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㳄南川停(소정방)定方發自萊州 소정방은 황해를 건너왔나? 국사편찬위원회는 차라리 삼국사기를 위서(僞書 거짓말)라고 해라?(1) 백제, 고구려와 나당연합군(신라 당나라 연합군) 전투는 한반도에서 있었나? 중국 대륙에서 있었나? (3)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1.04.2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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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을 따라보자.

〔7년(660)〕 여름 5월 26일에 왕이 유신(庾信)·진주(眞珠)·천존(天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京]을 출발하였다.

夏五月二十六日, 王與庾信·眞珠·天存等, 領兵出京.

〔7년(660)〕 6월 18일에 〔왕이〕 남천정(南川停)에 이르렀다. 소정방(蘇定方)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들이 꼬리를 물고 1,000리를 이어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六月十八日, 㳄南川停. 定方發自萊州, 舳艫千里, 隨流東下.

 

1) 말도 안 되는 해석이지만 국사편찬위원회의 주장대로라면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5월 26일 서울 경주를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에 머물렀다.

한반도 기준으로 하면 지금의 경주에서 전투 한 번 없이 백제의 영토 가까이에 있는 남천정까지 23일만에 도착한 것이다.

남천정이 전라도 어느 지역이라고 가정하자.

이는 뒤 이은 삼국사기 기사에서 소정방이 태종무열왕에게 백제의 남쪽에서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당시 전라도 지역은 백제의 영토라고 본다.(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았다)

전투 한 번 없이 신라군이 전라도에 왔다?

거의 가능성 없지만 남천정이 지금의 전라남도 광주시 인근이라 가정하자.

과거에는 나주까지 영산강을 통하여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경주에서 광주까지 직선거리는 228키로미터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으니 50% 더 늘어난다고 하면 342키로미터이다.

5월26일부터 6월18일까지 23일간 하루에 15키로미터 걸으면 충분하다.

23일에 15키로미터를 곱하면 345키로미터이다.

하루에 15키로미터씩 이동했다니 전쟁치러 갔나? 소풍 갔나?

백제가 아무리 방비가 허술해도 그렇지 신라군이 23일 동안 행군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을까?

즉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 남쪽에서 만나기로 했으면  신라가 남쪽에 백제가 북쪽에 있었다는 말이며, 이는 우리가 배운 한반도 신라, 백제의 위치와 전혀 맞지 않는다!

 

2) 당나라는 육해군 합쳐 13만명의 병력이 이동했다.

당나라와 백제가 국경이 맞닿아 있어 수시로 전쟁을 하지 않았으면 당나라에 무슨 위험이 있었나?

육로로는 수천키로미터를 13만명의 군대가 지금의 당시 당나라 수도 지금의 차이나 서안에서 한반도 부여까지 무슨 이유로 오나?

육로로 올려면 매번 당나라와 전쟁하는 고구려 영토를 통과해야 한다.

수나라는 말할 필요 없고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 양만춘에게 박살난 지 얼마 지났다고 고구려 영토를 통과하여 한반도 남서부 백제까지 올 수 있나?

육군이 몇 명이고 해군이 몇 명인지 알 수 없고, 병참부대는 몇 명인지 알 수 없다.

국사편찬위원회 해석대로라면 육군은 고구려 영토인 압록강 이남으로 지금의  평양 부근을 거쳐와야 한다.

고구려가 멀쩡히 팔짱끼고 “어서 백제 공격하려 가세요” 하고 길을 터 주었을까?

 

고구려 영토를 피해서 13만명의 육해군이 황해바다를 건넜다고 가정하자

13만 육해군이 수천마리 (수백마리여도 관계 없다)의 말을 싣고 배를 타고 한꺼번에 황해를 건넜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꼬리에 꼬리를 문 배의 행렬이 천리(4백키로미터)에 달했다? (舳艫千里)

4백 키로미터(4십만 미터)인 선단이 횡대(가로)로 황해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어느 항구에서 출발했는지 모르겠으나 (내주(萊州)가 항구인지도 의문이다) 출발할 때부터 횡대를 만들 수 없으니 종대(세로)로 와야 한다.

배 한 척 길이가 20미터이고, 앞 뒤 10미터 간격을 둔다고 가정하자.

배 한 척 당 40미터가 필요하다.

한 줄로만 온다면 1만척의 배가 필요하다.

두 줄로 온다면 5천척, 10줄로 온다고 해도 1천척의 배가 필요하다.

배 한 척에 말은 관두고 병사만 100명 탄다고 가정하자.

물론 100명 탈 수 있는 큰 돛단배가 660년에 몇 척 있었을까만.

13만명이 이동할려면 1,300척의 배가 필요하다.

배 한 척에 50명 탄다고 가정하면 2,600척의 배가 필요하다.

말(馬)은 관두고 바람이 잘 불어 주고 조류가 협조해서 평균 최고 시속 17키로미터로 황해를 최단거리로 가로지른다고 가정해도 바다위에서만 28시간 이상 걸린다.

차이나 산동성 위해시에서 인천 터미날까지 바다에서만 383키로미터, 디젤엔진 배로 시속 34키로미터로 14 시간 걸린다.

황해 바다를 어떻게 건넜다 치자.

한반도 어느 육지에 도착하면 누가”어서 옵쇼.” 하고 물과 밥을 주나?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위라 한다)의 거짓말로는 660년 당시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였다고 한다.

소정방이 안전한 한강유역으로 배타고 올려면 인천으로 와야 한다.

소정방은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백제 왕성 남쪽에서 만나자고 했다.

 

3) 6월18일 소정방은 래주에서 출발했다. (六月十八日, 㳄南川停. 定方發自萊州)

6월 21일 태종무열왕은 태자 김법민으로 하여금 배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만나라고 “한반도 남서부 어디에선가”(국편위는 남천정이라 한다) 출발시켰다.

국편위 해석으로는 남천정은 한반도 남서부 해안 가까운 어디일 수밖에 없다.

이에 기초하면 다음과 같이 상상할 수 있다.

소정방이 6월18일 차이나 대륙 래주에서 출발하면서 연락선을 띄워 “6월 21일 이후에 한반도 연안에 있는 덕물도에 도착한다. 연락바란다” 고 태종무열왕에게 전한 것이다.

5월26일 한반도 경주를 출발한 태종무열왕은 백제의 영토인 한반도 남서부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통과해 한반도 남서부 해안 가까운 어느 지역인 남천정에 6월18일에 도착해서 소정방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래주에서 출발할 때 태종무열왕이 한반도 남서해안 어디에 있을 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거의 스마트폰으로 전화하면서 전쟁준비하는 상황이다.

 

4) 다시 삼국사기를 보자

〔7년(660) 6월〕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兵船)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소정방(蘇定方)을 맞이하게 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에 백제의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서 의자(義慈)의 도성(都城)을 무찔러 깨뜨리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二十一日, 王遣太子法敏, 領兵 一百艘, 迎定方於德物島. 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 與大王兵會, 屠破義慈都城.”

〔7년(660) 7월 9일〕 이날에 소정방(蘇定方)은 부총관(副摠管)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의 군사를 만나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유신(庾信)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소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인 김문영(金文潁) (또는 영(永)으로도 썼다.)을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려고 하였다.

是日, 定方與副摠管金仁問等到伎伐浦, 遇百濟兵, 逆擊大敗之. 庾信等至唐營, 定方以庾信等後期, 將斬新羅督軍金文穎 或作永.於軍門

 

국편위의 거짓 해석을 따라 보자.

6월 18일 남천정에 도착한 태종무열왕이 6월21일 김법민을 파견했다.

단순화 해서 태종무열왕이 한반도 남서부 해안 어디에서 출발하여 부여 근처 해안가까지의 거리가 덕물도와 태종무열왕이 있는 곳까지 거리의 1/2이라고 하자.

김법민이 6월21일 출발하여 6월 27일, 28일중에 덕물도에서 소정방 만나고 태종무열왕에게로 7월 4일,5일 돌아와서 태종무열왕에게 보고하고,

7월5 일, 6일경 신라군은 신라군대로 소정방은 덕물도에서 출발해야 7월 10일 백제 왕성 남쪽에서 만날 수 있다.

즉 소정방과 김춘추는 배로 6~7일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황해 바다를 건너오는데 2~3일 걸렸는데 한반도 연안 항로로 5~6일 걸린다는게말이 되나?

남천정은 마치 전라도 어디 항구 가까이에 있는 듯한 서술이다.

남천정이 지금의 광주 부근이라면 김법민은 백제와 전투 한 번 안하고 5~6일 걸려 목포든 나주든 (과거에는 영산강을 통해서 배가 나주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어디든 항구에 가서 병선 100척을 끌고 덕물도 (인천 부근, 한강하류 어디라고 하자)에서 소정방을 만났다.

소정방은 7월10일에 백제의 남쪽에서  태종무열왕을 만나서 같이 싸우자고 제안했다.

소정방이 백제지역을 13만 군사를 이끌고 육로로 갈 수는 없다. 그럴 바에야 아예 전투를 시작하면 된다. (한강- 부여- 광주- 목포 순서이다), 한반도 남서부 해안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5) 다시 삼국사기를 보자

법민이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大將軍)께서 오셨다는 것을 들으시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드시고 오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소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兵馬)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서 (소)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자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蓐食而至.” 定方喜, 還遣法敏, 徵新羅兵馬. 法敏至, 言定方軍勢甚盛, 王喜不自勝.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庾信),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 춘(春)을 (또는 순(純)으로도 썼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0,000명을 거느리고 그에 호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머물렀다.

又命太子與大將軍庾信·將軍品日·欽春 春或作純.等, 率精兵五萬應之, 王次今突城.

 

왕은 금돌성에 머물렀다.”고 했다.

금돌성 (혹은 지금의 ‘돌성’일수도 있다)은 지명임은 확실하다.

그 위의 기사에서는 “〔7년(660)〕 6월 18일에 〔왕이〕 남천정(南川停)에 이르렀다. 㳄南川停”고 했다.

김법민을 소정방 만나라고 보낼 때는 남천정에 있었고, 김법민이 돌아와서는 금돌성으로 옮겼다?

과연 남천정은 어디일까?

아니 남천정이 지명인가? 아닌가?

연남천정 같이 합쳐서 지명인가? 아닌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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