 나한테 처음 준 책, 그 책이 어떤 영향을 줬을 거 같아?”
“아… 그렇구나. 하지만 교회에 가면 실망할지도 몰라.”
“실망을 해도 내가 하니깐. 아무튼 같이 가자, 준이야. 응?”
그렇게 해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비교적 큰 교회를 찾아갔다. 교회엔 처음이라는 진아는 예배 시간 내내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가끔 교회 천장을 뚫어져라 보기도 했다. 기도 시각에는 눈을 꼭 감고 합장하듯 두 손을 펴서 모은 채로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예배가 끝나고 나오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진아의 옷차림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진아는 몰랐다. 진아는 나름대로 가장 깨끗하고 수수한 옷을 곳을 골라 입었기 때문이다.
“뭐라고 기도했어?”
“으응, 그냥….”
“뭐, 말 안 해도 돼. 기도는 절대자와의 비밀스런 대화니까.”
“여러 가지 기도했는데 다른 건 비밀이고, 준이랑 백만 년 동안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그랬지.”
“그렇구나.”
“근데, 준이야. 아까 마지막에 사람들이 다 같이 외우던 그 주문은 뭐야?”
“주문은 아니고, 주기도문이라고 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직접 가르쳐 준 거야. 일종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거야. ‘난 이런 것을 믿습니다’ 라고.”
“그렇구나. 난 설교 시간은 좀 지루했고 찬양할 때가 좋았어. 기도할 때도 좋았고. 우리 다음 주에도 또 오자. 약속할 거지?”
“그래. 진아 덕분에 교회 다시 열심히 다니겠는 걸, 하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아는 교회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이것저것 더 물어봤다. 집에 와서는 여전히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즐거워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성경책을 꺼내서 읽기도 하고 밤에 잠들기 전에는 기도까지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매주 교회에 다닌 지 한 달이 되던 어느 날, 진아는 다시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진아가 일을 나간 지 며칠 안 되어 여진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준이? 나 여진이야. 기억하지? 진아 친구. 오후에 나 좀 만나. 내가 네 시까지 학원 앞으로 갈 테니 진아한테는 비밀로 해. 있다가 보자」
여진이가 왜 갑자기 연락했는지 몰라 걱정이 됐다. 달리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수업이 빨리 끝나길 기다렸다. 영어 보충이 끝나자 3시 50분이었고, 집에 간다고 하는 윤정 누나와 세희, 용욱이와 함께 학원 밖으로 나왔다. 학원 정문에서 5m 떨어진 곳에 여진이가 서 있었다. 건강한 모습의 탄탄한 몸매는 여전했고 짙은 화장에 속옷이 보일 듯한 분홍빛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도 여전히 빛났다. 지나가는 학원생 모두가 여진을 한 번씩 흘끔 쳐다봤다.
“준이야! 여기.”
여진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손을 흔들어 자기 위치를 알렸다.
“쟤가 진아야?”
옆에 있던 윤정 누나가 물어봤다.
“아, 아니. 진아 친구.”
“근데 여기에 왜 왔어? 너 설마….”
“모르겠어. 갑자기 연락이 왔네. 먼저들 가요.”
누나와 세희, 용욱이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여진을 한 번 보더니 가볍게 목례하고는 천천히 사라졌다. 순간 당황한 여진은 얼굴을 붉히고는 그들에게 꾸벅 인사했다. 이럴 때 그녀들은 참 순진하다.
“오랜만이야.”
“근데 웬일이야?”
“오호, 이제 말도 놓고? 많이 달라졌네. 내가 누나뻘이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
타인의 인사에 당황해하던 여진은 금세 어디로 갔는지. 아무튼 그녀는 나보다 세 살이나 위였다.
“그, 그렇긴 하지만.”
“하하하. 그래, 말 놓고 편하게 대해. 그 전에 나 배고프니까 뭐 좀 먹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우리 둘은 학원 근처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여진은 떡볶이를 오랜만에 먹는다며 2인분이나 주문했다. 거기에 튀김 만두와 순대까지.
“걱정 마, 돈은 내가 낼 테니까.”
“아니야. 내가 살게.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온종일 걱정했어. 진아 때문에 그러지?”
“눈치는 빠르군. 근데 나는 이것 좀 먼저 먹어야겠어. 조금만 기다려.”
여진은 떡볶이와 만두, 순대를 차례대로 먹기 시작했다.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긴 그녀이기에 분식을 좋아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진아 만큼이나 먹성이 좋았다.
“왜 안 먹어? 이거 맛있는데.”
“응, 그래. 많이 먹어.”
나온 음식을 거의 다 먹고서 여진은 반대로 입을 열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휴…. 준이 너 요즘 눈치챈 거 없어?”
“뭘 말이야?
“진아한테서 이상한 점 발견 못 했냐고.”
“글쎄…. 별다른 건 없고 요즘 부쩍 교회에 가자고 했어.”
“교회? 교회 말이야?”
“응.”
“미친년, 아주 작정했구나.”
갑자기 욕을 쏟아낸 여진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이야?”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당분간 진아한테도 말하거나 내색하지 말고. 아니, 그건 내가 참견할 건 아니겠지. 준이가 듣고 알아서 판단해. 중요한 건 준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야. 알았지? 약속한다고 말해.”
“무슨 일인데 그래? 왜 그러는지 모르고 약속을 함부로 할 수는 없잖아.”
“휴, 이 바보야. 진아 임신했어. 그것도 눈치 못 챘어?”
여진은 한숨을 내쉬고 조용히 비밀을 털어놓았다.
“정말이야?”
기쁘다기보다 당황스러운 감정이 먼저 들었다. 믿을 수 없었다.
“나도 어제 알았어. 손님이 진아랑 방에 들어갔었는데 잠시 뒤에 옷도 제대로 안 입고 서둘러 나오더니 ‘이 년 배가 불렀다!’며 재수 없다고 막 지랄하는 거야. 나랑 포주 언니가 방에 들어가 보니까 정말 진아 배가 많이 나온 거 있지. 그냥 똥배가 나온 거랑은 달랐어. 언니도 한눈에 보더니 ‘저 쌍년, 지 몸 하나 관리 못 하고!’ 하면서 화냈고. 언니가 나더러 진아가 누구랑 사냐고 꼬치꼬치 캐묻기까지 했어. 잘 둘러대긴 했는데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아.”
“진아는, 진아는 어떻게 됐어? 오늘 아침에 아무 말도 안 하고 잠만 자길래 피곤한가 보다 하고 그냥 나왔는데….”
“그때가 새벽 2시쯤이었는데… 진아랑 그냥 일 마감하고 소주 마시면서 얘기했거든. 임신 4개월째래. 진아 말로는 준이 아이가 맞을 거래. 일할 때는 남자들한테 꼭 콘돔을 쓰게 했고, 준이와 관계할 때만 콘돔을 안 꼈대. 정말 그랬어?”
“진아랑 할 때 거의 안 썼던 거 같아…. 나도 그런 개념이 없었고….”
“진아가 왜 그랬을까? 휴… 아무튼 난 진아한테 빨리 지우라고 했어. 지금 지우면 좀 안 좋기는 하지만 저렇게 다닐 순 없잖아? 문제는 진아가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거야. 내 말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어. 준이는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지? 낙태는 죄짓는 거 아닐까….”
“죄는 무슨! 당장 너희들 애 낳고 살 환경이 돼? 어쩔 수 없잖아!”
여진은 자기 일처럼 화냈다. 정작 본인이 임신했다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건 그렇지만… 집에 가서 진아랑 상의해볼게.”
“상의할 게 뭐가 있어. 준이가 가서 따끔하게 말해. 당장 지우라고. 안 지우면 헤어진다고 해. 그리고 준이도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
“으응… 알았어.”
“그럼 나 간다. 잘해야 해. 진아한테 상처주지 말고.”
여진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먼저 일어났다. 지갑을 꺼내 계산하고 내 쪽을 한 번 더 보고는 분식집을 나섰다. 저 돈은 여진이 몸을 팔아 받은 돈이다. 그 돈으로 나는 내 살을 찌웠다. 진아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한 생명을 잉태시키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분식집에서 멍하니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진아는 이미 일을 나가고 집에 없었다. 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진아가 쓴 메모를 발견했다.
「준이야, 기다리다 먼저 일 나가. 보고 못가서 미안해. 내일 봐. 사랑해」
복잡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생각했다. 아마도 진아가 원하는 대로 놔주고 뒤에서 조용히 격려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진아가 끝까지 아이를 낳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아직 봄이라 해가 일찍 졌다. 침대에 누워 여러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꿈에서 진아는 나를 떠나 이름 모를 섬으로 팔려갔다. 끝까지 찾으러 다녔지만 만나지 못했다. 진아가 나를 피해 다녔기 때문이다.
‘준이야, 난 괜찮아. 그러니까 인제 그만 잊고 살자.’
꿈에서 진아는 그렇게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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