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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시작 #16]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어디 갔는지 몰라.”

이용준
  • 입력 2017.11.15 00:00
  • 수정 2021.12.16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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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옥탑방

신도 아마 이 외로움을 그의 고유한 속성으로 가지고 있으리라. 모든 걸 다 할 수 있었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을 못 이겨 인간을 창조하고, 세계를 타락시키고,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자살을 택한 것은 결국 신이다. 외로움은 결국 사랑을 낳았다. 사랑은 관계를 발생시켰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관계는 악을 필연적으로 몰고 왔다. 결국 사랑과 관계 그리고 악은 하나다. 신의 삼위가 그러한 것처럼.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난방을 했는데도 바닥은 차갑고 웃바람이 심해서 코끝이 시렸다. 세희는 입은 옷 그대로, 누웠던 자세 그대로 잘 자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이불을 덮고 한 손으로는 침대 왼쪽 아래 기둥을 꼭 잡은 자세로…. 숨 고르는 소리조차 없이 고요하게, 폭풍이 밀려올 것만 같은 그러한 고요함을 간직한 채 자고 있었다.
세희는 나보다 한 학년 빠르게 학교에 다녔지만 나이는 같다고 했다. 생일이 빠른 덕분에 학교를 일찍 들어갔는데 그 때문일까. 역시나 나처럼, 남들보다 빨리 학교를 그만뒀다. 지금은 강남에 있는 술집에서 웨이트리스를 한다고 했다.
“나 술집 나가.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어디 갔는지 몰라.”
처음 봤을 때 아무 거리낌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 스스로는 볼 수 없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약점을 숨기려거나 거짓말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는데, 그러고 보면 세희도 참 강한 여자 같다. 내가 세희나 홍균이 형 그리고 윤정 누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아마도 지금의 이들이 서 있는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이렇게 공부하겠다고 용기 낸 것만으로도 이들은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 아닐까.
밖에서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천둥의 중심이 내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세희와 단둘이 방에 있으니 갑자기 진아가 보고 싶었다. 만난 지 2주가 지났다. 진아는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진아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집에서 가져온 몇 안 되는 책 중에는 청량리에서 무료 급식을 한다는 목사님의 자서전이 있었다. 그 책을 챙겨서 진아를 찾았다. 예수가 간음한 여자를 용서한 이야기나 무료 급식과 천사 병원의 시작이 몸 파는 여자들의 돈으로 시작했다는 이야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단지 성적으로 타락한 부도덕한 시대를 정죄하려는 신의 율법이나 명령 같은 것을 가르치려는 단순한 시도는 아닌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남의 일처럼 읽고, 신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단순해지기 마련이다. 계시된 언어나 사랑의 언어처럼 보편적인 말들은 궁극적으로 누군가에게 알려져야만 한다는 선포적인 그 특성 때문에,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커뮤니케이션 구조에는 너무나 많은 자기모순이 깔려있다. 하지만 대부분 어른이나 선택됐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신의 사랑에 눈이 멀어 도통 자신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신의 뜻에 가장 적대적인 것조차 모른 채….
자취방에서 진아가 있는 곳까지는 걸어서 30분이 채 안 걸렸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인적은 한산했지만, 핑크빛 물결이 보이는 곳부터 사람들의 발자국은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 이 작은 거리를 배회했다. 그런 발자국과는 다른 흔적을 남기고 싶다고 나는 생각했다.
경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길을 건너 작은 골목길에 들어섰다. 음침한 잿빛 하늘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온 듯 그 분위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진아는 없었고, 다른 여자 세 명만 있었다. 비가 꽤 많이 내리고 있었고 밤이라 상당히 추웠는데 그 여자들은 한결같이 얇고 짧은 비키니 차림이다. 전에도 봤던 그녀들의 하이힐은 유난히 굽이 높았다. 단지 키를 커 보이게 하려고 이런 불편한 것을 신는 것일까. 아마도 창녀들의 굽 높은 하이힐은 ‘나’를 밟아달라는, 누군가의 섹스 판타지를 자극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런 특이한 하이힐은 그녀들에겐 곧 영업 수단이며 오랜 경험에서 나온 삶의 지혜와도 같은 것이리라.
“오빠, 여기야, 여기!”
“잘해줄게! 일루와.”
“저기, 진아는 어디 갔어요?”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한 여자에게 말했다.
“오빠, 진아 단골이야? 진아 지금 손님 받고 있는데… 그냥 나랑 하자. 한 시간짜리라 좀 오래 걸려.”
“비오니까 좀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하자.”
긴 금발의 가발을 쓴 여자가 다짜고짜 안으로 끌어들였다. 진아를 처음 봤던 그 장소였다. 떠밀리다시피 들어와서 당황한 사이, 여자는 갑자기 내 바지 위로 손을 대고는 성기를 움켜쥐었다.
“이야, 오빠 물건 튼실한데? 깔깔깔.”
“아앗!”
“왜 그래, 잘 생긴 오빠. 꼭 처음인 것처럼. 내가 잘해줄게. 응?”
여자 입에서는 담배 냄새와 소주 냄새가 진동했다. 가녀린 두 팔로 내 한 손을 꼭 붙잡고 가슴을 내 팔과 어깨에 비벼대며 아양을 떨었다. 나는 애써 손을 빼 여자에게서 떨어졌다.
“아우, 미친년아, 작작 좀 해. 오빠 미안해. 얘 좀 취했어.”
옆에 있던 한 여자가 대신 사과했다.
“순진한 척하기는. 야! 너 지금 여기에 씹질 하러 온 거잖아. 안 그래? 왜 내가 맘에 안 들어? 더러워 보이냐?”
금발의 여자는 금세 눈에 독기를 품고 때릴 듯이 나를 째려봤다.
“어? 나 저 오빠 알아. 오빠, 진아 친구지? 이름이… 준이라고 했어. 맞지?”
금발 대신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던 여자는 갑자기 내가 누군지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 네.”
“맞구나! 진아가 오빠 기다렸는데! 진아 오늘 외박 나갔어. 돈 많은 사장님 하나가 찐따 붙어서 진아 요즘 바쁘거든.”
“그래요? 아… 어쩌지. 오늘 못 만나는 거죠?”
“아마도 그럴걸. 아침은 다 돼서야 돌아오니까. 근데 왜?”
“그냥 진아 보고 싶어서 왔어요. 읽을 책도 전해줄 겸 해서.”
“그 책은 두고 가. 내가 전해줄게.”
“고마워요.”
“고마워요, 왔어요, 요가 뭐니. 요 빼고 말해봐. 그럼 전해줄게.”
“그래도 처음 보는 사인데.”
“처음 보는 사이지 우리가 그럼. 그거랑 말 놓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오빠, 자꾸 그렇게 귀엽게 굴래? 내가 진아만 아니면 확 따먹을 수 있어.”
“…….”
“킥킥. 농담이야. 우리 같은 애들한테 존댓말 쓰는 사람 거의 없잖아. 그냥 고마워서 장난 좀 쳐봤어. 진아가 하도 준이, 준이 하길래 누군가 궁금했었거든. 어휴,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아무튼 책은 내가 책임지고 전할게. 나, 여진이라고 해.”
여진이라고 밝힌 그 여자는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푸른빛이 도는 눈을 가졌다. 처음엔 불빛 때문에 잘 못 본 거나 색깔이 들어간 렌즈를 낀 것으로 생각했다. 혼혈아 같지는 않았지만 유전적 결과를 달리 설명할 수 없는, 하지만 상당히 예쁜 눈이었다. 마르거나 키가 너무 크다거나 가슴이 이상하게 크다거나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녀는 가장 건강해 보여서 예뻐 보였다.
“고마워요. 그럼 자, 책 여기… 나중에 다시 온다고 전해줘요.”
“알았어. 조심해서 가. 여자 조심하고! 후훗.”
진아 친구라고 밝힌 여진은 건강한 모습답게 밝은 성격이었다. 씩씩한 친구가 곁에 있으니 진아에게 잘 됐다고, 덜 외로울 테니 다행이었다. 일은 힘들지 않은지 걱정도 됐다. 이들 또한 늘 같은 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헛걸음한 안타까움에 연락이라도 하고 올 걸 하고 후회했다. 비는 계속 내렸다. 진아가 없는 청량리는 더욱 외로워 보였다. 나는 아마도 이 외로움에 평생 감염될 것 같다.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혼자 내버려 지는 걸 지독히도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잔혹하리만치 깊은 자아의 늪에 빠졌으면서도 외부로부터 오는 영원한 구원을 꿈꾼다. 신도 아마 이 외로움을 그의 고유한 속성으로 가지고 있으리라. 모든 걸 다 할 수 있었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을 못 이겨 인간을 창조하고, 세계를 타락시키고,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자살을 택한 것은 결국 신이다. 외로움은 결국 사랑을 낳았다. 사랑은 관계를 발생시켰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관계는 악을 필연적으로 몰고 왔다. 결국 사랑과 관계 그리고 악은 하나다. 신의 삼위가 그러한 것처럼. 결국은 존재 이후에 발생하는 관계의 감정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닐까? 그가 창조주이며 전능한 존재일지라도 외부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다시 자취방에 도착했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 세희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가 양말만 벗고 방바닥에 누웠다.
“으음… 준이야. 비 오는데 어디 갔다 왔어?”
“어? 깼구나. 미안해. 그냥 잠시 바람 좀 쐬고 오느라.”
“밖에 춥잖아. 바닥도 차갑던데. 일루 올라와.”
“아니야, 괜찮아.”
“빨리 와. 나, 두 번 말 안 하는 거 알지? 일루 와서 자. 대신 이상한 짓 하면 죽여 버린다.”
“아, 알았어.”
내가 몸을 일으키자 세희는 침대 구석으로 몸을 돌려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누군가를 배려하는 행동은 언제나 잘 보이기 마련이다. 비에 젖은 바지를 갈아입고 세희에게 등을 돌린 채 옆으로 누웠다. 바보 같은 생각에서 시작했지만 그 순간 진아가 너무나 그리웠다. 아마 난 진아와의 섹스를 기대하고 그녀를 찾아갔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단지 외로움 때문에,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리웠던 것뿐일까? 내게 기댄 진아의 마음을 그냥 두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일까? 이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사랑의 이름으로 그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을까?
세희도 좋은 사람이지만 진아와는 다르다. 나는 강하기보다 여린 사람을 좋아한다. 전자는 이중성에 물들어 있다. 또한 사랑을 받기보다는 사랑을 주고 싶다. 그것이 단지 섹스든 물질적 도움이든 관심이든 애정이든 상관없다. 하지만 문제는 나부터 사랑을 받아본 적 없었기에 사랑을 주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나는 한 여자를 하룻밤 살만한 돈도 없다.
“뭐야, 이 바보. 몸이 이렇게 차가운데. 손은 또 왜 이렇게 차가워! 뭐 하고 온 거야?”
“그냥 좀 돌아다녔어.”
“자, 이거 덮어. 난 더우니까. 잠 더 깨기 전에 난 더 잔다. 잘 자.”
“응, 세희도 잘 자.”
“…….”
조용했다. 창가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잠을 못 이루던 세희는 뒤척이다가 갑자기 뒤에서 나를 안았다. 얇은 팔로 내 허리를 감싸며 내 오른손을 잡았고 다른 팔로는 머리맡의 베개처럼 다정하게 내 머릿밑을 파고 들어왔다. 세희의 가슴이 등에 와서 닿았다. 작은 가슴인데도 느낌은 강했다. 그 공간, 시간 속에서는 신경이 유일하게 집중되는 순간이었으므로….
“뭐야, 머리가 무겁잖아. 아무튼 여기까지야.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
잠에 막 빠져드는 어린아이가 칭얼대는 것처럼 세희는 그러나 선을 분명하게 그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알았어… 그만 자자.”
“그래, 잘 자.”

꿈에서 나는 어떤 여자와 끊임없이 키스하고 있다. 누군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얼굴도, 전체적인 느낌과 모습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는데 그건 아마도 현실 세계의 그녀라기보다 언젠가 꿈에서 본 모습을 기억한 것 같다. 키스의 느낌도 그대로 살아 있었다. 평범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느낌. 그것이 키스의 본질이 아닐까. 영혼의 교감이라고 흔히들 말하는 키스는 그렇기 때문에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더욱 간절한 법이다.

“준이야, 그만 일어나~ 밥 먹고 학원 가자.”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쳤다. 삐삐를 보니 진아에게서 호출이 왔다. 시간은 아침 8시였다. 세희는 머리를 감았는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참 깨끗하고 예뻤다. 열일곱 살 여자아이에게 어울리는 것은 화장한 얼굴보다 핏기 없고 여드름이 그득한 민얼굴 아닐까.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 속옷 입은 여자 처음 봐?”
가뜩이나 말랐는데 얇은 슬립하나만 입고 있으니 더 야위어 보였다.
“계란도 넣고, 파도 썰어서 라면 끓였어. 비 온 다음 날 아침에 먹는 라면 맛이 최고라고. 그런데 어떻게 냉장고가 텅텅 비었냐? 김치는 없고 빵하고 버터만 있고. 아무튼 남자들이란….”
세희는 작은 밥상 위에 신문지 하나를 깔고 냄비 채 라면을 들고 와서 젓가락을 내밀었다. 그 순간이 갑자기 정겨워 눈물이 나려고 했다. 일급 요리사의 비싼 음식이나 잔칫집 진수성찬을 보고 먹을 때의 느낌이 아니다. 음식을 할 줄 모르는, 아직 신부 수업을 다 마치지 못해 결혼할 준비가 안 된 착한 예비 신부가 정성을 들여 준비한 식사는 감동을 준다. 세희가 끓여준 라면도 그런 것 같았다.
“이래 봬도 라면 하나는 잘 끓여. 맛있을 거야.”
“응, 잘 먹을게.”
“맛 어때? 괜찮지?”
“와, 정말 맛있네. 집에 계란이나 파도 없었을 텐데….”
“일찍 일어나서 근처 시장에서 사 왔지. 우리 같은 사람들일수록 밥을 더 잘 챙겨 먹고 다녀야 남들한테 무시당하지 않아요. 알았어? 킥킥.”
맛있게 라면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대충 씻고는 집을 나섰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시작한다.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이 너무나 든든하고 행복해서 온종일 기분 좋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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