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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낵 시 한 편! 유홍준 시인의 '상가에 모인 구두들'

이운주 전문 기자
  • 입력 2021.08.2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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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라딘
출처: 알라딘

지루한 집콕, 가볍게 스낵 시 한 편 어떠세요?

  몇 차례 비가 지나가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여름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이른 가을을 맞이하는 듯 부쩍 여름밤 꼬박 덮던 이불이 얇게 느껴지고, 훅훅 찌던 열기도 선선해졌다. 계절과 이별하는 우리들의 발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다가오는 천고마비의 계절, 그 대답을 유홍준 시인의 시에서 찾아보자.

 

저녁 상가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망자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상가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은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북천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유홍준, <상가에 모인 구두들> 전문

 

 누구나 집 신발장에 엉킨 신발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식당, 정리되지 않은 구두와 운동화들. 문득 이 시를 읽으면서 얼마 전 방문했던 장례식장에 놓인 몇 켤레 안 되는 정장 구두를 떠올렸다.

  시인은 구두를 곧 조문객들로 대유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걸을 때마다 딱딱거리는 소리가 나는 구두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낼 것이다. 하지만 이 구두가 있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적인 공간인 장례식장이다. 요즘은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경조사에도 쉽게 사람이 모일 수 없는 시국이라, 장례식장에서 통곡하며 우는 사람이 많이 줄어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죽음이라는 사건이 주는 감정의 동요도 낡는 것일까. 모든 육신이 소멸된 고인 앞에서 조문객들은 죽은 돼지의 살점을 뜯어먹고, 산 사람을 위해 돈을 건네고, 뒤로 몸을 숨겨 문상금이 얼마인지 확인한다. 후반부에서 재미있게 그려낸 행들은 일종의 도박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해서 공간감에 대비가 느껴지기도 했다.

  감염병 시국이라 생사의 경계에 선 사람하는 사람의 임종을 많은 이가 지켜볼 수도 없고, 장례식장에서 끌어안고 통곡하며 추모할 수도 없는 요즘이라 이 시 속에 등장하는 왁자지껄한, 구두가 옹기종기 모여 소리를 내는 이러한 이미지가 오히려 그립게 느껴지기도 했다. 시의 해석이 독자에게 다양하게 와닿을 수 있는 이유는 구두가 주는 익숙한 이미지와 어렵지 않는 대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듯 선명하게 제시한 이미지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구두를 신는 현대들은은 서로를 짓밟아서 살아남는 경쟁 속에 살지만 죽음 앞에선 그 어떤 경쟁 없이 누군가를 조문하기 위해 장례식장을 찾지 않나. 시인이 그려놓은 이러한 해학적인 이미지 역시 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닮았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언제쯤 상가에 구두들이 가득 모이게 될까. 사람 냄새 그득한 공간들을 그리워하며 오늘의 스낵 시 추천을 마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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