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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영 칼럼 淸風明月] 뜨거운 남도, 제주도의 핏물 우리 민족 고통의 역사

김문영 글지
  • 입력 2021.04.03 06:15
  • 수정 2021.04.0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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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진상을 밝히고 영혼 위로해야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녘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아- 아, 아-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노을빛 젖은 물결에 일렁이는 저녁 햇살

상처 입은 섬돌에 분노에 찬 눈빛이여

갈숲에 파고드는 저승새에 울음소리는

아- 한스러이 흐르는 한라의 눈물이어라

아, 아- 아, 아-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노래를 찾는 사람들> 멤버였던 가수 안치환이 작사, 작곡, 노래한 '잠들지 않는 남도' 전문이다. 학생운동 노동운동할 때도 자주 불렀던 노래지만 매년 4월3일만 되면 빠트리지 않고 반드시 듣고 따라부르는 노래다. 제주 4.3항쟁은 미군정의 폭정의 결과물이다. 이 항쟁은 여순사건으로 이어지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6.25 동족상잔으로도 이어진다. 수많은 양민이 빨치산으로 변하여 폭정에 항거했다. 빨치산과 관련한 내용은 과거에는 금기였지만 이에 대한 연구, 르포, 소설 등 수많은 서적들이 출간돼 지금은 역사의 진실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 있다. 읽기 쉽고 편한 책들을 꼽아보자면 르포집으로 이태의 <남부군>을 추천할만 하며 소설로는 현기영의 <순이삼촌>,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이병주의 <지리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이 있다.

 

2018년2월 나는 인터넷신문협회 회원사 대표들과 함께 4.3 항쟁의 현장을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 해  4.3 70주년을 맞아 ‘4.3 전국화·세계화’라는 슬로건으로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다. 모두 세상이 변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언뜻 그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 정의가 자리매김 되기 위해서는 최하위 약자들의 상황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 4.3의 최하위 약자는 죽은 자들이다. 가해자를 찾아 죽음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 죽은 자의 상처와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가해자는 밝히지 않고 계속 제사만 지낸다. 그것도 이제 유가족을 떠나 정부 차원에서 지낸다. 죽음의 계보가 정권에 닿아 있다는 얘기다. 정부도 책임이 밝혀진 이상 형식적으로라도 향불을 피운다. 정부의 4.3추념식과 민간의 여러 추모문화제 등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지는 것은 그것이 자칫 ‘아우슈비츠 축제 마케팅’ 같은 것으로 변질될 우려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부러운 이유는 최소한 가해자들의 뿌리를 뽑고 부관참시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와의 큰 차이다. 우리는 아직 가해자 언저리도 가보지 못했다. ‘제주4.3학살’은 동아시아의 자유와 평화를 참칭한 미국의 청부살인이다. 무고한 죽음의 원인 꼭짓점이다. 그래서 독일 수상 빌리 브란트가 유태인 추모비 앞에 무릎 꿇었듯 미국 대통령이 제주 평화공원 추모비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 촛불로 세상이 변한 것 같지만 변하지 않았다. 적폐청산,평화,번영,통일이 촛불의 꿈이었다. 그러나 이 꿈이 점점 요원해지는 현실을 보니 지금 한창 꽃잎 떨구는 제주의 붉은 동백꽃이 처량하기만 하다.

1947년 3월 1일, 3·1절 28주년을 맞아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지부는 도내의 곳곳에서 기념집회를 주최했다.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기념식을 마친 군중은 시가 행진을 하며 가두시위에 돌입하였고, 관덕정(觀德亭) 앞 광장에서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에 차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기마경찰이 그대로 가려고 하자 일부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고,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또한 관덕정 쪽에서 총성이 나고 피투성이의 부상자들이 도립병원으로 업혀 들어오자, 부상당한 동료 경찰을 경호하던 도립병원 경찰 1명이 소총을 난사하여 행인 2명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

 

당시 조직이 노출되어 수세에 몰려 있던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이를 계기로 3월 5일에 3·1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반경(反警)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1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에 돌입하여 3월 13일까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에 달하는 166개 기관 및 단체에서 파업에 동참했다.

미군정은 3월 8일에 제임스 카스티어(James A. Casteel) 대령이 이끄는 미군정청·재조선미육군사령부 합동조사단을 파견하여 진상조사에 나섰다. 당시 작성된 미군의 정보보고서에는 3·10 총파업에 "좌·우익이 공히 참가"하고 있으며,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기술했다. 미군정은 이렇듯 제주도민의 경찰에 대한 반감과 이런 감정을 부추기는 남로당의 대중선동에 의하여 3·10 총파업이 증폭되고 있다고 분석하였으나, 그 대응책으로 경찰의 발포에 대한 과오를 추궁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보다는 좌익세력 척결에 주력하는 정책을 전개하였다. 

1947년 3월 14일 제주에 내려온 미군정청의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은 3·1사건이 일종의 폭동이며 다른 지방의 응원경찰을 대거 투입하여 물리력으로 무질서한 제주의 치안을 바로잡겠다는 뜻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3월 15일에는 파업 주모자들을 검거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여 3월 18일까지 약 200명이 검거되었으며, 이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고문을 자행하였다는 논란이 일었다. 제주도의 총파업 사태는 3월 말에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경찰당국의 대량 검속이 진행되어 1948년 4·3 발발 직전까지 약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었다. 또한 3·1사건 이후 지역 주민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였는데, 1947년 3월의 우도사건과 중문리사건을 위시하여 6월의 종달리사건, 8월의 북촌리사건 등으로 이어졌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한반도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안을 통과시켰다. 이 안이 소련의 거부로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대두되었고, 한반도가 영구히 남과 북으로 분단되리라는 우려에 좌파 진영뿐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 격렬히 반발하였다.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에 나섰다. 1948년 2월 7일을 기하여 전국에서 총파업을 일으키는 이른바 '2·7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제주에서는 2월 8일부터 여러 지역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며, 2월 말에 남로당 제주도당 임원들이 참석한 신촌회의에서 강건파와 온건파의 논쟁 끝에 12 대 7로 무장투쟁 방침이 결정되었다. 3월에는 경찰에 연행된 청년 3명이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민심이 동요하였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하여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의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고,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경찰 4명과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남한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조국의 통일 독립, 반미 구국투쟁을 무장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 무장봉기 초기에 미군정은 이 사태를 경찰이 담당할 '치안 문제'로 파악하였다. 미군정은 4월 5일 전남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급파하고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으며, 제주도 도령(道令)을 공포하여 제주의 해상교통을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하여 해안을 봉쇄하였다. 4월 8일에는 제주비상경비사령관이 무장대에 대한 소탕전을 전개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고, 4월 10일에는 국립경찰전문학교의 간부후보생 100명을 제주에 파견하여 경찰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사태의 원인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응원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힘으로 진압한다는 방침은 도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 4월 17일 경찰력만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느낀 미군정은 경비대 제9연대에게 경찰과 협조하여 진압작전에 참가하도록 명령하였고, 4월 18일에는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4월 28일에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金益烈) 중령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金達三)이 평화협상을 진행하여 72시간 안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할 것 등을 합의했다. 그러나 5월 1일에 우익청년단체가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이 합의는 파기되었다. 방화사건 직후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 조사를 벌인 끝에 우익청년들의 소행임을 밝혀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무시하였다. 미군정은 오라리의 방화 현장을 지상과 공중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하도록 하여 《제주도의 메이데이 May Day on Cheju-do》라는 기록영화를 만들었고, 이 사건을 무장대의 소행으로 조작하는 데 이용하였다.

 

오라리 방화사건 이틀 후인 5월 3일 미군정은 경비대에 무장대를 총공격하도록 명령하였고, 이로부터 경찰 중심의 진압작전은 경비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미군정이 강경진압으로 선회한 것은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제주도 사태를 조기에 진압하는 데 주력한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의 결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1948년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고, 미군정은 로스웰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강경진압을 계속하면서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이마저도 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으며, 6월 18일에는 화평책을 추진해온 김익렬과 전격 교체되어 경비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였던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잠시 소강 상태에 놓였으나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9월 9일에는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지역 문제가 아닌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고, 10월 17일 송요찬 제9연대장은 제주 해안선으로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포고문에서 언급한 해안선으로부터 5㎞ 이외의 지점은 한라산 등 산악지역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마을(표고 200m 등고선에서 표고 600m 등고선 사이의 지역) 전부가 해당하여 통행금지란 결국 거주를 금지한다는 의미였다. 10월 18일에는 제주 해안이 봉쇄되었고, 11월 17일에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후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진압작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피난민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진압 군경과 여기에 가세한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원들은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가족 중에 청년이 사라진 집안의 사람들을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하기도 하였다. 1948년 12월 말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함병선(咸炳善) 연대장의 2연대로 교체되었지만 강경진압은 계속되었다. 조천면 북촌리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400여 명의 주민을 총살한 이른바 ‘북촌사건’도 2연대가 자행하였다. 또한 주민들은 무장대에게도 피해를 입었는데,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었고,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을 병행하여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李德九)가 사살되었다. 이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처형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는데, 그 숫자는 약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6·25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한라산에 잔존한 빨치산 무장대는 60여 명이었으며, 1950년 7월 25일 중문면 하원리를 습격하여 민가 99동을 불태운 것을 위시하여 간헐적으로 지서나 마을을 습격하여 경찰에 피해를 입히고 우익인사를 살해하며 필요한 식량을 획득하였다. 무장대는 경찰의 진압작전으로 인한 사상자, 귀순공작으로 인한 귀순자가 발생하였으나 계속해서 20세 전후의 젊은이를 충원함으로써 1951년 3월에 64명, 1952년 5월에는 65명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52년 10월 말에서 1953년 11월 말까지의 진압작전으로 무장대의 잔여인원은 11명으로 줄어들었고, 1954년 2월 13일에는 5명이 잔존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4·3사건은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사실상 종결되었다. 마지막 무장대원은 1957년 4월 2일에 생포되었다.

사건 이후, 희생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요청으로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을위한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그해 8월 28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발족하여 진상조사에 착수하였다. 위원회는 진상조사 결과,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였다.

2000년 6월부터 시작된 사건희생자 신고 접수 결과 1만 4532명으로 집계되었지만, 미신고 또는 미확인 희생자가 있어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군인 전사자는 180명 내외, 경찰 전사자는 140명이며, 당시 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한 우익단체(대동청년단·서북청년회·대한청년단·향보단·민보단·청년방위대·특공대·학생연맹 등) 회원들은 소정의 절차를 거쳐 국가로부터 국가유공자 및 유가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2003년 10월 31일 진상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제주 4·3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일환으로 4·3평화공원조성사업이 진행되었고, 2008년 3월 28일 제주시 봉개동에서 4·3평화공원이 개관하였다. 2014년 ‘4·3희생자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2018년 제70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과 2020년 제72주년 4·3희생자추념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했다.

이상이 제주 4.3항쟁의 전모이다. 장황하지만 항쟁의 전모를 살펴본 이유는 주변에 의외로 제주 4.3항쟁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서다. 내 주변 인물이 이러할진대 국민 전체로 살펴보면 오죽하겠는가. 특히 우리교육의 현실이 역사교육을 왜곡 또는 등한시하는 풍토여서 젊은 세대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바로 알리고자하는 간절한 숨은 뜻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73년 전 제주도는 대부분이 초상집이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7대 자연유산인 아름다운 섬 제주도는 이토록 피눈물나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이 여러 목적으로 제주도를 자주 찾는다. 각자의 여행 목적이 다를 수 있지만 제주도에 발을 딛는 순간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 평화 번영 통일을 염원하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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