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일몰의 시작 #18] 진아는 그렇게 며칠 만에 변했다

이용준
  • 입력 2017.11.16 00:00
  • 수정 2021.12.16 02:2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5. 동거

그게 지금 내 인생이다. 좋은지 나쁜지 가치 판단에 앞서 순식간에 몰려든 유닛들은 결코 내게나 진아에게나 선한 것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만이 들었다.

“다음 주에는 기말시험이 있어요. 정식으로 보는 첫 시험이야. 일등 하는 학생에게는 학원비 전액이 면제됩니다. 삼등까지는 반액 장학금이고. 열심히들 하고 있지요?”
“네.”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에 가거나 놀러만 다니면 공부를 잘 할 수가 없어. 그러고도 좋은 성적을 기대하면 나쁜 학생이라고. 우리 반은 한 사람도 낙오 없이 열심히 할 것이라고 믿어요. 자, 여기 칠판에 있는 글자를 다 같이 읽어봅시다.”
“습관을 바꾸면 운명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다시 한번, 크게!”
“습관을 바꾸면 운명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그래요. 우리가 남들보다 머리가 떨어져, 성격이 안 좋아? 다 습관을 잘 못 들여서 그래. 담배도 좀 줄이고, 수업 들을 땐 열심히 듣고! 얼마든지 다시 시작하면 돼. 여러분은 아직 젊어요. 방과 후 학원에서 하루 두 시간만 공부하고 가도 다 일등 하고 합격할 수 있다고. 알았지요?”
“네!”
“오늘 하루도 수업 잘 듣고 점심도 맛있게 먹고. 있다가 오후에 봅시다. 반장.”
“차렷, 경례.”
“감사합니다.”

무뚝뚝하고 우직하면서도 정이 많은 분이다. 그 많은 잔소리도 정말 정성스럽고, 따듯하게 들렸다. 우리는 선생님을 ‘곰’이라고 불렀는데 큰 키에 덩치, 허스키한 목소리 그리고 느릿느릿한 말투와 성격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대학에서 국문과 교수를 하다가 그만두고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실력도 좋아서 책을 보지 않고 줄줄 외우면서 강의하는데 수업 방식은 사실 조금 지루했다. 아무튼 저런 선생님이 일선 학교에 있지 않고 이런 곳에 있다는 것도 참 다행이었다.
하지만 나는 방금 한 선생님 말씀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면 얼마든지 대학도 가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 말이다. 한 인간의 IQ, EQ 등은 모두 어린 시절에 결정된다. 한 번 방향을 벗어나면, 살짝 옆길로 새면 그 인생은 정점으로 갈 수 없게 된다고 나는 믿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모든 십 대들이 그 소중한 때를 학교와 학원에서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대통령에서 국무총리로, 과학자와 의사에서 교수로, 샐러리맨과 선생님에서 자영업자로, 전문 노동자에서 일당 잡부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젊을 때는 고생 좀 해도 견딜 수 있다고 다들 배워왔다.
“준이야, 나 이거 잘 모르겠다. 좀 가르쳐 줘봐.”
함께 수업 듣는 아주머니 중 내게 유일하게 말을 거는 분이다. 아니, 다른 아주머니들은 도통 학생들과 거의 이야기하지 않고 선생님과 하는데 이 아주머니는 우리를 자식처럼 생각하고 대해주는 고마운 분이다.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하면서 신학대학에 가기 위해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이 문제는 먼저 x에 5를 대입하고요, 이항해서 풀어주면 돼요. 자 이렇게….”
나는 연습장에 해제 과정을 써 내려갔다.
“아이고~ 준이는 이렇게 쉽게 하는데 나는 도무지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
“천천히 하나씩 하시면 금세 풀려요. 반복해서 풀어보시면 방식이 눈에 들어 오구요.”
“그게 나 같은 아줌마들은 쉽지가 않네. 고마워. 그런데 준이는 교회에 다닌다며?”
“누가 그래요? 전에 다니긴 했는데 요즘엔 안 가는데….”
“왜? 열심히 다녀야지….”
“교회에 실망해서요. 신자들도 싫고…. 내가 무얼 믿고 사는지도 모르겠고요.”
“에이, 똑똑한 학생이 바보같이. 교회를 사람보고 다니면 안 돼요. 하나님 보고 다녀야지.”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당장 눈앞에 안 보이는 하나님보다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더 가깝고 현실적이잖아요. 기억나는 말이 있어요.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라고요. 교인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데 너무 많은 죄를 짓고 있고….”
“신앙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문제야. 아무튼 준이가 다시 교회 나갔으면 좋겠구나. 준이는 공부해서 어느 대학에 갈 거니? 뭐 공부할 거야?”
“지금은 대학 갈 생각 없어요. 검정고시 마치고 일이나 하면서 편하게 지내고 싶어요.”
“신학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 꼭 목회자가 되지 않아도 말이야.”
“신학 공부는 하고 싶은데 신학교는 싫어요. 어렸을 때부터 신학 관련 서적들은 많이 봤지만 크게 영향을 받지 못한 것 같고요. 하나님을 찾으러 신학교에 가는 사람들, 전 아직 이해 못 하겠어요. 정 공부가 하고 싶으면 언젠가 하겠죠.”
“준이가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아줌마가 늘 기도할게.”
“네, 감사합니다.”
“나중에 아줌마네 집에 놀러 오지 않을래? 우리 아들하고 딸이 있는데 준이도 소개시켜 주고 싶고.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준이 좀 보고 배우라고.”
“시간 되면 놀러 갈게요.”
“그래, 아무튼 고맙다.”
아주머니와의 건조한 대화가 끝날 무렵 윤정 누나가 강의실 문 앞에 서서 나를 불렀다.
“준이야~ 준이야~!”
“저, 누나가 불러서 좀 나가 볼게요.”
“그래, 있다가 점심 같이 먹자.”
“네.”
아주머니와 이야기한 후, 신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는데 누나를 보는 순간 생각이 멈췄다.
“큰일 났어. 홍균이 오빠랑 정산이 오빠랑 싸워. 네가 가서 좀 말려봐.”
다급한 목소리였다.
“왜요?”
“모르겠어. 싸우러 옥상으로 올라갔어.”
두 사람이 옥상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뛰어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은 벌써 심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홍균이 형의 상의는 반쯤 찢어진 채였고 정산이 형은 입에서 피를 흘렸다. 옆에는 마침 담배를 피우러 온 수학 선생님이 싸움을 말리고 있었다.
“자네들, 몇 반이야. 이제 그만해!”
“내버려 두라고요! 선생님도 다치기 전에 비켜! 아, 저 미친 새끼. 또라이 아니야? 내가 뭘 어쨌다고!”
정산이 형이 말했다.
“형! 그만해!”
두 사람이 다시 엉클어 붙기 전에 사이로 끼어 들어갔다. 정산이 형은 우리 반에서 나이가 제일 많고 키도 상당히 큰 편에 속했다. 말은 별로 없었지만 가끔 실없는 농담을 하거나 위압적인 말을 해서 반 사람들의 기피 대상이기도 했다. 아마도 정산이 형의 쓸데없는 말이 홍균이 형을 자극했으리라. 홍균이 형은 어렸을 적부터 싸움으로 다져진 몸이지만 체구는 나보다 작았다. 170cm 정도 되는 키에 착해 보이는 얼굴, 하지만 싸움은 뻔한 결과가 날 것이다. 나는 홍균이 형에게 몸을 정면으로 밀착시켜 그를 뒤로 밀어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형, 이러면 안 돼. 형이 참아요.”
형의 눈에는 이미 내가 없었다. 홍균이 형은 오직 목표물만 응시하고 있었는데 황소와 같은 힘으로 방해가 되는 나를 벗어나려고 했다. 나로부터 살짝 뒤로 벗어나 괴상한 소리를 지르더니 남은 상의마저 찢어버리고 다시 목표물로 향해 돌진했다. 나도 그렇게 물러날 수 없었다. 형을 그대로 둔다면 상대는 크게 다칠 것이 뻔했다. 이미 나 또한 오래전부터 운동을 했었고 근력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온몸으로 형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형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목표물로 다가설 수 없게 되자 한 번 더 소리를 지르더니 옆에 있던 철제 쓰레기통을 들어 올리려 했다. 정산이 형 쪽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말리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질린 표정이 역력했고 더 싸울 의지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거친 욕설이 난무했다.
“형! 그만하라구요. 우리만 있는 거 아니잖아. 여기는 학원이야!”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홍균이 형은 나를 쳐다봤다. 이내 눈동자가 자리를 잡더니 평상시 그 눈빛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그 눈빛은 미안하고 겸연쩍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 준… 준이구나.”
“형, 괜찮아? 이제 그만 해요. 나랑 같이 내려가자.”
“그, 그래. 알았어.”
갑자기 조용해진 탓에 정산이 형도 더는 욕을 못 했다. 모든 사람이 나와 홍균이 형을 보고 있었다. 나는 형의 상의를 챙겨 같이 강의실로 내려왔다.
“옷이 이렇게 돼서… 어쩌지.”
“나 먼저 집에 갈게. 오늘은 수업 못 듣겠네. 미안해, 준이야.”
“아니야, 형. 내가 필기한 거 보여 줄게. 어서 집에 가서 씻고 좀 쉬어요.”
“그래, 고마워.”
형은 강의실로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학원 문을 나섰다. 바지만 입은 채 떳떳하게 활보하는 모습에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기보다는 용기가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거칠 것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순간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었다. 나는 평생을 비겁하게 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동시에 밀려왔다.
용욱이가 나중에 사건 전말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다가 정산이 형이 눈치도 없이 ‘니네 엄마가 어쩌고저쩌고’ 했다고 한다. 홍균이 형은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넘어가려고 웃으면서 ‘니네 엄마’라는 표현은 쓰지 말라고 했지만, 정산이 형은 그 말을 무시했다. 게다가 정산이 형은 밑도 끝도 없이 반말을 계속해댔고 군대도 안 갔다 온 녀석들이 무얼 알겠냐면서 훈계조로 이야기하는 것을 결국 홍균이 형이 참지 못했다. 조용히 옥상으로 따라 나오라는 말에 정산이 형이 건방지다며 홍균이 형의 머리를 툭 쳤고, 그때 눈에 살기를 띤 홍균이 형이 정산 형의 멱살을 잡고 옥상으로 끌고 갔다고 한다.
“정말 홍균이 형 무섭더라. 정산이 형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데 힘이 대단했어. 질질 끌려가더라니까. 준이 넌 괜찮냐?”
“시계 끈이 떨어진 것 빼고는….”
“여기 근처에 금은방 있던데 거기 가서 수리해야겠다.”
“시계 같은 거 나중에 고쳐도 되잖아. 아무튼 형은 집에 잘 갔을까.”
홍균이 형은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에 아는 거래처를 통해 직수입했다고 했다. 형에게 연락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정신없는 하루가 지났다. 오늘은 다들 일이 있어 바쁘다며 수업 후 각자의 길로 들어섰다. 난 혼자서 자취방으로 향했다.

“멍! 멍! 멍!”
계단을 올라가는데 하늘에서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렸다. 강아지라고 하기엔 좀 두터운 음색의 소리였는데 그 소리가 듣기 좋았다. 계단에 다 오르자 정말이지 큰 귀를 가진 잉글리쉬 코카스패니얼 류의 커다란 강아지가 방문 앞에서 뛰어다니다가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강아지에게 물었다.
“어? 넌 누구니?”
“미루라고 해.”
강아지를 보느라 옥상 마당 끝에 서 있던 진아를 그제야 보게 됐다. 보라색 긴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소박한 갈색 단발머리로 바뀌었다. 분홍색 니트에 꽃 모양 무늬가 새겨진 청바지를 입은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목소리 톤이 올라간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반갑게 외쳤다.
“진아! 다음 주에나 온다면서!”
“준이가 빨리 보고 싶어서. 나, 잠도 안 자고 나왔어.”
“분위기가 바뀌었네? 언제 왔어? 오래 기다렸어? 점심은 먹었고?”
“한 시간쯤 지난 것 같아. 나, 많이 배고파.”
“일단 들어가자. 내가 먹을 것 시켜줄게. 미루도 들어가자.”
“아니, 시키지 말고 직접 해주면 안 될까? 라면이라도 좋아.”
“먹을 게 라면밖에 없어서…. 정말 라면이라도 괜찮겠어?”
“응, 나 라면 좋아해. 대신 맛있게 끓여줘. 근데, 집 괜찮네. 꼭대기라 주변이 다 보이잖아?”
쌩긋 웃는 진아의 모습에서 많이 밝아진 것을 알게 됐다. 2주 만에 소녀는 이렇게 변할 수도 있는 거구나,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걱정됐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세희가 아침에 사다 놓은 파와 계란이 있었다. 나는 라면을 항상 일정한 방법으로 끓였지만, 물 조절을 정확히 못 해 가끔 실수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접하는 음식 앞에서는 누구든지 조심스럽고 겸손해지기 마련이다. 라면 면발이 한소끔 끓고 나서 계란을 잘 풀어 넣었다. 3분 뒤에는 파를 썰어 넣고 뚜껑을 닫은 후 가스 불을 껐다.
“그런데 웬 강아지야?”
“준이 심심할까 봐. 강아지 싫어하는 건 아니지?”
“강아지 정말 좋아해. 정말 길러도 돼?”
“이 녀석이 워낙 활달해서 목줄하고 길러야 할 거야. 산책도 자주 시켜줘야 하고.”
“정말 외로웠는데 미루가 생겨서 다행이다. 정말 고마워.”
“별거 아니야. 손님 중에 동물병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주셨어. 이제 태어난 지 3개월밖에 안 됐지만 꽤 크지? 잉코종은 다 그렇대.”
“그렇구나. 미루야, 이리 온.”
녀석은 벌써 이름을 알아듣고 잽싸게 내게 다가왔다. 짧은 꼬리를 쉴 새 없이 흔들며 손을 핥았다. 몸에서는 어린 강아지 냄새가 폴폴 풍겼는데 아마도 그 냄새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라면 다 됐다. 김치도 없는데 정말 괜찮겠어?”
“원래 김치 잘 안 먹어. 와, 맛있겠다! 아무튼 잘 먹겠습니다! 준이는 안 먹어?”
젓가락을 다시 놓으며 진아가 말했다.
“난 괜찮아. 학원에서 점심 먹은 지 얼마 안 됐어.”
“그렇구나. 아무튼 잘 먹을게.”
창녀의 젓가락질을 본 적 있는가? 진아는 젓가락질을 제대로 했다. 보통 귀엽고 착한 애들은 젓가락질을 신경 써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늘 밥 먹을 때면 상대를 불안하게 한다. 진아는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에게 젓가락질 하나부터 엄하게 교육을 받고 자란 것 같았다. 젓가락을 쥔 진아의 손 모양은 어쩔 수 없이 귀엽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사랑스러웠다.
“왜? 내 젓가락질 이상해? 이거 맞는데….”
“응, 젓가락질을 이쁘게 잘 하니까 맘에 들어서.”
“에이, 난 또 뭐라구. 라면 정말 맛있어. 준이도 한입만 먹어봐.”
“난 괜찮아.”
“어서, 자. 맛있지?”
“응, 맛있어.”
“매일 이렇게 밥 해주는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 가게에서는 한 끼는 시켜 먹고 한 끼는 언니들이 맛없는 밥 해주고 그래서 싫거든.”
“나머지 한 끼는?”
“우린 딱 두 끼만 먹어. 일하기 전 늦은 오후에 한 끼, 새벽녘에 손님들 거의 없을 때 한 끼. 그렇게.”
“그렇구나. 배는 안 고파?”
“배고프면 노점상이나 근처 편의점에서 군것질거리 같은 것들 사 먹고 그래. 다들 살찐다고 많이는 안 먹더라구. 살찌면 영업 끝이라고.”
“그렇구나…. 난 그래도 잘 먹는 사람이 좋던데.”
“나처럼? 히힛.”
진아는 라면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라면 한 개로는 부족할 만큼 배가 고팠나 보다.
“정말 잘 먹었어. 설거지는 내가 할게.”
“아니야. 손님에게 시킬 수는 없지.”
“이제 안주인이 될 거니까, 안주인이 해야지.”
“안주인이 된다니?”
“하하, 농담이야. 아무튼 설거지는 내가 할게요.”
설거지를 마친 진아는 사온 커피와 과일을 내왔다. 인스턴트커피였지만 커피와 설탕, 물 조절을 잘해서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담배 한 대 피워도 돼?”
“진아 담배 피워? 안 피웠었잖아.”
“피운 지 한 일주일 됐어.”
진아는 던힐 한 갑을 꺼내더니 그 얇은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불을 붙였다. 다시 젓가락을 쥐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여야 한다는 것처럼. 마치 내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나, 오늘 자고 가도 되겠지?” 검은 비닐봉지에 재를 털면서 진아가 말했다.
“그야 상관없지만…. 가게 안 가도 괜찮아?”
“오늘 처음으로 휴가를 받았거든! 처음에는 갈 곳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준이가 생각나더라구. 준이가 있어 줘서 고마워. 연락해줘서 고맙고.”
“그야 당연히 할 일을 한 건데. 진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었고.”
“그래도 고마워할 사람은 나라구. 정말 고마워, 준이야.”
고맙다는 말과 함께 진아는 내 볼에 키스했다. 참 기분 좋은 키스였지만 담배 냄새가 진하게 났다. 키스 때문인지 순간 내 몸에서는 불길이 확 솟아올랐다. 순진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나는 화제를 바꿨다.
“그 여진이라는 사람, 우리보다 나이가 많아?”
“응, 스무 살이야. 세 살 위.”
“좋은 사람 같아서.”
“좋은 언니야. 언니도 참 안 됐지만…. 그러고 보니 집에 없는 게 너무 많네!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어머! 거울도 없잖아! 잠깐, 나 집 구경 좀 하자.”
말하던 중간중간 방을 살펴보던 진아는 이야기를 하다말고 아예 일어나서 30분이나 꼼꼼하게 둘러보더니, 무언가를 가득 채워 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에는 필요한 물품들이 쭉 적혔는데 심지어 커튼과 식기 세척기까지 있었다.
“이 많은 걸 어떻게…. 나 밥은 거의 사 먹어. 집 꾸미는데 소질도 없고.”
“내가 준비하는 대신 나 여기 살아도 되는지 물어보려고.”
“정말이야? 가게에서 놔줄 수 있어?”
“아침마다 와서 잠만 잘 거야. 포주 언니가 얼마 전부터 교회에 다니더니 이상해진 것 같아. 돈도 더 주고, 삼촌들도 다른 곳으로 보내고, 생리 휴가도 주고. 뭐, 그건 단 하루뿐이지만…. 나도 큰 건수 하나 잡아서 돈을 많이 벌어 줬거든. 그랬더니 출퇴근은 알아서 하라고 그러더라고. 이제 좀 자유로워졌어. 준이 만나고 일이 잘 풀린 것 같아.”
나를 만나고 일이 잘 풀렸다는 진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진아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잘못을 인정한다고 고백하는 것과 실제 아는 것은 다르다. 지금의 진아는 나와 처음 만났을 때 그 조용하고 수줍음 많던 아이가 아니다. 나와 섹스하고 난 뒤 무언가 달라 보였던, 무언가를 결심했던 것처럼 보였던 진아는 그렇게 며칠 만에 변했다. 하지만 나는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다. 진아와의 약속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없다.
“나는 상관없지만 진아가 힘들지 않을까 해서….”
“그럼 오케이 한 거지? 아, 신난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슬롯이 제각기 움직였다. 어떠한 공통된 주제도 없이, 사람들과 사건들, 슬롯들은 제각기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부조화가 어떻게든 통일을 이뤘는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결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게 지금 내 인생이다. 좋은지 나쁜지 가치 판단에 앞서 순식간에 몰려든 유닛들은 결코 내게나 진아에게나 선한 것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만이 들었다. 미루 녀석만이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내 곁에 와서 털썩 주저앉고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진아를 쳐다봤다.

by 이준 -Copyrights ⓒ말산업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