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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대통령이다] #6 “사탄 앞에서 고해하는 심정이 들었다”

이용준
  • 입력 2017.03.13 00:00
  • 수정 2020.07.15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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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가 없는 여자 같다고 해야 하나. 여자 안에서는 모든 죄, 잘못도 무용지물이며 벼룩에 물린 자국일 뿐이다. 하느님께도 무릎 꿇지 않을 여자 같다. 혼란스러웠다.

‘여자가 대통령이다’는 여성을 대표할 수 없는 한 여자의 유령이 한 나라를 집어삼킨 현재, 이 시대를 살아 내는 한 민초 여자와 동갑내기 신부 박용성, 경마 기자 이영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새 연재소설입니다. 작가는 “간통죄가 합헌이어도, 여자는 위헌”이라며, “우리를 대표한다는 대통령에게, 우릴 창조한 신에게만 유죄라고 통보한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습니다. - 편집자 주.

“고해한 지 3주째 됩니다.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되는데 또 사랑을 받고 말았습니다. 받지 말아야 하는데… 그 사람의 사랑이 큽니다. 이제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여자가 강림했다. 말은 되풀이됐고 어투는 여전히 단호했다. 반복되는 고해는 이제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해를 통해 나를 괴롭히려는 이유는 왜일까. 혼인 무효라는 죄의 상태에 있는 여자의 고해를 더는 들어줘서도 안 되는 걸 알고 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자매님, 사랑을 충분히 받으십시오. 사랑은 받아야 하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사랑을 받을 줄 알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서라야 상처가 치유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지옥에 갇힙니다.”

묻지 않았다. 알은체하지 않았다. 여자를 알고 있다는 뉘앙스도 드러내지 않았고 목소리 톤도 변함없었다. 하지만 여자는 나를 꿰뚫고 있었다.

“신부님, 이젠 저를 아시잖아요. 지켜보고 계시잖아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해주실 수 없어요? 받기만 하는 건 죄가 아니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 그런 말은 못해요? 그냥 이해하고 대신 용서를 구해 주시면 안 되나요?”

말문이 막혔다. 수백만 번의 고해를 듣고 수천만 명의 죄인들을 위해 용서를 구했지만, 이렇게 당돌한 죄인은 처음이다. 원죄가 없는 여자 같다고 해야 하나. 여자 안에서는 모든 죄, 잘못도 무용지물이며 벼룩에 물린 자국일 뿐이다. 하느님께도 무릎 꿇지 않을 여자 같다.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울 때는 솔직해야 한다. 듣는 사람은 물론 없지만, 목소리를 극히 낮춰 속삭이듯 얘기했다.

“클라라 자매, 맞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아는 척하는 거예요?”
힐난하는 소리가 밖으로 퍼질까 두려웠다. 밖에서는 마치 고해 도중 싸우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알다시피 고해는 비밀로 지켜야 하기에….”
“그런다고 하늘이 가려지나요? 목소리만 들어도 누가 누군지 신부님은 다 알잖아요.”
“여기서 긴 얘기 하는 건 힘들어요. 오늘 생일이죠? 미사 후에 따로 봅시다.”
“알았어요.”
“세상 죄를 없애시는 주님께서 자매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있다가 연락 주세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였지만, 여자는 ‘아멘’도 하지 않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생일 축하를 받는 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속죄니 대속이니 하는 것은 아테네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용건은 끝났으니 나가라는 꼴이다. 뻔뻔하고 자신만만하다.

청년미사를 집전하며 하늘이 아니라 여자에게 온통 마음이 쏠렸다. 오늘은 혼자였다. 남자는 없었다. 고해성사를 했음에도 여자는 영성체를 모시지 않았다. 그저 대화할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일까. 고해는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서 듣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나.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여자는 미사 내내 그리스도상만 주시하고 있었다. 언뜻 우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아인데요, 데이파크 아시죠? 다락이라는 호프집에 먼저 가 있을게요.’

교우들과 인사를 하는 잠시도 기다리지 못한 여자는 문자를 남기고 사라졌다. 사전에 약속된 일이기는 했지만 통보였다. 게다가 성일 저녁에 술이라니. 시몬이 받았을 느낌이 상기됐지만, 그처럼 나 역시 거부할 수 없었다. 여자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치명적 마력이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뒤 그 맛을 호기롭게 전하는 하와 같았다. 뱀에게 꼬드김을 당한 여자가 먼저 먹고 눈이 밝아졌다. 그다음이 남자다. 선악과를 먹은 후부터 동물들의 애정 행각, 책임 전가, 밀당의 역사가 전개되지 않았는가.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잘 신지도 않는 운동화를 꺼내고 야구 모자를 눌러썼다. 누가 봐도 사제라기는커녕 동네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노총각 행색이다. 주임신부님과 전교수녀님께는 군대 동기가 찾아와 급히 저녁 약속이 생겼노라고 양해를 구했다. 처음 하는 거짓말이다.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다그치고 싶다. 기도로 여자의 고집을 꺾고 싶다. 사랑은 그냥 받는 것임을 일깨워주고 싶다. 남들은 맨스플레인이라고 치부하겠지만, 그 일이 내 소임이자 주어진 소명 아니던가.

여자가 일러준 호프집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맨 안쪽 구석진 자리에 혼자 있는 여자는 이미 맥주를 반 이상 비운 상태다. 안주로 시킨 치킨도 벌써 반은 먹어 치웠다. 입가에는 튀김 조각이 두어 개 묻어 있었다.

“오래 기다렸죠? 미안합니다.”
자리에 앉으며 여자에게 냅킨을 내밀었다.

“오셨어요? 어머, 신부님 열라 젠틀하시네요. 난 매너 있는 남자가 좋던데.”
냅킨을 받아든 여자는 입가를 쓰윽 닦았다. 튀김 조각은 사라졌지만, 삐뚜름한 비웃음이 다시 스며들었다. 순간 묘하게도 기분이 나빠졌다.

“맥주 하시죠? 저 먼저 마시고 있었어요. 괜찮죠?”
“그, 그럼요. 조금만 마시겠습니다.”
여자는 벨을 눌러 500cc 생크림 맥주 두 잔을 주문했다. 벨을 누르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시꺼먼 색이 온통 손톱을 잠식했다. 마치 가뭇한 피에 손을 담았다 뺀 것 같았다.

고해실에서와 달리 가까이서 단둘이 마주 보고 있으니 신기하게도 여자의 생각이 보였다. 내게 대단한 예언자적 통찰이나 예지, 독심술이 있는 건 아니다. 입에서 내뿜는 말이 아니라 여자 스스로 눈빛과 행동, 전 존재로 생각을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오묘한 느낌이 몸을 휘감았다.

마치 나는 이런 사람이니 네 마음껏 할 수 있는 영광을 주겠노라고 유혹하는 것 같다. 언제든 맞이하겠다고, 넓은 품으로 안아주겠다고 말한다. 오랜 독신 생활에 지쳐 있는 것, 잘 알고 있다고 위로한다. 쉬운 여자이지만, 만나는 동안은 내게만 충실할 수 있다고 다짐한다. 지금껏 만났던 남자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회고한다. 인생은 순간이기에 즐길 필요도 있다고 충고한다. 괜찮은 남자라면, 쓸모가 있다면, 아이도 낳아 줄 용의가 있다고 허락한다. 단,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구속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질겁한다. 다그치거나 가르치려들면 바로 도망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말씀이 없으시네요. 무슨 생각 하세요?”
“아, 별거 아닙니다.”
“내 글, 사진 전부 봤죠?”
“그게… 그게… 네.”
여자 앞에서는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사탄 앞에서 고해하는 심정이 들었다.

“어땠어요? 나 글 좀 써요? 사진은?”
“뭐랄까, 사진 자체가 말하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역시 신부님이셔. 센스 있네요. 사실 나는 바람을 찍는 여자거든요. 자, 우리 건배하죠.”
활짝 웃으니 눈 전체가 반달 형태로 변했다. 보조개도 들어갔다. 아름다웠다. 비웃음이 아니라 만개한, 만족스러운 웃음이다. 사거나 팔 수 있는 웃음은 아니지만, 그다지 비싼 것 같지도 않다.

“남자 분은 왜 안 왔죠? 더군다나 오늘 생일이지 않습니까.”
질투가 나서, 질투를 불러일으키려고 물은 질문은 아니다. 여자 앞에서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 질문이 겨우 이거였다. 여자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대답했다.

“어떻게 생일까지 아셨어요? 나한테 관심 있어요? 감동인데요? 흐흐.” 여자는 입가로 스며든 웃음을 소리로 표현했다. “걔 회식이래요. 차 보셨죠? 경마 기자예요. 신부님도 경마는 아시죠? 말에 돈 걸고 도박하는 거요. 게네들은 만날 술, 여자, 경마에 빠져 살거든요. 회식 끝나고 온다는데 이미 마음이 떠나지 않고서야 이러겠어요.”
“어떻게 만났죠? 혹… 고해성사 때 하는 말이 남자 분과 관련 있나요?”

그제야 나도 여자가 듣고 싶은 말, 여자가 하고 싶은 말을 말하고 묻는다는 걸 알았다. 벌써 여자에게 물들어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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