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친구
  • 후원하기
게이 친구
  • 김정은 전문 기자
    김정은 전문 기자 1poemday@naver.com
  • 승인 2021.03.23 15:5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 변희수 하사를 기리며



베를린 장벽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 장벽 브란덴부르크 문

내 머리 어때?

첫 독일 여행에서 게스트 하우스 룸메이트는 게이였다

베를린에 가기가 무서웠다 워낙 반공 이미지로 자란 나는 그 도시 소식을 부정적으로 들었고 문화적 매력이 있는 곳도 아니었다 하지만 큰 맘 먹고 길을 떠났다 여름에 도착한 그 곳의 밤 9시는 대낮보다 밝았다 백야라 한다 거기도 백야가 있는 줄 몰랐다 알래스카나 북유럽에만 있는 거 아닌가 겨우 밤 11시가 되어서야 어둑어둑해졌고 늦게 나다녀도 안전해서 좋다고 생각했다 4인 룸에 나 혼자 방을 써서 신났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잠을 자는데 누군가 얼굴을 들여다보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독일 남자는 위협적이지 않은 키에 불붙는 금발에 만화에서 튀어 나온 듯한, 남자답게 잘생기고 선한 인상이었다

베개 대신 일렬로 이어진 롤 휴지 10개를 비닐 채 뜯지도 않고 베고 자는 동양인인 나를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웃으며 인사한다 자기는 독일 대학생이라고. 독일 제2의 대학, 우리나라로 치면 연대 법학부였다 다른 도시에서 올라와 입학 전 집을 구하러 미리 온 거다 나중 들어온 폴란드 친구와 오스트리아 친구, 다국적 우리 네 명은 아주 친해졌다 원어민이 아닌 외국인들이 쓰는 영어 발음은 알아듣기 쉽다 다들 같은 처지인 거다

공통 주제도 많았고 국제 정서니 교육이니 직업이며 장래 희망, 영어 문법에 대한 현대적 토론도 심도 있었다 요새 영어는 3인칭 단수 동사에 쓰는 s를 붙이지 않는다는 둥, 형용사를 명사로 쓴다는 둥, 남성 여성형 구분을 안 한다는 둥. 독일 친구는 빗속을 뚫고 클럽 간다고 드라이를 하루 종일 하고 있다 그러다 우리랑 노는 게 더 재미있다고 창틀에 귀엽게 걸터앉아 외출을 포기했다 그때 좀 이상했다 기지배처럼 드라이나 해대는 모습이. 친구는 나에게만 살짝 자기는 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 듯했다 했더니 언제 느꼈냐고 궁금해 한다 너 하루 종일 머리 말릴 때 알아봤다 머리 잘 안 나왔다고 속상해 할 때라고 대답했다

자기 이름인 안드레이가 여성 이름 같지 않냐고 좋아하고, 새로 들어온 한국인 남자애에게 관심 보이며 같은 한국인이니 친하냐며 걔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고, 항상 숙소를 나설 때 hug me 하면서 안아 달라고 하고 시간 맞춰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삐쳤다 꼭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미안하다고 하면 금방 풀어져서 우리 로비로 가서 수다 떨자 이런다 샤워할 때도 누가 먼저 나올 거 같냐 길래

니가 먼저 나온다 한국 사람은 샤워시간이 길다

왜?

너는 몰라도 되

차마 때미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말할 수 없었다 친구는 하루 종일 학교에서 월세 값을 주면, 독일에선 대학생이 자취하면 그 몇 십 %를 나라에서 지원한다, 핑크색으로 벽지를 할 거라는 둥 나무색이나 갈색은 어둡다 너는 무슨 색을 좋아하냐 아침 식사가 끝난 게스트 하우스에 남은 빵을 자기가 하나 더 먹는 걸 어떻게 생각하냐는 둥 수다가 많았다 나는 친구의 손금을 봐 주겠다고 손을 잡았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무도 잘생긴 그 애는 게이라고 알아도 멋있었다

자기보다 더 예쁜 유치원 교사인 남자친구를 소개하며 게이인 룸메이트 호주 친구와 다 같이 클럽을 가자한다 약간 피곤해서 망설였더니,

we think we are good company

이런다 우린 좋은 친구라고. 내가 머뭇거린 걸 자기들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동양인 여자애가 같이 안 가려 한 걸로 생각한 거다 실망시키기 싫어 따라 나섰다 가는 중에 계속 일본 만화 영화 테레비 군인지 어릴 때 봤다고 네모 텔레비전 모양의 캐릭터 얘길 했는데 우리나라에선 상영이 안 된 거였다

게이 바에 도착했다 그곳엔 동양인 여자들의 올 누드가 실물 크기 사진으로 벽면을 온통 장식하고 있었다 왜 게이 바에 여자 누드가 있냐 물었더니 모르겠다 해서 내 생각엔 남성성을 회복하라는 뜻 같다고 했더니 웃는다 흔히 우리는 게이라면 남녀처럼 차이 나는 커플을 생각하지만 잘생긴 커플끼리, 귀여운 커플끼리, 남성적인 커플끼리 연인인 경우가 많다 내 친구 커플은 아기같이 귀여운 커플이다

카페와 연결된 클럽은 하우스 방, 디스코 방, 힙합 방 일렉트릭 방 다양한 음악이 종류별로 구분 돼 흘러 나왔다 하나하나 다 구경했다 춤추고 있는데 어느 남자가 내게 달려들어 친구들이 막아주기도 했다 화장실은 앉으면 얼굴 위치에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잠금장치가 없었다 성전환 수술을 한 여성이 자랑하듯 나에게 가슴을 내민다 친구는 내게 곤란한 일이 생길까봐 화장실 갈 때도 바로 앞에 있어 주었다 

클럽 한 구석엔 울 나라 평상처럼 나무로 만든 쉴 공간이 있었다 친구는 피곤하다고 누웠고 나도 옆에 누웠다 아버지가 러시아인이라서 어릴 때 러시아에서 살았는데 거기 한국 사람들은 날 생선을 야채와 섞어 먹더라 하면서 그거 이름이 뭐냐 한다 회 비빔밥일 거라 했더니 밥은 없다고 그래서 그럼 그 사람들이 응용해서 만든 요리인가보다 했다 지금 생각하니 회무침인가 보다 난 회덮밥만 먹어봤지 회무침을 먹어본 적 없어서. 이젠 다신 아버지의 나라로 못 간다면서 가면 잡혀 군대 간다고. 군대 가면 너 정체성이 다시 돌아오지 않겠냐 했더니 아니라고 자긴 12살 때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고, 자기 여동생은 레지비언이라 한다

미국 의학 논문에 아들이 게이인 건 임신 시 남편이 바람 피면 아내가 남자에 대한 혐오감을 느껴 태아가 자기 정체성을 부정해서 게이가 된다고 말했더니 그럼 자기 동생은 왜? 그래서 그건 그땐 너희 엄마가 상대 여자를 미워해서다라고 말했다 나도 이걸로 논문하나 써야겠다 하지만 요즘 논문엔 전자는 또 아니라 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 본 게이 바, 언니에게 잘생긴 독일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니 결혼하라더라 했더니 자기는 나와 꼭 결혼할 거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친구는 몇 년 후에 아기 다섯 낳고 남편과 같이 베를린으로 다시 놀러 오라 한다 너나 다섯 낳으라고 웃으며, 인터넷으로 아무 남자나 만나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이후 새 집으로 들어가 초대한다 했는데 연락이 없다 아마 그녀의 남자친구가 우리가 너무 친해 질투한 듯하다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좋아한다는 화장품을 부쳤다 반남반녀 신화에 나오는 인물 마크가 새겨진 브랜드여서 좋단다

그리고 난 베를린을 떠났다 내게 신기한 추억을 만들어 준 친구, 그 애가 행복했음 좋겠다

베를린 시장이 게이였을 때가 있다 정치만 잘하면 정체성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베를린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오래 연임했다

고 변희수 하사 사건이 안타깝다 우리도 빨리 정체성을 문제 두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글은 이어진다는 생각에 홍정욱 님 책 이전부터 저도 원래 마침표 안 함

여러분의 후원이 좋은 콘텐츠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듭니다.
  • 1,000
    후원하기
  • 2,000
    후원하기
  • 5,000
    후원하기
  • 10,000
    후원하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