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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시작 #8] 내 이성은 언제부터 감정을 초월할 의지를 장착했을까

이용준
  • 입력 2017.10.20 00:00
  • 수정 2021.12.16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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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갈라짐

우린 때때로 무언가를 해야 하고 무언가에 매달려 질주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 나 자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뒤처졌고 더는 역전을 할 힘도 의지도 없으며 그건 이미 실행 불가능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유치한 것들을 버렸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통해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듯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준이야, 선생님이랑 어떻게 됐어?”
“으응, 그 이후로 잘 지냈어. 거의 매일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가끔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그랬어. 내가 2학년 때 경기도 산본으로 전학 오는 바람에 더 못 만나게 됐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집으로 편지도 써 주셨어.”
“에이~ 시시해. 그게 다야? 더 자세히 얘기해 봐. 궁금해.”
“맞아, 그런 건 누구나 한 번씩 겪잖아? 선생님 좋아하는 게 뭐 대단한 거라구.”
“그래…. 맞아. 별일 아니야. 우리 이제 점심 먹을 때 된 것 같은데?”
“은정이랑 화장실 갔다가 올게.”
별일 아니라고… 그래. 선생님도 그런 사랑은 누구나 앓는 홍역이라고 말했다. 내 정도가 조금 심하다는 말과 함께.
이야기를 마친 후 은정이와 진아, 찬이와 점심을 먹고 텔레비전을 봤다.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니야’라는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돈다. 갑자기 우울해진 나는 이곳을 나가고 싶어졌다. 간호사실에서 무언가를 적고 있는 수간호사가 보였다. 그에게 부탁하면 흠 잡힐 일을 하는 것 같아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저….”
“왜? 준이. 무슨 일이야?”
“전화 한 통화 하고 싶어서요. 어머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가져올 건 더 없잖아? 말했다시피 한 달 동안 전화는 할 수 없어. 얌전히 있어.” 수간호사는 더는 내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전화 한 통이면 된다구요. 부탁할게요. 네?”
“안 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한 통이면 된다구요! 그깟 전화도 못 하게 해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순간 수간호사는 나를 힐끔 보더니 겁먹은 얼굴로 직원을 호출했다. 그들은 억지로 나를 잡아채서 휴게실로 보내려 했고, 나는 힘을 다해 저항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전화 한 통이면 된다구! 왜 못하게 하는 건데! 니들이 뭔데!”
“조용히 못 해! 자꾸 이러면 너 여기서 평생 썩는 수가 있어.”
그들은 나를 휴게실로 끌고 가서는 내동댕이쳤다. 분한 나머지 휴게실의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그때 친절한 그 간호사가 입 모양으로 ‘쉿’ 하면서 다가왔다.
“난동 부리면 더 힘들어져. 조용히 있자. 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해볼게.”
“단지 전화하고 싶었을 뿐이라고요.”
“그래, 알았어. 전화해보고 어머니 오시라고 할게.”
“준이야,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진아는 간호사를 한번 흘기고는 내게 바짝 다가와 팔짱을 꼈다.
“별일 아냐. 전화도 못 하게 해서 그래.”
“아무튼 저 사람들은 정말. 언니가 나중에 전화해 줄 거지?”
“알았으니까 조용히들 있어요.”
“준이야,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창가에 가서 바람이라도 쐬자.”
우리 둘은 쇠창살이 난 창문으로 가서 바깥세상을 바라봤다. 낯선 나무들과 다른 건물들, 주차된 차들이 보였다. 벌써 난 세상과 단절된 걸까? 자연과 인조 건물들의 조화롭지 못한 광경에 짜증이 더해진다. 바깥에 있을 때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모습들인데….
그때 차가 주차된 쪽으로 걸어가는 낯익은 부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은 어린 시절 봤던 내 부모와 똑같았다. 키가 큰 아버지 덕분에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도 부모를 잃을 걱정을 하지 않고 다녔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보면 아버지 머리 하나가 늘 주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엄마는 표준 한국인의 어머니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나지 않게 살면서 가끔은 맞벌이로 가정 경제에 보탰고, 자녀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엄마. 나는 그런 부모가 싫어서 두 번 가출했었다.
그런데 저 앞, 눈에 보이는 그들은 정말이지 내 부모다.
“엄마! 엄마! 나 여기야! 내보내 줘요!”
갑자기 들린 소리에 두 사람은 차를 타려다 말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이어 나를 발견했다. 30m 이상 떨어진 거리였는데 쇠창살이 깔린 창문에서 울부짖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
“여기야! 여기! 엄마! 나 좀 내보내 줘요!”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조용히 못 해!”라고 소리 지르며 뒤에서 나를 잡아챘다. 직원들은 이럴 때마다 삶의 목적을 되찾는 것 같다. 나는 계속 악을 질렀고, 다시 끌려가면서 부모님이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준이, 너 자꾸 이러면 곤란해. 한 달만 참으면 되는데 난동 피우면 일 년도 더 있을 수 있어.”
“왜 그래요! 준이야, 괜찮아? 준이 부모님을 불러줘요! 준이는 이런 데 있을 사람이 아니야!” 진아는 수간호사에게 대들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런 데 있을 사람이 아니야, 이런 데 있을 사람이 아니야, 이런 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라고….
사람들이 차츰 주위로 몰려왔다. 그들의 조용한 오후를 내가 망쳐놓았다는 듯이 혹은 저잣거리 싸움 구경을 하러 온 듯한 그들의 몸짓을 보고, 그런 생각을 읽을수록 점점 내 신경은 예민해진다.
“준이 너는 방에 가 있어. 저녁 먹을 때까지 나오지 마!”
수간호사의 위압적인 명령을 듣고 나는 둘러싼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방으로 갔다. 진아와 은정, 찬이가 뒤따라왔다.
“형, 정말 부모님이었어? 연락도 안 했는데 오셨을 리가 없는데….”
“다른 사람 아니야?”
“너희들도 조용히 해. 준이야, 우리도 그만 갈 테니까 그만 쉬어. 잠 좀 자두라고.”
“미안해. 나 좀 잘게.”
병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보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들은 분명 내 부모가 맞았다. 진아의 말이 계속해서 떠오르며 다른 생각을 방해했다. 그러다가 문뜩 선잠이 들었는데 방송 소리에 잠이 깼다.
“준이 학생, 준이 학생, 지금 식당으로 빨리 오세요.”
친절한 간호사의 음성이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도,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게 되거나 호기심이 들지도 않았다. 이젠 명령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린 때때로 무언가를 해야 하고 무언가에 매달려 질주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 나 자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뒤처졌고 더는 역전을 할 힘도 의지도 없으며 그건 이미 실행 불가능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하지만 마라톤을 포기하는 대신 10,000m 정도는 달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42.195km짜리는 무의미하다. 그 길이는 어떠한 구미도 당기지 못한다. 하지만 단기간 레이스, 짧게 살 수만 있다면 거기에 모든 것을 던지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내 전부를 보여주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이길 수 있는 것, 나의 치부, 두려움, 욕망을 보여주면 아마 난 100m도 차마 못 달릴뿐더러 출발점에서 건 샷으로 누군가의 머리를 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식당으로 들어서니 수간호사와 부모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들을 보는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하기엔… 이미 늦은 것일까. 운다는 건 누군가에게 졌다는 걸 의미한다고 해서 의식적으로 울지 않거나 하지는 않았다. 눈물샘이 말라서 울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표현하거나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감정이 메말랐다는 말은 마음에서 발생한 감정을 정신, 정확히 말해서 이성이 인식하지 못하고 그 무언가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 이성은 언제부터 감정을 초월할 의지를 장착했을까.
어머니는 내 옆에 와서 미안하다고 계속 되뇌었고, 아버지는 크게 한숨을 한번 쉬고는 나를 안았다. 반에서 1등을 했을 때 격식을 차려 악수를 건넨 사람, 정신병원에서 미안하다며 생애 처음으로 안아주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할 수 없다. 외아들을 탕아로 만든 사람은 그저 그 아들과 단절된 타자일 뿐이다.
“다시는 이런 곳에 보내지 않을게. 미안하다. 이런 곳인지 몰랐어.”
아버지는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곳인지 몰랐어, 이런 곳인지 몰랐어, 이런 곳인지 몰랐어….’
이곳이 어떻다고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과 다시는 보내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벌어졌다.
“잠깐만!”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달려왔다. 탁구채를 처음 건넸던 아저씨였다.
“여기가 내 주소야. 자, 이거 받고. 나중에 놀러 와. 나도 금방 돌아갈 거야. 내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거든. 꼭 놀러 와야 해.”
“…….”
“꼭 이야, 꼭! 다시 만나는 거다. 다신 이런 곳으로 오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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