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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시작 #6] 나는 이미 교회나 성경과는 멀어졌다

이용준
  • 입력 2017.09.17 00:00
  • 수정 2021.12.16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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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아

“준이 학생, 어머님이 책 몇 권하고 새 일기장을 보내셨어. 자 여기.”
간호사가 책들과 작은 일기장을 건넸다. 작은 일기장은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디자인도, 색도 아니다. 알록달록한 무늬의 색, 겉에는 ‘오, 해피데이’라고 쓰였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이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일일까. 일기장 맨 첫 페이지에는 엄마의 편지글이 있었다.

「준, 아무 염려와 걱정 말고 네 몸 생각하고 엄마와 상봉할 때까지 우리 기도하며 지내자. 네 옆에는 항상 하나님과 우리 가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명심하고 마음 약하게 먹어서는 절대 안 돼. 엄마가 쉬지 않고 기도해 줄께. - 항상 너를 사랑하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또한 누군가를 사랑할 만큼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그 어떤 부모도 자식을 전부, 혹은 자식의 전부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항상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느낄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랑은 사랑만을 통해 본색을 드러내지만 미움은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서 접근한다. 사소한 미움 하나는 아이들에겐 평생의 상처가 될 수 있고, 평생 사랑을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사랑한다’고, 이제와 그런 말을 듣는다 해도 눈물이 나지 않는 이유는 상처가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느끼는 공허함은, 손에서 사라지는 상실감보다 심하지 않다. 선택을 하라면 차라리 빈곤, 가난, 불행을 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감정을 양으로 환원할 수 없다지만, 우리는 그 감정의 수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분명, 완벽한 사랑은 신만이 할 수 있다. 그 점을 인정한다면, 그 어떤 부모도 자식에게 미움을 나타내서는 안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화를 낸다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다.
세 권의 책은 몇 번씩이나 읽었던 것이다. 샐린져의 『호밀밭의 파수꾼』, 로제 마르탱의 『회색노트』그리고 무라카미 류의 『오디션』.
책 외에 음악 테이프도 몇 개 있었는데 이곳에서 쓸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들고 다녔던 성경까지 끼워 보냈다. 일곱 살 때쯤일까, 교회 다니길 좋아한 나는 모든 것을 보이는 대로 믿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무런 회의나 의심 없이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은 바보나 할 짓이다. 나는 이미 교회나 성경과는 멀어졌다. 아직도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자들을 비웃을 수 있었다.
병실 침대 옆 탁자에 책을 두고 침대에 누웠다. 잠시 뒤 의사가 회진하는 듯 병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내가 있는 병실로 몇몇 사람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어제의 그 의사와 간호사 두 명 그리고 다른 남자 두 명이었다. 그 뒤로 환자복 입은 노인 한 명과 중년의 여자가 병실 문 바로 앞에 멈춰서 얼굴만 내민 채 병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래, 좀 있을 만한가? 괴롭히는 사람은 없지?”
“네.”
정신과 의사는 날카로워 보여야 하는 걸까. 그는 내가 본 다른 뚱뚱한 의사들과는 달리 말랐으며 아침 면도를 안 한 듯 수염이 조금 자라 있었다. 나는 저 수염의 느낌을 안다. 얼굴 표면을 뚫고 삐져나온 저 수 많은 칼은 이곳과의 단절을 말하는 듯했다. 눈은 퀭하니 쑥 들어가 있었으며 빗질도 안 한 흰머리가 보였다. 눈빛 또한 그다지 친절해 보이지 않는다.
“문제 안 일으키고 약 잘 먹으면 금방 퇴원해. 아침에 어머님께서 오셔서 책 몇 권 놓고 가셨는데 받았지?”
“네.” 나는 그에게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에 간단하게 대답만 했다.
“어디 보자, 성경책이군. 아니, 누가 여기에 만년필을 들여놓았어? 간호사, 이거 당장 치워. 위험한 줄 알면서 왜 이러는 거야?”
히스테리컬한 의사의 목소리를 듣기는 쉬운 일이다. 조용하던 그에게 만년필 하나만 보여 주면 되니까.
“환자 어머니가 잘 전해주라고 해서 전….”
“사람이 죽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그 만년필은 작년 생일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좋아했던 여자 친구의 또 다른 친구가 선물한 것인데 나는 내가 좋아한 그 아이가 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만년필은 소중했다. 의사는 그 뾰족한 심으로 목이나 손을 찌를 것으로 생각했는지 퇴원할 때 돌려주겠노라 하고는 만년필을 내게서 앗아갔다. 그렇게 자살할 방법을 찾았다면 이미 칫솔을 반으로 부러뜨린 채 목을 찔렀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정작 그의 눈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에게 속아 이곳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보다. 스스로 그런 눈을 보고도, 그가 내 이야길 들어줄 사람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착각의 대가는 항상 쓰다. 가끔 맛볼 수 있었던 쓰디 쓴 초콜릿이 기억났다. 작은 할머니가 살던 이태원을 갈 때마다 항상 주전부리로 먹었던 외제 과자나 외제 초콜릿들. 겉봉엔 한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수입품들 중에는 쓴맛이 강한 초콜릿이 있었다. 어릴 땐 이런 걸 누가 먹으라고 만든 것일까, 미국인들은 이런 걸 즐겨 먹는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쓴’ 초콜릿일 뿐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한들 그 쓴맛은 바뀌지 않는다. 어쩌면 이 의사는 쓴 초콜릿을 즐겨 먹을지도 모른다.
“자, 그럼 몸조리 잘하고 나중에 또 보자고.”
“네.”
의사가 나가면서 준 약을 먹었다. 잠이 쏟아진다. 약 먹지 않는 방법을 진아가 가르쳐줬지만, 솔직히 약을 안 먹는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지. 어차피 이곳까지 흘러들어 온 이상 뭐든 어찌 되건 상관이 없었다. 잠결에 진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빠져들기 시작한 잠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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