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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대통령이다] #5 “사랑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부분”

이용준
  • 입력 2017.03.06 00:00
  • 수정 2020.07.15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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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가, 죄인, 천국, 그분이라는 단어와 밑바닥, 술, 계집질, 도박이라는 단어는 극단적이다. 양립할 수 없다. 영원한 삶을 알면서도 스스로 포기하고 사는 것 같았다.

‘여자가 대통령이다’는 여성을 대표할 수 없는 한 여자의 유령이 한 나라를 집어삼킨 현재, 이 시대를 살아 내는 한 민초 여자와 동갑내기 신부 박용성, 경마 기자 이영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새 연재소설입니다. 작가는 “간통죄가 합헌이어도, 여자는 위헌”이라며, “우리를 대표한다는 대통령에게, 우릴 창조한 신에게만 유죄라고 통보한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습니다. - 편집자 주.

계절이 바뀌었다. 사제관에서 본당까지는 걸어서 1분 거리지만, 새벽미사에 가려면 이제는 사제복 위에 카디건이라도 한 겹 더 껴입어야 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2주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소식이 궁금해 새벽미사가 끝난 뒤면 여자의 메신저와 SNS를 죄다 뒤졌다. 교인 명부에 적힌 연락처를 스마트폰에 저장하고 메일 주소도 검색했다.

트위터 계정은 없었다. 페이스북은 4년 전 남긴 글이 마지막이었다. 혼자 일상을 이야기하는 수준이었는데 머리에 비둘기 똥을 맞아 재수가 없다느니, 길고양이 입양을 한다느니 하는 자잘한 내용이다. 댓글도 거의 없었다. 네이트온을 통해 사람찾기도 해봤지만, 미니홈피 역시 찾을 수 없었다.

평소 교우들과 연락하고자 설치해 둔 스마트폰 메신저 앱에는 각양각생의 여자가 있었다. 카카오톡은 물론 라인, 텔레그램, 인스타그램, 바이버, 위챗, 스카이프 등 거의 모든 메신저에 있었다. 특이한 건 메신저마다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씩 샅샅이 훔쳐봤다. 카카오톡은 석양을 배경으로 차 안에서 찍힌 사진과 ‘나의 이름으로 세상을 즐기다’라는 대화명이 적혀 있다. 라인에는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담겼다. 누군가 멀리서 찍은 장면이다. 텔레그램에는 우쿨렐레 사진, 바이버와 위챗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 얼굴이 있었다. 스카이프에는 말보로 담배를 들고 있는 왼손이 있었다. 인스타그램에는 200주 전, 그러니까 4년 전 성당을 다닐 당시 모습인데 화장을 진하게 한 프로필 사진, 그리고 등록한 것이라고는 눈썰매장과 케이크 사진 단 두 장뿐이었다.

시몬의 말대로 카카오스토리에는 최근 일상이 담겨 있었다. 2012년, 그러니까 여자가 결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해부터 글이 올라왔다. 어머니와 친구들 심지어 애완견 사진은 있었지만, 남편이라는 사람도 없고 결혼사진도 없다. 함께 왔던 남자 역시 그 어디에도 없다. 시몬이 증언한 것처럼 2013년에는 글이 없었고, 올해 1월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이혼을 암시하는 글이었다.

‘2년 동안 힘들었다. 새해를 맞아 새롭게 시작하자.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되는데 또 사랑을 받았다…. 사람을 사람으로 잊는 건 죄악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강을 건넜다. 마지막까지 잡아줄 거라 기대했지만 단호했다. 후회하지 않는 성격인 거 알지만… 이성적인 사람은 무섭다. 차가운 사람은 싫다. 모두가 떠나도 난 괜찮아질 것이다. 마침표를 찍자.’

글이 다시 올라온 건 6월, 남자를 만난 시점이다. 병원에서 링거를 맞는 팔을 찍고는 ‘결국엔 탈이 나는군. 좀 더 버텨!’라고 짧게 쓰여 있을 뿐이다. 이혼의 연장선에서 아픔을 이제야 느끼는 표현처럼 보였다. 7월과 8월에는 제주도에서 지내며 쓴 글과 사진으로 도배됐다. 조가비박물관, 해바라기 공원, 고스트하우스, 이런저런 맛집들, 가파도 바다, 보랏빛 노을, 말을 탄 모습, 사라봉 정상에서 찍은 사진과 감상들이 있었다.

인상적인 건 8월 1일에 파스칼의 『팡세』 일부를 옮긴 글이다. 사진은 없었다.

‘우리들은 진리를 원한다. 그런데 우리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불확실뿐이다. 우리들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데 발견하는 것은 비참과 죽음뿐이다. 우리들은 진리와 행복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확신도 행복도 소유할 수 없다. 이러한 욕구가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들이 어디로부터 떨어져 나왔는지를 느끼도록 만들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들을 벌하기 위해서이다. - 파스칼, 팡세20.’

8월 15일에는 ‘제주에 온 징크스. 어떤 일이 끝이 났을 때 무언가 다 쏟아 버리고 만다. 이제 또 새로운 것이 시작될 것이다. the end…’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튿날에는 비양도 정상에서 바다를 찍은 12초 분량의 영상과 글이 있었다. 마지막 글이었다.

‘사랑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부분. 너와 내가 한 곳을 바라봤을 때, 우린 분명 서로 다른 존재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두 존재는 경계 없이 어우러짐이다. 그걸 확인코자 끝까지 악을 쓰고 가본다면 그 어우러짐은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할 것이다. 비양봉에서….’

찾았다. 남자가 쓴 글을 발견했다. 남자는 여자가 쓴 글을 재구성해서 댓글을 달았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 사랑 있었네. 서로 다른 우리가 그곳을 바라봤을 때 경계는 사라지고 어우러지네. 하늘의 끝, 바다의 끝을 찾아가도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네. 나는 너를 찾아도 너는 이미 그곳에 없다네.’

남자의 카카오스토리에는 500여 개에 이르는 글들이 있었다. 메인 프로필에는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커다란 하트 조형물 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찍은 사진이다. 평범하고 행복해 보였다. 남자 역시 2012년부터 글을 올렸다. 여자와는 달리 대부분 공개였다. 2012년 여름, 제주도를 일주하며 쓴 글이 상당수였다.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순례한 사진, 제주도 출장을 가서 찍은 사진과 글이 있었지만 2013년에는 여자처럼 사진도 글도 없었다. 올해 4월 22일에는 만개한 벚꽃 사진과 함께 글을 남겼다.

‘밑바닥 삶에 기투한지 삼 년째. 이젠 이 삶이 내 진짜 삶이 됐다. 자처한 일이기에 후회는 없다. 단지 다분히 고의적인 내 작가적 기질과 삶의 방향 때문에 현재의 주변인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속에서는 불이 나고 얼마든 비웃어주고 싶지만, 결국 죄인은 나이기에 속죄할 뿐이다. 글 같지도 않은 걸 기사라고 갈기면서도 거짓만은 보태지 않는 걸 위안하고 있다. 또, 이 바닥에서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어쭙잖고 어설픈 개혁가가 아니라 내 직관과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내 인내가 밑바닥을 견딜 만큼 깊다는 것을. 그분의 연락을 받고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고, 천국을 향한 부름에도 이제는 무덤덤하다. 난 원래가 이렇게 글러 먹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매일 술에 젖어 비겁하게 살며 계집질에 도박을 일삼아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 그래도 사람이 산다는 걸, 이렇게 나만의 보통 방식으로 살아 내고 있다. 단지 그분과 내 밑바닥 기투의 동기가 된 그이가 생각날 때면 흔들리고 가슴이 쓰리고 눈물이 흐르지만, 이제는 괜찮다. 다 그런 거지. 그런 게야.’

개혁가, 죄인, 천국, 그분이라는 단어와 밑바닥, 술, 계집질, 도박이라는 단어는 극단적이다. 양립할 수 없다. 영원한 삶을 알면서도 스스로 포기하고 사는 것 같았다. 남자가 체념하게 된 현실은 교만한 인간의 말로다. 괜찮을 수가 없다.

밑바닥에 기투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음부강하(descendit ad infernal)를 상기시켰다. 그 영적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인간도 신적인 삶을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실제 교만해 본 적이 없어서 교만한 인간이 어떻게 겸손해지는지를 모른다. 겸손하게 사는 법만 알 뿐인, 완전무흠한 존재여야지 밑바닥에 기투한다는 어리석고 교만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6월 10일부터는 여자와의 만남을 암시하는 글이 있었다. ‘삶으로 침투한 인연’이라는 제목도 붙였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될 거라 강하게 예감했던 인연이 현실화됐다. 아마도 나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온전한 남녀의 사랑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남은 건 겨우 4년이라는, 이 생애서 내 삶의 유효기간을 알기에 너를 슬프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작하지 않으려고 피하고 피하면서 인연의 시작을 늦췄다. 하지만, 그댄 먼저 나를 찾아왔다. 나를 마지막으로 지켜볼 사람, 내 죽음을 슬퍼할 유일한 사람…. 목소리 한 번 듣는 순간 그 이후를 믿게 됐다. 수많은 공통점, 같은 생각, 예지, 마음과 글로의 소통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결혼하면 이혼할 것이라는 내 치기 어린 생각은 역시 틀렸다. 이혼 아닌 사별로 그리고 내 아이의 엄마로 그댄 남게 될 것을. 오늘 새벽처럼 슬퍼하지 않기를…. 남은 4년 동안 모든 행복, 사랑, 열정 다 쏟고 가련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도 널 그리고, 만난다.’

하지만 남자는 한 달도 채 안 돼 이별을 암시하는 글을 남겼다.

‘함께 제주에 간 것도, 함께 며칠을 지낸 것도, 함께 사진 찍고 함께 일상을 나눈 것 모두 처음이었다. 사랑을 할 줄 몰라 신의 사랑조차 거부한 내게 운명처럼 다가온 그대 존재가 버거워 그토록 못되게 굴었다. 말도 안 되는 과거와 아픔, 상처를 그대 앞에 꺼내 놓은 건 빨리 아물라고, 그대 상처 아물라고 한 일인데 내가 준 상처는 더 깊었다. 뮤즈가 아니라 소울메이트였고, 스쳐 지나갈 인연이 아니라 영원을 함께할 사람이라 믿었지만… 100일이 채 안 된다. 행복했다. 서른셋 이후 덤으로 공생애를 사는 내게 과분한 행복이었다. 믿기지 않아 실감할 수 없어 그대에게 투정하고 전 존재로 거부했으면서도 아직도 놓을 수 없는 건… 그대뿐이니까. 남은 4년을 그대에게 기투하라는 숙명을 이제 정말 받아들였으니까….’

‘기투’라는 하이데거의 용어를 연인에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별을 쓴 글이지만, 남자는 끝이 아님을 직감한 것 같았다. 남자의 예지대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9월 초부터 글과 사진을 잔뜩 올렸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사진에서 여자는 커다란 천사의 날개가 그려진 벽 앞에서 두 손을 펼치고 미소 짓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다시 원망하는 듯했다.

‘우리 이야기에는 너만 남았다. 너의 이야기에 나는 없었다. 내 이야기에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그래서 잔인했다. 끝내지 않은 이야기에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사랑 위에 쓴 편지는 차라리 허구와 거짓, 위선과 욕심으로 채우는 게 이야기의 본질에 가까운 것….’

사흘 뒤의 글에서는 다시 운명이라고 했다. 염전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소금을 보고 있는 여자를 뒤에서 찍은 사진이 배경이다.

‘모든 일이 꿈만 같다. 그래서 운명이 맞다. 참 많이 속상하고 힘들었지만, 오늘, 영혼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아픈 과거를 잊기로 했다. 참사랑을 배운 건 바로 나였다. 그래서 운명이 맞다. 굽어살피소서….’

천국과 지옥을 수십 번 왕래하는 수준이었다. 여자는 무엇 때문에 남자를 이리도 헛갈리게 했을까. 보통 사람 같으면 견디기 힘들어 진즉 포기했을 것이다.

2주 전, 성당에서 두 사람을 만났던 9월 28일에는 여자 말대로 카지노를 갔던 것 같다. 남자는 빈자의 삶을 추구한다는 것처럼, 섭리로 가득한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고백했다. 이 글이 마지막이었다.

‘고급진 곳, 고급진 것 그 모두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나이까. 보기 좋음, 안락함, 외부 시선 들 그리고 텅 빈 내면, 의미 없는 삶, 남아도는 시간 들이 나를 만들지 않도록 하소서. 헛된 고급들이 물밀 듯 찾아오더라도 섬김과 나눔으로 가난한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소서. 서로를 이해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동반자와 자족할 수 있는 마음,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축복 그리고 당신의 은혜와 섭리를 누릴 수 있다면 이생에서의 내 삶은 충분하나이다. 아시지요?’

여자의 생일이 내일, 연중 제28주일이다. 아마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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