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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 5-6 / 어디엔들 머물 곳이 없으랴

김홍성
  • 입력 2021.02.08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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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거처의 골방을 뒤졌더니 적음 형이 낸 단행본 저문 날의 목판화가 나왔다. 첫 장에 김홍성에게 /임신년 겨울/ 寂音이라는 서명이 있다. 허공에 휘날리던 터럭들이 우연히 거기 모였다 싶은 필체에서 적음 형의 빙그레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199210월에 출판사 서울창작에서 낸 이 책의 판권에는 적음 형의 인지도 붙어 있다. 종서로 새긴 인장의 寂音 두 글자가 삐뚤빼뚤했다. 취해서 걷는 적음 형의 뒷모습 같았다. 4에는 천상병, 중광, 이시영, 송기원의 덕담이 있고, 발문은 표성흠이 썼다. 이시영, 송기원은 적음 형의 서라벌 동기이고 표성흠은 서라벌 선배. 적음 형의 인사동 술친구였던 천상병, 중광 두 분은 벌써 오래 전에 작고했다.

 

저자 약력에는 이 책 보다 11년 앞선 1981년에 산문집 어디엔들 머물 곳이 없으랴를 냈다고 되어 있다. 내가 타자로 원고를 만들었던 책은 바로 이 책이다. 나는 이 책을 마리아 갱생원에 가지고 갔었다. 혼자 가기 뭣해서 전화로 도움을 청한 신현정 선배가 마리아 갱생원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대충 작전을 짠 뒤에 정문 수위실로 가서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군복 비슷한 검은 제복을 입은 경비는 가족이 아닌 한 일체의 면회가 안 된다고 하였다. 아무리 사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책을 꺼내어 작가 사진이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사진을 봐라. 이 책을 쓴 사람이 저 안에 갇혀 있는 최OO 이다. 당신들은 작가를 가두고 있다. 만일 그가 밖에 나오는 날이면 인권 유린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는 이 갱생원의 실태가 낱낱이 고발될 것이다. 물론 우리도 그를 도울 것이다. 이 책과 함께 우리가 한 말을 원장 수녀님에게 꼭 전해 주기 바란다....... 대충 이런 내용의 협박을 하고 우리 두 사람의 명함도 내밀었다. 신현정 선배는 당시 기업의 홍보실에 근무했고 나는 그래도 명색이 기자였다. 경비원은 기자세요?’ 하고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우리는 적음 형이 조만간 해방 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일단 기다려 보고 도저히 안 되면 다른 대책을 세워 보기로 하고 헤어졌던 것 같다. 신현정 선배도 고인이 된지 여러 해가 지났다. 신현정 선배와 적음 형 두 분 중에 어느 분이 먼저 세상을 떠났는지를 모르겠다. 한 두 해 차이였던가? 세 해 정도였던가? 모르겠다. 내 기억력은 퇴화되기 시작한 지 여러 해 되었다. 그런데도 새롭게 떠오르는 사실이 있다. 적음 형과 관련하여 반드시 기록해 두어야 할 것 같다.

 

1981년은 1월에 북한강변에서 겨울 대성리 31인 전이 열린 해였다. 흑석동의 예술대학 회화과 출신들이 다른 대학 지역 출신의 젊은 예술가들을 규합하여 설치 작업을 선 보였던 이 특이한 야외 전시회에서 당시 33세였던 적음 형은 작가 31인을 대표하여 자작시를 낭송했다. 추위에 새파래진 얼굴로 온 몸을 부르르 떨면서 적음 형이 위대한 시인처럼 우렁차게 읽었던 시는 아래와 같다. 아마도 그 날 아침에 급히 썼을 것이다.

 

버드나무는 춥다고 운다

버드나무 가는 가지 끝에서

북한강은 춥다고 운다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곳을 향하여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곳을 향하여

너무도 외롭게 흘러가고 있다고

북한강은 운다

넘실거리는 북한강 물결 위에서

우리는 운다

 

겨울 대성리에서

피곤한 삶의 끈을 더듬을 수 있다면

황량한 우리들 꿈의

민들레 피어있는

작은 언덕을 넘을 수만 있다면

겨울 대성리

북한강 물결 위에서

수많은 젊음들의

피의 용솟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알리라

역사는 왜 춤추고 있는가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알리라

버드나무는 춥다고 운다

버드나무 가는 가지 끝에서

북한강은 춥다고 운다 그러나

우리는 울지 않는다

버려진 꿈의 껍질들을 위하여

우리는 건강한 팔다리로

얼어터진 빙판의 길을 지난다

 

겨울 대성리를 잊어버리자

겨울 대성리의 제사

겨울 대성리의 無知

오래오래

잊어버리도록 하자

 

- 겨울 대성리 全文

 

각종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에서 겨울 대성리 31인 전을 크게 보도했다. 주간지나 월간지에서는 겨울 대성리 강변에 모인 작가들에게서 짙은 허무의 냄새가 난다고 썼는데 이는 많이 봐 준 말이었다. 31명 중에 최소한 10 명은 지독한 술꾼들이었으므로 짙은 술 냄새가 난다고 써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적음 형은 물론 10 명 중에 속했다. 괴상한 예술을 하는 괴상한 사람들이 꽁꽁 얼어붙은 강변에 모여 있고 돌아다니고 술을 마시고 뒤엉켜서 싸우기도 하는 그 자체가 퍼포먼스였다. 겨울 대성리 전을 전후해서 적음 형은 발이 넓어졌다. 그리고 바쁘게 돌아쳤다. 술친구가 급격히 늘어나 갈 곳이 많아졌던 것이다.

 

겨울 대성리 전은 지난 37년 동안 해마다 겨울 북한강변에서 열렸다. 작가들이 많이 모일 때는 1백 명이 넘기도 했으며 35주년에는 양평의 미술관에서 아카이브전도 열렸다. 38회가 되는 해 23일에는 양수리에서 열렸다. 적음 형은 이렇게 역사가 깊은 미술전의 창립 멤버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어느새 적음 형은 이 세상에 없다. 그래서 시 겨울 대성리의 맨 끝 구절의 여운이 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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