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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시작 #5]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죽음의 방해꾼과도 같았지.”

이용준
  • 입력 2017.09.14 00:00
  • 수정 2021.12.16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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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아

나와 같은 17살의 여자들은 전부다 모르는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고 몸을 팔고 집을 나가는 게 당연한 건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창문사이로 새들의 울음소리가 빛과 함께 밀려온다. 깨어난다는 것은 또 다른 태어남을 의미하기에 아침은 늘 지옥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자고 일어난 후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어린 아이였던 나와 지금의 나를 구분 짓는 것은 수많은 상실감이다. 자고 일어난 뒤 눈을 비비고 살펴보면 항상 곁에 있었던 엄마의 체온을 잃어버린 지는 꽤 오래다. 진아는 지금 옆에서 내 체온과 기억을 덥혀 줬다.
어제 밤 그대로 진아도 잠이 들었다. 쭈그려 앉은 채 내 가슴에 기대어 있었는데 페니스는 아직도 발기한 채로 그녀 안에 있었다. 내 정액과 그녀의 체액들이 뒤엉켜 서로의 성기를 뒤덮고 있었고 덥고도 끈적한 느낌에 불쾌한 기분이 다시 밀려온다.
아침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고 불안해진 나는 진아를 깨웠다.
“진아야, 일어나. 아침이야.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아.”
“으응? 아앗, 다리 저려. 어떡해.”
연신 다리가 저린 듯 진아는 코끝에 침을 묻혔다. 그러고는 한 번 살짝 웃으며 내 코끝에도 그녀의 침을 묻히고는 재밌다는 듯 계속 웃었다.
“잘 잤지? 어디 이상한 데는 없어?”
살짝 내 볼에 입맞춤을 하고는 엉거주춤 일어난 진아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그곳을 닦았다. 가까이에서 본 여자 성기는 진아 것이 처음이었다. 아직 완전히 검은 빛을 내지 못하는 털은 그곳을 덮기엔 수도 적은 듯했다. 덧칠되어 있는 체액들 사이로 비친 그녀의 작은 보물은 촉촉한 물기를 머금었다.
“왜 그래? 설마 준이 또 하고 싶어서?”
“아니야, 그냥 실제로는 처음 보는 거라 신기해서….”
“음… 알았어. 그럼 준이에게만 특별히 1분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겠노라. 큭큭큭.”
진아의 말이 내게로 떨어지는 순간 또 종소리가 울린다. 벌써 아침을 먹으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우리가 없어진 것을 알아챈 것일까.
“걱정 마.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소리야. 천천히 나가자. 내가 나가고 좀 뒤에 따라 나오면 될 거야.”
서둘러 옷을 입은 진아는 먼저 조용히 걸어 나갔고, 속으로 열까지 센 후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놀라기는. 너 어제 진아랑 여기서 잤니? 아우 그년 성질도 급하기는 정말. 그나저나 준이 너한테 실망이다.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순진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는데 전혀 아니구나?”
은정이었다. 허리를 반쯤 구부렸던 나는 고개를 들어 은정이를 쳐다봤다. 대꾸할 새도 없이 은정이는 ‘칫’ 하는 표정을 지으며 뛰쳐나갔다. 따라가서 뭐라고 설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일단 씻고 싶었다. 섹스한 후에 모든 기분은 이렇게 나른하고도 찝찔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다리는 왜 이렇게 떨리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며 욕실에서 간단히 샤워를 마쳤다.
그날 아침은 최악이었다. 진아와 은정이는 싸웠는지 떨어져 앉은 채 각자 밥을 먹었고 나도 그들에게 가지 못한 채 혼자 먹었다. 국은 간이 하나도 안 된 맹물 같았고 밥은 어제 남은 것을 다시 준 듯 쉰 냄새가 풍기기까지 했다. 반찬도 어제 그대로였다. 하긴 이런 식당에 식단이라는 것이 없어도 누구 하나 항의할 사람은 없다. 미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깐.
식사가 끝나고 대부분 사람들은 중앙홀에 모여 잡담을 하거나 장기를 두거나 탁구를 치고 있었다. 이렇게 이들의 하루 일과가 시작했다. 누군가가 보내주는 돈으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이들의 정신을 맑게 해주는 걸까. 외로움도 타지 않고 바깥 생활을 그리워하지도 않으며 보고 싶은 가족도 없는 걸까.
의자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진아와 은정, 그리고 찬이가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진아는 자연스럽다는 듯 옆으로 다가와 내게 팔짱을 끼었는데, 은정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불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어린 나를 보는 부모의 시선 같았다.
아주 다른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고 자식을 기르면서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저지른다. 그 사이에서 아이들은 많은 혼란을 느끼고 모든 가치관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모든 불안감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증오로 변했으며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우울해진다.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못 느끼게 되는 우울감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만든다. 결국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기성세대는 책임을 회피하고자 아이들의 방황이란 한때의 일 혹은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집을 나간다거나 학교를 그만두거나 나쁜 친구들과 어울린다거나 싸움을 하고 다니는 이유는 행위의 주체인 그들 스스로에게 있지 않다.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그들에게는 사회의 모든 것을 제대로 여과시킬 만한 장치가 완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 혼자 버려지는 건 독립심이나 강한 다리를 갖게 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어린 아이에게 맞는 자연스러운 본성 때문에,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말하기를 꺼려하고, 낯을 가리기 마련이다. 이미 잘못 만들어진, 실패한 여과기를 장착한 기계들은 똑같은 여과기를 장착하게 할 로봇을 찍어낸다. 이 공정을 무시하는 어린 로봇들은 부모란 기계에 의해 병원으로 보내지거나 스스로 전원을 내리게 하도록 강요받는다. 타락한 공장은 끊임없이, 결국엔 폐기물이 될 로봇을 찍어내고는 많은 작업량을 처리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춘 것에 대해 아낌없이 치하한다. 버림받은 우리들은 아마도 그 공장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세계의 첫 걸음은 유감스럽게도 이곳, 정신병원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아침도 거의 안 먹더니, 배 안 고파?”
“형, 괜찮은 거야? 안색이 별로야. 적응 안 되지?”
“밤에 진아랑 재미 좋았나보네. 그 생각하고 있는 거지?”
진아가 은정이를 향해 눈을 흘긴다. 어차피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면 난 이들마저도 상실해 버릴 텐데, 그리고 이들은 나를 찾지 않을 텐데,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사랑하고 다시 헤어질 텐데, 이렇게 아옹다옹 다투는 것은 아마도 이것이 우정이나 사랑의 본질 때문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둘이 왜 그래. 나랑 진아는 어제 아무 일도 없었어. 새벽에 담배 피운 것뿐이야.”
“맞아, 우린 그냥 얘기한 것뿐이라구. 준이는 순진해서 하자고 해도 거부하던데 뭘. 킥킥.”
진아는 나를 흘끔 쳐다보며 한쪽 눈을 찡그린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양 어깨를 살짝 들었다 내려놓고는 슬쩍 팔짱낀 손을 풀어버린다.
“설마, 그게 정말이야? 진아를 옆에 두고…. 혹시 준이 고자 아니야? 킬킬킬.” 모든 원망을 내게 하려고 기다렸다는 듯 은정이 말했다.
“야, 남자들이 뭐 다 너 같이 밝히는 줄 알어? 정작 자기는 한 번도 못 해 본 주제에. 형은 섹스 해본 적 있어?” 같은 남자인 찬이가 나를 변호했다.
“으응… 있지….”
“언제였는데? 얘기 좀 해줘. 누구랑 해봤어?”
“몰라. 우리 딴 얘기나 하자. 분위기 이상하다.”
“그래 그게 좋겠다. 오늘은 다시 은정이 차례지? 과거 얘기 말이야. 자, 얼른 털어놓으시지.”
“뭐니, 왜 나한테 화살이 날라 와? 새로 왔으니깐 준이가 얘기해. 난 싫어.”
“약속은 약속이고 차례는 차례라고. 준이는 찬이 다음이야. 이번엔 분명히 은정이 네 차례라고.”
“알았어. 알았어. 하면 될 거 아냐.”
이들은 서로 이곳에 오기 전까지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제안한 사람은 진아였는데 이런 과정이 이곳에서 먹는 약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은정이 결국엔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번에 내가 집을 나간 이유에 대해 다 설명했지? 그럼 오늘은 내가 집을 나가고 난 후부터 있었던 일들을 말해 줄께. 뭐 화려한 경력의 진아 보다야 못하겠지만 나 그래도 꽤 잘 나갔었다구.”
자주색 소파에 깊숙이 앉아 이야기하는 은정이는 옅은 브라운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이건 버릇이라는 듯 손가락으로 계속 옆머리를 꼬아댔다. 은정의 손가락에 꼬아져 있는 머리카락은 어렸을 적 놀러간 해변의 물속에서 자주 봤던 미역과도 같았다. 사람의 검은 머리는 염색약이 입혀져 갖가지 브라운의 색이 되지만, 미끈한 긴 미역줄기는 태양을 먹고 탈색이 되어버린다. 은정이가 마치 ‘이 머리는 탈색된 미역줄기와도 같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의 정신이나 경험은 누군가에 의해 덧입히지만 않았다면, 몸이 성장하면서 정신도 온전하게 탈색될 곳을 찾았다면 아마도 자살을 한다거나 집을 나간다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이런 곳에 발붙일 이유는 없어지는 것이다. 미세한 먼지처럼 수많은 작은 경험, 사건들은 우리를 엄청난 상황으로 몰아간다. 사람들의 선택을 따라가길 거부한 아이들, 혹은 그 선택의 기회를 놓쳐버린 아이들이 이곳에 있다고 느껴지자 이들은 마치 무언가에 열중한 예술가는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은정이는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일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난 중2때 이미 학교를 그만뒀고, 집을 나와서 생활을 시작했어. 내가 살았던 곳은 참외가 유명한 경북 성주야. 재작년 11월일거야. 짐을 싸고는 같은 반 친구 한 명과 같이 성주 시내로 나와서는 한 다방으로 갔지. 당장 먹고 살 돈을 마련하려면 주유소에서 일하는 것 보다 다방이 나을 거라는 친구 말 때문이었어.
소개소를 거치지 않고, 유흥업소를 두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시골에선 흔치 않은 일이야. 우리를 본 마담 언니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것저것 물어보더라. 나이는 어떻게 되느냐, 집은 어디냐, 일할 자신은 있느냐 등등을 간단히 물어보고는 우리가 갈 데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일하도록 허락했어. 우선 옷이나 화장품들이 필요할 거라며 같이 쇼핑을 하자고 했고.
처음엔 이곳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지. 그냥 차 따르고 커피나 잘 타면 되는 줄 알았거든. 며칠이 지나 마담언니가 부르는 거야. 배달을 나가야 한다며 같이 있던 삼촌에게 태워주라고 하더라고. 멋도 모르고 삼촌과 함께 배달 간 곳은 시내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는 모텔이었어. 모텔에서 커피를 시켜 먹는 사람도 있구나 라는 생각에 우스워지려는데 방에 들어서자 아무도 없는 거야. 곧 이어 삼촌이 따라왔고 나를 덮치더라고. 그 삼촌이란 사람은 마담 언니의 고향 친구라고 하는데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거무튀튀한 피부에 깡마른 몸은 마치 농부 같았어. 옷을 억지로 벗기고는 저항하는 나를 때리며 강간을 하는데 정말 끔찍했어. 그 때 남자의 성기, 화난 남자의 얼굴을 처음 보고선 질려버렸지. 그 이후로 남자랑 섹스를 할 때면 남자의 성기를 보는 순간 화난 남자의 얼굴이 떠올라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됐어. 그 삼촌이란 작자가 나한테서 앗아간 건 빌어먹을 순결이 아니라 섹스의 쾌감인 거 같아. 정말 나쁜 놈이지 안 그래? 순결을 뺏긴 걸로,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 관계를 못 맺은 걸로 충분히 억울하고 가끔은 우울해지는데 나중에 그가 쾌감까지 뺏어갔다는 걸 알고 나서 그를 정말로 증오하게 됐어.
두 번 정도 사정한 그는 목욕을 하고선 겁에 질려 있는 내게 와서 그러더라. 앞으로 니가 할 일은 이거라고. 티켓을 끊는 날에는 항상 실적을 올려야 한다고. 항상 감시할 테니 도망갈 생각은 안하는 게 좋다고….
당분간 도망치는 것도 포기한 채 그곳에서 일 년 정도 있었어. 같이 간 내 친구는 마담언니가 손을 써서 이미 다른 곳으로 갔고. 친구가 떠나가 버린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난 한없이 쓸쓸해졌어. 생활도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 눈 뜨면 일어나서 화장하고 다방을 청소한 후에 커피나 쌍화차를 따르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짓을 하다보면 마치 내가 자판기가 된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라고. 시골의 배달 루트는 한정되어 있다 보니 맨날 똑같은 남자들한테 배달을 나가고 티켓 끊는 날은 몸을 팔고…. 학교에서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게다가 여긴 과목이라곤 커피뿐이니 더 빨리 지겨워 진거지. 재미도 없고 따분하고 돈은 계속 빵구나고….
그러던 작년 겨울밤이었는데 영업이 끝나고 나서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니깐 함박눈이 쏟아지는 거야. 그쪽에서는 한겨울에도 눈이 그렇게 많이 내리는 경우가 흔치 않거든. 아주 어렸을 적 보았던 그 눈들이 녹아서 물이 되고 다시 대기가 되고 오랜 시간을 순환한 후에 다시 이곳에 온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내 머리위로, 손등 위로 떨어지는 눈들이 아직도 여기서 무얼 기대하냐고 묻는 것 같았어. 눈들이 내 눈물을 스쳐갈 때면 땅에 떨어지지 못하고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볼에 붙은 채 서서히 녹아가기 시작했어. 나도 이 눈처럼 녹아 버리는 건 아닐까. 차라리 이대로 녹아 버리는 게 더 나은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 증발할 방법을 찾게 됐어.
다방 안으로 들어가 삼촌의 넥타이 끈으로 목을 매었지. 때마침 야식으로 라면을 끓여먹으러 온 삼촌이 나를 발견했고, 그 저주받을 인간은 숨이 반쯤 넘어간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살려냈어.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죽음의 방해꾼과도 같았지.
며칠이 지나 회복이 되자마자 나를 서울의 한 단란주점으로 팔아 버렸어. 목숨을 건져준 걸 고맙게 생각하라면서 나를 판돈은 그 대가라고 하더군. 정말 엿 같지? 살려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원하는 대로 죽게도 못한 게 누군데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라고. 그래도 거길 떠나오면서 작은 복수는 하나 해뒀지. 삼촌이 마담언니 몰래 만나던 여자가 2명 더 있었는데 마담언니가 그걸 알아볼 수 있도록 손 좀 쓰고 왔거든. 아마도 지금쯤이면 둘 중 하나는 나처럼 그곳을 떠났을 거야.
아무튼 서울의 생활은 괜찮았어. ‘서울’이라는 말만으로도 촌년은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는 거라구. 내가 팔려간 곳은 북창동에 있던 ‘페이스’란 곳이었는데 사장 얼굴을 본적은 없고 젊은 지배인 한 명하고 마담하고 그 외 몇몇 웨이터 오빠들 그리고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또래 여자들을 만났지.
이 정도는 이곳에서 좀 작은 편이라고 하면서 잘 지내보자는 지배인 말에 왠지 친근감을 느꼈어. 게다가 좀 지내보니깐 같이 일하는 동료 언니들이 감시하는 것도 아니었고 같은 처지이다 보니 막내인 나를 많이 챙겨주더라고. 의외였지. 술집 여자들이 그것도 서울 여자들이 이렇게 친절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거든. 걔 중에는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언니들도 몇몇 있었지만 말이야. 술을 마시는 게 좀 힘들었지만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 덕분에 이곳에서는 오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았어. 돈도 조금 더 만질 수 있었고, 젊은 남자들을 상대할 수 있어서 그나마 나았던 것 같아. 사투리를 섞어 쓰는 촌티가 팍팍 풍기는 나였지만, 어리다는 이유 하나로 단골도 많이 생기고 인기도 괜찮았어. 배우는 것도 많았고 시간이 비는 날이면 잠을 줄이고 관광을 온 외국인들처럼 서울 곳곳을 구경 다니기도 했지. 팔려온 게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니더라구.
어느 날 출근하는데 또래로 보이는 여자애들 몇몇이 교복을 입고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먹는 모습을 봤어. 웃으면서 수다 떠는 모습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들 옆으로 가서 떡볶이를 시켜 먹었지. 정말 부러웠어. 남자친구가 어쩌고 연예인들이 어쩌고 얘기를 하는 걔네들이 한없이 부러워지기 시작한 거야. 일 나가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혼자 떡볶이를 3인분이나 먹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어. 내가 지금 잃어버린 것들은 나중에 다시 경험한다고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 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또 목을 매고 싶어지더라. 그런데 이번엔 끝까지 죽음에 대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어. 목적이 생긴 거지. 다시 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하고 실컷 떡볶이를 먹고 쉴 새 없이 수다를 떨고 영화를 보러 다니는, 그러고 싶은 욕구가 죽음에 대한 유혹보다 강했어.
가끔은 하찮은 것들이 소중해 질 때가 있는 거 같아. 그래서 그 날 밤에 매니저들 눈을 피해서 도망을 쳤지. 겨우 빠져나왔는데 막상 갈 데가 없다는 걸 알았어. 가지고 있는 돈도 얼마 없었고 이미 시골집에서 도망 나온 상태라 돌아갈 수도 없었고…. 그런데 근처에 시립병원이 하나 보이는 거야. 무작정 들어가 입원을 시켜 달라고 했어. 이상한 소리를 막 지껄였고 화를 내기도 했지. 소란을 피우자 경비와 몇몇 사람들이 몰려와서는 나를 잡아둔 후 자기네들끼리 상의를 하더니 의사를 불러 오는 거야. 그 의사는 나를 힐끔 보고는 결국엔 이곳으로 보내더군. 나중에 생각해보니깐 당분간 이곳에 있는 게 술집 매니저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처음엔 좀 적응이 안 됐지만 진아가 오고 찬이가 온 후에는 이곳이 더 좋아지더라구. 휴~ 자, 대강 여기까지야. 어때?”
“자, 우리 모두 이 힘든 여정을 마친 은정이에게 박수를~ 호호.”
“뭐야, 진아 너 정말 끝까지 날 놀리는 거야?”
“아, 아니야. 잘 들었어. 준이는 어때? 은정이 보기보단 꽤 날라리지?”
이런 대화가 가능한 건 또 다른 세상인 이곳에서일 뿐이다. 나는 솔직히 은정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나를 놀리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지, 나와 같은 17살의 여자들은 전부다 모르는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고 몸을 팔고 집을 나가는 게 당연한 건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은정이처럼 그렇게 힘들었다면 아마 난 이 세상에 복수할 대상을 찾아 나섰을 거야.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마가 되든, 불특정 다수를 향해 어떤 테러와도 같은 짓을 하지 않았을까? 아직까지 그러지 않았다는 것에 은정이가 착하다는 생각 밖에는 못하겠어.”
“준이도 참. 그럴 용기는 있는 거야? 무서울 거 같아.” 진아가 말했다.
“나, 지금 복수하고 있는 중이잖아. 나를 알고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라는 곳으로는 절대 가지 않을 거야. 이미 난 그와는 반대의 길에 발을 들여 놓은 거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여자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해 보려고 생각중이야. 우리 같은 학생들이 이 나라에 얼마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더 이상 삶이 진지한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 친구들, 밤 시간을 아껴서 공부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길이라고만 믿고, 우정과 사색 없이 사는 이유 없이 그대로 사는 애들에게서 우리가 기대할 것이 더 무엇이 있겠어? 어른들이 했던 그대로, 오로지 자신의 기대와 욕망에만 사로잡혀 사는 애들이 정말로 우리나라의 미래라고 생각하는 거야?”
은정이의 말대로라면 ‘여자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경험한 듯 했다. 더 남아 있는 것이 있단 말인가. 그들이 이제는 좀 더 나은 삶을, 좀 더 즐기며 살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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