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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시작 #15] “전국의 검정고시생들을 위하여, 건배!”

이용준
  • 입력 2017.11.13 00:00
  • 수정 2021.12.16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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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옥탑방

누군가가 함께한다는 느낌, 그것만으로 큰 빚을 진 것 같다. 방에 들어온 지 한 시간도 채 안 됐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둘러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어색하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준이야, 너 혼자 자취한다고?”
자율 학습이 끝나고 정규 수업이 시작되기 전, 윤정 누나는 캔커피를 하나 건네며 말을 걸었다.
“응, 그렇게 됐어.”
“어딘데? 왜 혼자 힘들게 자취하고 그래.”
“대광고등학교 쪽으로 가다 보면 있어. 학원에서 10분밖에 안 걸려.”
“부모님은 뭐라고 하셔?”
“그냥 나왔어요. 그냥, 집이랑 사이가 안 좋아서….”
“에휴, 누나 걱정된다. 밥은 어떻게 하고?”
“알아서 되겠지. 그런데 오늘은 선생님이 늦네?”
“그러게. 아무튼 있다가 수업 끝나고 같이 가 보자.”
“응.”

“자, 오늘 또 새로운 친구들이 몇 사람 더 왔어. 다음 달에나 새로 반을 개강하는데 그때까지 기다리기보다 공부하는 것이 더 낫다고 결심해서 중간에 등록한 친구들이네. 자기소개 간단히 하고 자리에 들어가서 앉아요.”
조회 시간에 걸걸한 목소리로 담임이 말했다.
“양희정입니다.”
“세희예요, 김세희. 열일곱 살이고요, 언니, 오빠들과 잘 지내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용욱입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임홍균이라고 합니다. 기초가 부족한데 함께 열심히 공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외에 두세 명 더, 총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인사를 마치고 각자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이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윤정 누나와 벌써 친해진 용욱이와 세희를 누나가 소개했다.
“저 난 아직 열일곱 살이라… 또래가 있을까요?”
씩씩하게 인사했던 용욱이가 말했다.
“여기 준이도 열일곱이야. 인사해.”
“아, 그렇구나. 안녕.”
“안녕.”
“준이야, 여기는 용욱이, 여기는 세희야. 오늘 새로 왔잖아. 둘 다 준이랑 동갑이네.”
“반가워. 난 준이라고 해.”
“준이가 공부를 정말 잘 해.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그래.”
“에이 참, 누나는….”
“우리 수업 끝나고 준이네 집에 다 같이 놀러 가자. 집들이도 할 겸, 청소나 정리하는 거 도와줄 겸.”
“그래요. 그런데 준이는 혼자 살아?”
“응, 며칠 됐어.”
“그렇구나. 부럽다.”
“자, 아무튼 있다가 다들 같이 가기야. 준이야 괜찮지?”
“응, 상관없어. 나야 고맙지 뭐.”
수업을 마치고 누나와 친구들과 함께 자취방으로 왔다. 윤정 누나와 함께 어떤 남자도 따라왔는데, 그도 오늘 학원에 새로 온 사람이었다. 검은 테 안경에 녹색 스웨터를 입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고 상당히 지적인 이미지였다.
“준이라고? 난 홍균이라고 해. 임홍균. 스물네 살이고. 내가 형이지?”
한참 뒤떨어져서 누나와 말하면서 걷더니 어느새 내 옆으로 온 형이 먼저 말을 걸었다.
“네, 반가워요.”
“나, 실은 중학교 중퇴야. 영어야 뭐 어떻게든 외우면 되겠지만 수학은 기초가 너무 부족해서…. 많이 도와줘. 부탁할게.”
형은 비밀이라는 듯 조용히 말했다.
“그렇구나…. 같이 열심히 해요.”
지난 며칠간 혼자 잠들었던 방이다. 가구라고는 전에 살던 사람이 두고 간 침대와 옷장이 전부인 방 하나짜리 옥탑방이다. 보증금 250만 원에 월 25만 원이 전부인 그럴 값어치를 하는 방. 이것이 지금 내 전부다.
“우리 집보다 좋네. 조금 청소하고 꾸미면 좋은 방이겠다.”
“옥탑방이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는데 이 방은 전망도 좋고 그나마 남향이라 좀 낫겠는걸.”
“물은 잘 나와? 방은 따듯하고? 그래도 도배는 새로 다 했네.”
모두 나를 안 지 얼마 안 됐지만 여러 가지로 신경 써서 도움을 주는 모습에 감동했다. 서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사랑과 열정이 마음에 깊이 새겨진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을 아예 받지 못하고 자라서 스스로 갈망하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사랑은 몸이 안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준이네 집들이도 왔으니 다 같이 한잔하자. 자, 여기 소주랑 잔 받으시고, 건배!”
“건배~!”
“안주로 뭐 좀 시켜 먹어요. 내가 살게.”
벌써 친해진 세희가 가볍게 제안했다.
“감자탕 시키자. 학원 앞에 맛있게 하는 곳 있어.”
누군가가 함께한다는 느낌, 그것만으로 큰 빚을 진 것 같다. 방에 들어온 지 한 시간도 채 안 됐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둘러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어색하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어른이 아닌 나이에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섹스를 한다는 것에 누구보다 부정적이었지만, 그것은 단지 문화와 시간적 차이에서 생긴 기호 차이일 뿐이다. 기호는 나이에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의지적 성격이나 행동 문제에서 일으킨 잘못들이야 말로 더 무섭고 잔인할 수 있다.
“준이는 무슨 생각을 그리 하기에 말이 없어. 자, 한잔해.”
“고마워요.”
“그래도 우리가 와서 좋지?”
“응.”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우린 검정고시 동문이잖아? 하하하.”
“홍균 오빠 말대로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니까 앞으로 영원히 함께하자. 자, 전국의 검정고시생들을 위하여, 건배!”
“건배!”
배달시킨 감자탕도 얼큰하게 먹고 다섯 명이서 소주를 열다섯 병이나 먹었을 무렵, 밖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시간은 8시가 넘었다.
“다들 배부른가 봐? 취하지는 않았지? 끅~.”
“너무 졸립다. 준이야, 나 침대에서 한숨만 잘게.”
“그래.”
“준이야, 난 먼저 갈게. 또 약속이 있거든.”
“그래, 용욱아. 오늘 와 줘서 고마워.”
“뭘, 앞으로도 자주 놀러 와도 되지?”
“그럼, 당연하지.”
내가 대답했다.
“누나, 홍균 형, 나 먼저 갈게요.”
“그래 잘 가. 내일 보자.”
용욱이는 먼저 갔고 침대에는 세희가 잠들었다. 나와 홍균 형과 윤정 누나만 남아서 자리를 다시 잡고 앉아 술을 마셨다.
“준이야, 혼자 사는 거 안 힘들겠어?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마음이 편한 게 좋은 거 같아요. 정말이지 차라리 이게 편해. 학원은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 받고 다니고 저녁에 일하려고요.”
“공부하면서 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나도 지금 하는 일 그만두려고 하는데….”
“그래, 일하고 나면 피곤해서 밤에 글자 하나 보기 힘든 건 사실이야.” 소주를 제일 많이 마셨지만 혼자 멀쩡한 홍균이 형이 옆에서 누나를 거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누나나 형은 무슨 일을 해요? 나 할 만한 일거리 뭐 좀 없을까?”
“아, 나… 난 옷가게 다녀. 삼성동에서 일하고 있어.”
“난 지금은 그만뒀지만, 술집 몇 군데 관리했었어. 일이야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는데 좀 고되고 어려울 거야.”
“그렇구나, 형에게 일거리 좀 부탁해도 될까요?”
“그야 뭐 상관없지만….”
“그래, 오빠가 준이 일 좀 알아봐 줘. 오빠네 가게가 어디라고 했지? 신사동이던가?”
“신사에도 있고 역삼에도 있어. 이제 내 가게는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도 소개할 수는 있어. 준이가 좀 우리랑 어울리지 않을까 봐 걱정이지….”
“하긴 그건 그래….”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난 아무 일이나 다 할 자신 있어.”
“그래, 아무튼 내가 알아볼게….”
“고마워요, 형. 그런데 형은 왜 다시 공부하게 됐어요? 빈말이 아니라 솔직히 오늘 형 처음 봤을 때 검정고시 할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어. 명문대 다니는 대학생으로 보이는걸.”
“내가 좀 지적으로 보이긴 하지. 어려 보이기도 하고, 하하.”
“뭐야, 하하하.”
“여자 친구가 공부하라고 했어. 난 중학교 중퇴지만, 여자 친구는 서강대에 다니고 있거든. 계속 만나려면 혼자 공부해서 대학까지 가라는 거야. 그래서 오게 됐어.”
“우아, 대단하다. 두 분 어떻게 만났는데요?”
“차 사고가 났었어. 혜정이가 내 차를 뒤에서 받았는데 그렇게 알게 됐지. 내가 첫눈에 반해서 계속 따라 다녔고…. 그런데 혜정이네 부모님께서 나를 싫어하셔서 걱정이야.”
“왜요, 학교 때문에? 에이, 그건 아니다.”
“어른들이라고.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난 아직 번번한 직업도 없고…. 하는 짓이라고는 싸움하고 어린애, 여자 등쳐먹는 일만 배웠는걸.”
“오빠도 좀 놀았나 보구나? 준이야, 실은 홍균이 오빠 조폭이래.”
“아, 그렇구나….”
“이제 손 씻으려고…. 시골 촌놈이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인걸.”
“형은 어떻게 조직에 들어가게 됐어요? 궁금해. 사연이 많을 거 같아.”
“대단한 건 아니야. 음….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한 뒤 어머니가 집을 나갔었어. 서울로 갔다는 이야기만 듣고서 초등학교 때 무작정 서울로 왔지. 며칠 동안 청량리역에서 어머니를 찾다가 결국 못 찾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한 아저씨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밥을 사준다고 해서 따라가게 됐어. 남대문시장으로 데리고 가더니 순대국밥을 사주고 잘 곳이 없으면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해서 따라갔지. 도착한 곳은 남산 근처 쪽방촌이었고. 작은 방에 들어가자 그 사람을 보고 “아빠!”라며 반기던 한 꼬마 여자애가 기억나. 그렇게 그날 밤은 셋이서 잠을 자고 다음 날부터 난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껌이나 사탕 같은 걸 팔러 다녔어. 돈을 많이 벌지 못하면 아저씨가 매를 심하게 때렸는데 한 달 정도 지나자 매 맞는 것이 정말 지긋지긋하더라구.
그래서 또 도망쳤어. 밤에는 주택 옥상에 올라가 자기도 했고 배고프면 시장에서 음식을 훔쳐 먹기도 하고. 제기동 근처까지 오게 됐는데 시장에서 튀김을 훔쳐 먹고 달아나다가 결국 잡혔지. 인정머리 없는 그 주인은 나를 경찰서로 데리고 간다고 난리를 쳤어. 그때 한 젊은 남자가 오더니 어린애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냐고 말하더군. 분을 못 이긴 주인은 이런 녀석은 본때를 봐야 한다고, 상관 말라며 그 남자를 밀치고 나를 계속 끌고 갔어. 시장 뒷골목까지 끌려갔는데 갑자기 다섯 명쯤 되는 남자들이 우리를 둘러쌌어. 그 젊은 남자는 뒤에서 그만 아이를 놓고 가라고 조용히 말하는데 정말 무섭더라고. 그 음식집 주인은 소리치다가 그들에게 몇 대 맞고서 나를 놓고는 줄행랑치더라고.
그렇게 우리 보스를 만났어. 고향이 어디냐,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느냐 등등 여러 가지를 묻다가 내가 갈 곳이 없는 걸 알자 부하들 숙소로 데려가라고 했지. 그다음 날부터 그 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면서 형들과 지내게 됐고. 보스는 그래도 초등학교는 마쳐야 한다며 학교를 등록해줬고 학교에서 매일 싸움만 했지만 그래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게 됐지. 중학교에서 패싸움하다가 결국 퇴학을 당했고, 보스 밑에서 조직 생활을 하면서 10년을 보내게 된 거야. 작년에 보스가 빵에 가면서 나보고 공부하라고, 넌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했고 그때 우연히 혜정이를 만나게 됐고…. 그래서 이렇게 공부하려고 왔어. 이쯤 하면 재밌는 이야기가 됐겠지?”
“그래서 오빠, 엄마는 찾았어?”
“어머니는 작년에 찾았어. 애들 시켜서 수소문했는데 우습게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던 거야. 어머니는 재혼해서 여동생을 낳았는데 이제 초등학생이고. 여자아인데 아주 귀여워. 어머니가 많이 아파서 지금은 나랑 같이 살고 있어.”
“정말 다행이다.”
“그래, 정말 다행이지….”
“오빠는 그러면 나쁜 짓도 다 해봤겠네? 마약이라든지, 살인이라든지…. 뭐, 꼭 말하지 않겠다면 상관없지만 말이야.”
소주를 마저 입에 털어 넣고 안주로 담배를 물은 윤정 누나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마약은 몇 번 하고선 그만뒀어. 친구 한 놈이 마약 때문에 미쳐버리는 것을 보고 그만뒀지. 윤정이도, 준이도, 마약은 하지 마. 대마는 쉽게 접할 수 있고 끊기도 비교적 쉬운데 필로폰이나 다른 것들은 정말 죽음이야. 윤정이, 너 담배 끊는 거 어렵지? 담배야 서서히 몸을 죽이지만, 마약은 손대는 그 날로 인생 끝났다고 보면 돼. 난 혜정이를 만나고 같이 있게 되니까 자연스레 약을 못 하게 됐어. 초반이었으니까 더 안 할 수 있었지.”
“사람은 죽여 봤어? 어때? 느낌이….”
“누나, 뭐 그런 것까지 물어보고 그래요.”
“꼭 내 자랑하는 것 같잖아. 하긴 자랑은 아니지만, 휴…. 니들 나 신고하면 평생 쫓아다닐 거야. 하하하.”
장난기 가득한 형의 눈빛에서는 갑자기 살기가 돋았다.
“조직끼리 붙잖아. 평상시엔 다른 둔기를 쓰지만 특별한 날에는 칼을 쓰게 돼. 내가 죽지 않으려면 방어해야 하잖아. 딱 한 번, 보스의 사주를 받고 누군가를 찔러 본 적은 있어. 죽이진 않았고. 아, 이런 얘기 그만하자.”
“오빠, 그럼 지금은 조직과 다 끊은 거야? 관리하는 곳은 이제 더 없어?”
“보스가 감방에 들어가고 나도 이제 이 짓거리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게 됐어. 보스에게 면회 갔을 때 일 그만하고 공부하겠다고 맹세도 했고…. 하지만 나도 지위가 꽤 높은 편이라 직접 관리하진 않지만 자주 일을 보러는 다녀. 또 그래야만 하고.”
“신사동이면 호스트바가 많은데 혹시 그런 일도 해? 준이에게 소개한다는 일도 그런 거야?”
“아, 아니야. 준이한테 그런 일 시키고 싶지 않아. 준이야, 호스트바는 인생 종착역들이나 가는 곳이야. 연줄 없고 여자 밝히고 나약한 놈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준이가 원하면 웨이터나 업소를 봐주는 다른 일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런 건 잊어.”
“네, 그럴게요. 그래도 형이 소개해주는 일이면 아무거나 다 좋을 거 같아.”
“알았어. 내가 신경 써서 해 줄게. 자, 우리도 이제 갈 때 되었잖아?”
“어머, 벌써 11시네. 언제 집에 가서 잔담. 세희, 쟤는 잘 자네… 깨울까?”
“두고 가자. 자는 사람 깨우는 거 싫어. 준이가 설마 무슨 짓 하겠어? 하하하.”
“그… 그래도. 준이야, 어떻게 할까?”
“난 괜찮아. 치우고 바닥에서 자면 되는걸. 세희랑 내일 같이 학원가지 뭐.”
“그래, 그럼 우리 먼저 갈게. 나오지 마.”
“오늘 고마웠어요.”
“그래,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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