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여자가 대통령이다] #3 “병든 사람, 외로운 사람에게 늘 마음이 끌리지 않았는가.”

이용준
  • 입력 2017.02.19 00:00
  • 수정 2020.07.15 16:5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몬이 가고 난 뒤 왜 여자가 궁금한 건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병든 사람, 외로운 사람에게 늘 마음이 끌리지 않았는가. 목소리를 들으며 여자를 지켜보는 것보다 개입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여자가 대통령이다’는 여성을 대표할 수 없는 한 여자의 유령이 한 나라를 집어삼킨 현재, 이 시대를 살아 내는 한 민초 여자와 동갑내기 신부 박용성, 경마 기자 이영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새 연재소설입니다. 작가는 “간통죄가 합헌이어도, 여자는 위헌”이라며, “우리를 대표한다는 대통령에게, 우릴 창조한 신에게만 유죄라고 통보한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습니다. - 편집자 주.

“제가 임신시켜서 미아 누나가 성당을 떠났고 저는 철면피처럼 여기 남아 신앙을 지킨다는 소문이 퍼진 것, 잘 알고 있어요. 소문대로라면 저도 성당을 떠났어야죠.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님을 증거하고 싶어서 남은 것뿐입니다.

아시다시피, 4년 전 누나는 혼자 성당에 왔었어요. 왠지 외로워 보였고 낯도 심하게 가렸는데 모두가 환대하니 금세 적응하더라고요. 같이 볼링도 하고 노래방도 가고 밥도 먹으면서 친해졌죠. 성가대를 꼭 하고 싶다고 해서 세례 교육을 신청한 뒤 함께 성가대도 했어요.

노래도 잘 부르고 술도 잘 마시고 동생들은 또 얼마나 잘 챙기던지, 사진작가라고 해서 동기 결혼식 사진도 무료로 찍어주기도 했고요. 알면 알수록 남자다운 면이 있었는데 성격도 화끈하고 리더십이 있더라고요. 형제들과 유독 잘 어울렸고, 서너 명 정도는 세상 말로 누나한테 미쳤죠. 자매들과는 거리를 두는 모습이 조금 의아했지만….

누나를 알게 된 지 두 달쯤 지난 주말 아침이었어요. 같이 산책이라도 하지 않겠느냐고 문자가 왔어요. 저도 호감이 있었고 딱히 할 일이 없어서 흔쾌히 응했죠. 성당 앞에서 만나 도마치고개를 걸었어요. 산책길이 험하진 않았지만, 힘들었는지 먼저 누나가 손을 잡더라고요. 내내 손을 잡고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서 ‘야! 이 쌍년아! 이미아!’라고 외치는, 격앙된 남자 목소리가 들렸어요. 오르막길 위에서 누나 또래쯤 되는 덩치 큰 남자가 누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어요.

누나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의연하게 내 손을 잡더니 돌아가자는 거예요. 쫓아온 남자는 우리 손을 갈라놓더니 쌍욕을 퍼붓고 누나 뺨을 몇 차례 때렸어요. 아무 저항 없이 맞기만 했고, 저도 말리다가 몇 대 맞았고…. 인적이 드문 길이라 사람들도 거의 없었어요.

남자는 ‘다시 내 눈에 띄면 그땐 정말 죽을 줄 알아!’하고는 가버렸어요. 저도 누나도 지칠 대로 지쳐서 한참을 땅바닥에 앉아 있었죠. 입가가 터져서 피가 나는데도 닦지도 않기에 손수건을 내밀었더니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그때 누나는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는데… 비웃음, 소리도 없는 자조적인 비웃음을 내보였어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전 남자친구래요. 헤어진 거라면 남자가 저럴 필요는 없을 텐데 왜 그런 건지 그때는 이해가 안 갔어요. 누나는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해서 처음으로 낮술이라는 걸 마셨죠. 안주로 시킨 곱창도 거의 안 먹고 소주만 들이부었죠.

땅거미가 서서히 지자 누나는 그만 가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식당에서 나오는데 미안하다더니 갑자기 안아달라고 했어요. 불쌍한 마음도 들고 위로가 필요해 보였어요. 안아줬더니 기다렸다는 듯 사귀자고 하더라고요. 대답을 못 하고 망설이니까 바로 인상을 찡그리며 화가 난 표정을 짓더라고요. 거절하지도 않았는데 거절당한 것처럼 말이죠.

그러더니 자기 몸에 관심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아니라고 했지만 누나가 그렇게 묻자 들지도 않던 생각이 막 떠올랐어요. 그때 마치 내 마음을 안다는 듯 그 비웃음을 또 비치더라고요. 술을 마셨으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갑자기 불쾌해졌어요. 나쁜 감정이 스며드는 이유, 제대로 설명할 수 없잖아요. 그래도 내색할 수는 없었죠.

누나가 다시 먼저 손을 잡고는 근처 모텔로 갔어요. 그날 이후로 저녁 늦은 시간이면 술 한잔 하자고 연락이 왔고…. 거의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모텔에 갔어요. 같이 있었어도 외박은 절대로 안 하더라고요. 엄마가 걱정한다며 새벽 2시든 3시든 늦게라도 들어갔어요. 그래도 효녀라는 생각에 마음에 들었고, 어찌 됐든 관계를 가졌으니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죠.

급속도로 가까워질 무렵 하루는 엄마와 병원에 갔다고 연락이 왔어요. 짜증을 내면서 말하기를 구내식당에서 밥 먹는 문제로 엄마와 싸웠다고 하더라고요. 사람도 많고 자리도 더럽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데 엄마가 묻지도 않고 이미 주문을 했다는 거예요. 밥도 안 먹고 엄마를 버리고 나왔다고,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전화하는 거라고, 빨리 위로해 달라고 하는데 무얼 원하는지, 누구 편을 들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일이 한창 바쁜 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게 결국은 저를 골려 먹는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죠. 엄마한테까지 막무가내로 행동했던 건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

미안한 마음에 그날 저녁에 만나 어머니를 뵙고 싶다고, 우리 관계를 진지하게 발전시키고 싶다고 말했죠. 누나는 지금 당장 대답해야 하는 문제냐고 되묻더니 얼마 생각하지도 않고는 우리 관계는 소중하지만, 엄마랑 만나는 건 절대로 안된다고 딱 잡아뗐어요.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누나도 엄마가 싫다면서 하루빨리 독립하고 싶다는 변명만 늘어놓더니 술에 취해 버리고 말았고요.

그때 알았어야 했어요. 누나에게 남자들은 그냥 스쳐가는 존재, 단둘만 있을 때 필요한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걸.”

시몬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카니발을 몰고 다녔는데 틈만 나면 회사로 찾아와 정비 좀 해달라고 했던 일도 기억나네요. 정비하면서 이것저것 설명해 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 없더라고요. 자기도 기계를 만지는 사람이라 기계가 좋다면서 말이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야기, 미래를 꿈꾸는 것보다 현재 눈앞에 닥친 일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더 큰 것 같았어요. 그래야 자신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으니까요. 아, 또 기억나는 건 사진작가라 남자 불알에 관심이 많다고, 세계 최초로 불알 사진전을 열고 싶다며 제 몸을 찍기도 했죠. 사진작가와 남자 불알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온몸은 상처투성이였어요. 곳곳에 딱지가 있었고 멍든 자욱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어요. 일부러 몸을 긁거나 상처를 낸 뒤 아문 딱지를 떼는 일이 즐겁다며 반복했어요. 심지어 제 몸에 딱지가 생기면 아물기도 전에 뜯어 버리곤 했고요. 피를 내고 다시 아물게 하고 떼어내는 일을 반복하며 재미진다는 표현을 썼는데 그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죠.

털을 뽑는 일도 좋아했어요. 털이 나서는 안 되는 곳에 종종 삐죽 나온 것들이 있잖아요. 점 같은 곳에도 털이 나고요. 잘 빠지지 않으면 이로 물어 뽑아낼 정도로 집착했어요. 또 이상했던 건…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섹스를 할 때였어요. 항상 제가 먼저 콘돔을 꼈지만, 섹스하고 나서도 잘 씻지도 않았고요. 오럴섹스에 그렇게 집착했고… 관계한 지 10초 정도면 바로 사정했어요.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이 말이죠. 사정할 때면 늘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흩트린 채 웅얼거리며 흐느끼는데 그 소리가 아직도 생생해요. 암고양이가 우는 소리 같았어요.

언제나 저는 차선이었어요. 매일 술 마시고 진상 부리고, 선물은 선물대로 요구하면서도 자기 돈은 절대 쓰는 법 없었고요. 엄마와의 만남을 거절한 뒤 얼마 안 가서는 섹스도 하지 말자더니 연락도 점점 뜸해졌죠.

산책 도중 만났던 그 남자가 생각났죠. 이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아닌지 자연스레 의심이 들 정도였어요. 하루는 술을 마시다가 누나에게 물었어요. 그날 그 남자가 우리 앞에 나타난 것, 우연이 아닌 것 같다고… 나를 이용하려고 불러낸 것 아니냐고. 누나는 대답하지 않고 술만 들이켰고, 취하자 예의 또 그 비웃는 표정을 보이더라고요.

그렇게 반년 더 만나다보니 결국 제가 먼저 지치게 되더라고요. 힘들다고만 했는데 바로 헤어지자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 말을 했어요. 사랑받아서는 안 되는데 사랑을 받은 죄가 크다고. 그 이후로 갑자기 연락도 두절되고 그 주부터 성당도 안 나왔습니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우연히 봤어요. 함께 자주 가던 커피숍에서 다른 남자와 이야기하는 모습을요. 행복해하는 것 같았고 누가 봐도 연인인 것 같았죠. 남자는 대머리에 뚱뚱했는데 사람이 참 순해 보였어요. 모른 척했죠. 산책하다 만난 그 남자처럼 되기 싫었어요. 그땐 남자 편력이 강한 외로운 여자구나 하고 넘길 정도로 이미 지쳤던 상태였거든요.

2년 후엔가 누나와 친했던 혜진 누님께 전해 들었는데 결혼한다고 하더라고요. 이메일로 청첩장이 왔다며 제게도 전해줬는데 사진을 보니 그 대머리 남자였습니다. 남자 이름은 김경용이었던 걸로 기억나고요. 6살인가 연상이라고 했어요. 결혼식장에는 찾아가지 않았지만, 이제야 사랑을 받아들이고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구나 생각하고 행복을 빌었습니다. 누구도 채울 수 없는 마음을 채워 준 그 남자가 대단해 보였죠.

또 기억나는 건 늘 겁이 많다고 강조했고, 무섭게 대하지 말라는 영문 모를 말을 자주 했다는 거예요. 누나는 외로운 사람 같아요. 천성적으로 말이죠. 아 참, 그런 말도 한 적 있어요. 오빠가 태어났어야 하는데 유산이 돼서 자기가 태어났다고.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해서 한동안 친할머니와 고모들 손에서 자랐는데 학대와 차별이 심했다고요. 친할머니와 고모들을 지들이라고 표현한 거 보면 아직도 그 원한이 큰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사랑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어찌 됐든 누나와의 일들, 이제는 기억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여자는 처음이었고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도 않습니다. 만날 당시에도, 생각하는 지금도 제가 완전히 소모된 기분이 들어요. 신부님 질문에 답이 됐는지 모르겠네요.”

시몬은 마치 어제 일을 회고하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용기 내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다시 성당에 나타났을 땐 사실 좀 놀랐어요. 제 오랜 누명도 벗겨낸 것 같아 안도도 했지만.”
“클라라 자매님은 다시 성당에 나타났고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되는데 사랑을 받은 죄를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오늘 교중미사 때는 어떤 남자와 같이 왔고….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않은 건지.”
“그 남자, 대머리였나요?”
“아니, 오히려 머리숱은 많았고 클라라 자매님과는 또래인 것 같았습니다.”
“얼마 전 이혼한 것 같기도 해요. 결국엔 극복 못 하고 반복된 거죠.”
“그렇군요. 고해성사 때 이혼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고해를 들어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가끔 누나 카카오스토리를 엿보거든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2년 전에 결혼하고 글을 종종 올리더니 언제부턴가 뜸해지더라고요. 올해 초에는 다 끝났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글이 있었어요. 6월에는 제주도에 내려가서 살고 있다는 글도 봤고요.”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군요.”
“아마도 그럴 거예요. 제가 아는 누나는 새로운 무언가에 쉽게 빠지고 쉽게 싫증 내고 떠나버리고 또 새로운 걸 찾아내고야 마는 성격이니까요.”
“중요한 점을 알았습니다.”

시몬이 가고 난 뒤 왜 여자가 궁금한 건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병든 사람, 외로운 사람에게 늘 마음이 끌리지 않았는가. 목소리를 들으며 여자를 지켜보는 것보다 개입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리고 개신교인이라고 밝힌 그 남자의 정체도 궁금해졌다.

by 이준 -Copyrights ⓒ말산업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