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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시작 #11] 그네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만 키워갔다고 해야 할까

이용준
  • 입력 2017.10.30 00:00
  • 수정 2021.12.16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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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검정고시

책을 통해 배운 건 사랑이나 실천의 삶보다 사창가 여자들과 펨푸라 불리는 아줌마들의 삶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네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만 더욱 키워갔다고 해야 할까.

「클래스 에이치 원(Class H1). 등록번호 96-10-13. 이름 이 준.
위 학생은 본 학원의 학생임을 증명합니다. - 검정고시 전문 고려학원 (신설동 로터리 사거리 옆) 전화 02-2233-3311」

학원에서 등록 절차를 마쳤다. 명함 사이즈만한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으면서 낯선 느낌이 들었지만, 마찬가지로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있을 것을 갈망한 나머지 이곳을 찾아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강의실을 찾아 3층으로 올라갔다. 좁은 통로에서는 쾨쾨한 냄새가 나고 껌과 침으로 도배된 지저분한 환경에 불쾌감이 엄습했다. 강의실 문을 열자 미리 와 있던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서로 친구인 듯한 네 명의 남자아이들과 중년의 아주머니 두 명이 앞자리에 앉아 있었고, 뒤쪽에는 따로 떨어져 앉은 몇몇 여자아이들이 있었다.
맨 뒷자리, 그것도 왼쪽 구석에 앉아 이러한 상황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웃음이 났다.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지 대상 없는 원망도 치밀어 올랐다. 십여 분 동안 열 명 정도의 학생들이 들어오고 난 후, 검은 피부에 갈색 양복을 입은 선생님이 마이크를 들고 강의실로 들어섰다. 전형적인 고등학교 선생님 같은, 조금은 엄해 보이는 모습이다.
“허음, 흠, 자 이제 출석을 부를 테니 대답들 해요. 박경철!”
목에서 가래가 끓는 듯한, 탁하고 둔탁한 음성이다. 아무런 소개도 없이 출석을 부르는 상황에 조금은 당황한 듯 앞쪽에 있던 한 남자가 대답했다.
“네!”
“권안영”
“네”
“김범수!
“여기요~.”
“정명정, 명정이?”
“아, 네~ 저예요.”
약 스무 명의 이름이 더 불리고 나서야 내 이름도 호명됐고, 나는 ‘네’라고 짧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조만간 이곳에는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목소리로, 아무도 기억할 수 없도록 말이다.
“허음, 흠, 그래, 이름 안 부른 사람 있어요?”
“저요, 이은정입니다.”

“이은정? 아, 여기 있군. 다른 사람은? 그래. 아무튼 이곳에 온 걸 환영합니다. 다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년에 있을 시험 때까지 꾸준히 참고 공부하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겁니다. 오늘은 간단히 실력 테스트를 하고….”
“에이, 뭐에요~.”
“뭐야, 벌써 시험이야!”
테스트라는 말에 강의실이 술렁댔다. 선생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어려운 거 아니야. 중학교 수준의 영어와 수학만 실력 테스트를 하는 거니까 금방 보고 끝날 거야. 시험 다 보고 정상 수업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이니 그때 보도록 합시다.”
한 장씩 따로 나온 시험지는 정말 중학교 수준이었다. 영어 과목은 동사 변화, 간단한 영작과 문법 문제가 나왔고 수학은 집합과 일차 방정식, 함수 문제가 전부였다. ‘뭐, 어차피 상관없으니까’라고 생각하면서 문제를 가장 먼저 풀고 답안지를 제출한 후 서둘러 강의실을 나섰다.

서울 도심 한복판의 공기는 자극적이었다. 우중충한 하늘빛 그리고 그 공기에는 먼지와 매연이 얹혀 있는 듯 무언가 공중을 붕붕 떠다니는 것만 같았는데 마치 태양의 직사광선을 막아 그림자를 지워야 한다는 의무를 짊어진 하나의 일꾼과도 같다.
“저기요, 잠깐만요.”
약간은 들떠있는, 그러나 조금은 허스키한 여자의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낯이 익은 모습이다. 나보다 많아야 두세 살 위일 것 같은 여자였지만, 짙은 화장과 강렬한 향수 냄새,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어서 나이는 좀 더 들어 보이는, 그런 모습이다.
“저, 아까… 그 검정고시 학원에서… 만난 사람인데요.”
머뭇거리면서 말을 건넨 여자는 손에 그 시험지를 들고 있었다.
“저 혹시 이 문제 다 풀었나 해서요. 제일 먼저 나가길래.”
“아, 그냥 대충 풀었는걸요. 왜 그러시는데요?”
“답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해서요.”
“그런 거 잘 기억 못 하는데… 정답은 아니겠지만, 제가 적은 걸 써 드릴게요.”
나는 애써 기억하면서, 아니 거의 처음부터 문제를 푸는 것처럼 답을 다시 적어서 여자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집에 가서 답과 맞춰볼 수 있을까 해서요. 다음 주에 학원에서 만날 수 있겠죠? 나중에 만나요.”
“아, 네. 그래요….”
“그럼 이만.”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를 건넨 여자에게 눈을 마주쳐 응대하고 바로 뒤를 돌아 길을 건넜다. ‘참 이상한 사람이야.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온 사람인가 보네’ 라고 생각하면서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지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제 세상에 발을 내딛게 된 초년생으로 책에서 보고 경험한 것들이 그 자리에 정말로 있는 것인지, 그러한 일들이 정말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앞으로 십 년간은 이런 수많은 경험을 쌓으며 잘 기록하고, 반성하며 단상을 적어두는 것만으로 세상 그 누구보다 앞선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남들이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는 것이야말로 내 삶의 목적에 부합한 것이며 내게 남은 유일한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것 때문에 나는 학교를 그만둔 것은 아닐까?
학원이 위치한 신설동은 처음 왔지만, 다음 길을 지나면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예상은 거의 들어맞았다. 이곳에서 30여 분 걸어가면 속칭 사람들이 588청량리라고 부르는, 사창가가 있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았다. 교회에 잠시 다닐 때, 그곳에서 무료 배식을 하며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한 목사님의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통해 배운 건 사랑이나 실천의 삶보다 사창가 여자들과 펨푸라 불리는 아줌마들의 삶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네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만 더욱 키워갔다고 해야 할까. 이것이 모두를 향한 복수의 길이며 나 스스로를 방황과 방탕으로 몰아가는 첫 번째 선택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늦가을 날씨 탓인지 바람은 더욱 심하게 불었고 날은 벌써 저물기 시작했다. 금요일 오후의 도심은 더욱 붐볐다. 작은 다리를 하나 건너고, 백화점을 지나고, 약재들을 파는 큰 시장을 지나자 청량리역이 나왔다.
어렸을 적 동해로 부모님과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갔던 때의 그 청량리역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낯설었지만, 청량리역 앞 광장과 분위기는 날씨만큼이나 우울했다. 아마도 삶의 터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내뱉는 이산화탄소와 그들이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먼지들, 의미 없는 말들이 공중에 섞여 이 분위기를, 한 도시와 지역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리라. 너무나 많은 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그 말들이 들릴 때면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게 되지만. 어쨌거나 청량리역 앞에는 여행을 가려는 사람들과 노점상 몇 개만 보일 뿐 어디서도 몸을 파는 여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청량리와는 어울리지 않을법한 백화점 하나가 크게 자리 잡고 있어 우울한 이곳 미관을 해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십 여분 동안 역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가려고 백화점 주차장 옆을 지나 걸어가는데 순간 주변 공기와 분위기가 급작스럽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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