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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대표 수영(남상남)선수가 왜 풀장에 빠져 죽을 뻔 했을까?

기영노 전문 기자
  • 입력 2020.10.16 17:25
  • 수정 2020.10.1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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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자수영 자유형 100m 예선에서 적도에 있는 나라 기니 출신의 무삼바니는 정상적인 수영복이 아닌 헐렁한 트렁크 차림으로 스타트 라인에 서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무삼바니의 수영실력은 헐렁한 트렁크보다도 못했다. 수영종목에서 가장 빠르다는 자유형이 아닌 평영보다 더 느린 ‘개헤엄’을 친 것이다.

무삼바니는 예선 전체 1위를 차지한 네덜란드의 피터 호헨 반트 선수의 48초68보다 무려 1분04초08이나 뒤진 1분52초72의 기록으로 예선 탈락했다. 무삼바니가 100m를 헤엄치는 동안 피터 호헨반트는 200m를 헤엄치고도 남는 기록이었다.

그러나 한국 수영 영웅 박태환은 무삼바니 모다 더 황당한 경험을 했었다.

박태환은 대청중학교 3학년 때 첫 태극마크를 달고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 한국 수영 계는 “국내기록도 갖고 있지 않은 어린 선수를 올림픽 대표로 출전시키는 것은 특혜다” “아니다 이번에는 힘들지 모르지만, 워낙 가능성이 있는 유망주니까 경험 삼아 출전시켜야 한다”는 논쟁이 벌어졌었다.

그러나 박태환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살리지 못했지만, 그 대신 천금(千金)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박태환은 나중에 “아테네 올림픽은 어린 나에게 기회가 너무 빨리 찾아왔던 것 같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기를 치른다는 것이 중학교 3학년생 박태환에겐 엄청난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수영 경기가 벌어진 아테네 아쿠아틱센터는 야외 풀장이었다.

당시 8레인에서 예선 첫 경기를 치렀던 박태환은 스타트 라인에 섰는데 눈앞에 아무 것도 안 보였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먼저 뛰어버렸는데 물속에 들어가니까 깨어나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박태환은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했지만 평생의 라이벌 중국 장린을 엉뚱한 곳에서 만났다.

박태환은 내가 실수를 한 조에서 장린 선수가 4번 레인에 있었는데, 탈의실에 들어와서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픽 웃더라는 것이다. 당시 장린이 자기 스텝들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지만 꼭 나를 흉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

박태환은 그 이후 “내가 다른 선수들은 못 이겨도 장린 만은 꼭 이긴다”며 의지를 다졌던 것이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큰 경험을 한 박태환 선수(사진=박태환 선수 페이스북 갈무리)

장린은 그 후 올림픽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등에서 박태환에게 번번이 패했고, 2012 런던 올림픽에는 후배 쑨 양 선수 등에 밀려서 아예 출전권조차 얻지 못했다.

그러니까 아테네 올림픽은 어린 박태환에게 기회를 줬다가 빼앗았지만, 그 대신 자신을 조롱했던 장린이라는 라이벌을 만나게 되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올림픽 수영에서 박태환 보다 더 큰 낭패를 본 수영선수가 있었다.

1960년대 한국 수영의 간판선수 였던 남상남 선수 였다.

이름에 남자가 두 번 들어가지만 여자 수영선수 였던 남상남 선수는 당시 한국 수영 계에서는 독보적인 선수였다.

남상남은 아시안게임 영웅 들인 조오련과 최윤희가 나오기 전의 선수였는데, 풀에 들어갔다 하면 한국 신기록을 밥 먹듯이 세웠다.

지금으로 말하면 박태환 급의 선수였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남상남 선수가 올림픽 메달 까지는 몰라도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면서 선전을 해 줄 것으로 믿었다.

남상남이 처음으로 출전한 국제대회였던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은 올림픽 사상 가장 높은 곳에서 열린 대회였다.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멕시코 고원에서 올림픽이 열려 육상 단거리에서는 공기의 저항을 덜 받아 좋은 기록이 많이 나왔지만, 장거리 선수들에게는 지옥 같은 올림픽이었다. 더구나 육상의 기록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킨 타탄트랙도 그 대회에서 처음 나왔다.

결국 미국의 지미 하인즈 선수가 남자육상 100m에서 당시로는 인간능력의 한계라는 10초 벽을 처음으로 깨트리고 9초99를 기록하면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마라톤은 1960년 로마, 1964년 도쿄 대회 금메달 기록(2시간12분~15분)에서 크게 후퇴한 2시간20분 대의 기록으로 에티오피아의 마모 월데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했다.

또한 멀리뛰기에서 미국의 봅 비몬 선수가 세운 8m90cm라는 엄청난 기록은 5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멕시코시티의 공기 압력이 평지보다 약 27퍼센트, 공기밀도가 23퍼센트 정도 적기 때문에 나온 대기록이었다.

육상 보다는 덜 했지만 수영도 멕시코 고원의 영향을 받았다.

멕시코 올림픽에 남상남은 수영 선수로는 다이빙 선수 박정자 송재웅 선수와 함께 출전했는데, 경영 선수로는 유일한 선수 였다.

그러나 남상남은 올림픽이라는 엄청난 무대에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더구나 생전 처음 보는 실내수영장에 기가 죽었다. 당시 한국은 지금은 없어진 서울(동대문)운동장 야외수영장이 유일한 50m 정식 풀장이었다.

더구나 스타트 라인에 자신과 함께 선 미국, 네덜란드, 동독, 서독 등 유럽 선수들의 체격이 마치 남자 선수들처럼 컸다.

여자접영 200m 예선, 8명의 선수와 함께 스타트 라인에 선 남상남은 멀리서 봐도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고 창백했다.

출발 신호와 함께 8명의 영자들이 일제히 풀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런데 남상남은 레이스가 진행됨에 따라 페이스가 눈에 띄게 처지더니 50m를 턴하자마자 풀 속으로 깊숙이 빠지더니 다시 솟아 나와서는 붕 떠 오른 채 수영 동작을 멈추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초조함 마음으로 레이스를 지켜보던 한국선수단 주치 의사 성낙응 박사가 한국 선수단에 다급하게 외쳤다.

“이 과장(대한체육회 과장으로 추정됨) 상남이 끌어내 빨리”

그러나 이 과장은 다른 선수들이 한창 레이스를 펼치고 있어서 풀장에 뛰어 들 수가 없었다.

그러자 성 박사가 또 외쳤다.

“아이고 상남이 물에 빠져 죽는다고......어서 빨리 끌어내란 말야”

한국의 독보적인 올림픽 수영 대표선수가 겨우 50m를 헤엄 친 후 물에 빠져 죽게 된 것이다.

수영 인들은 일반인들이 수영 좀 한다는 소리를 하려면 400m 정도는 부담 없이 헤엄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올림픽 수영 선수가 50m 밖에 못 가서 허우적대다니......

경기 진행요원들이 이 과장과 함께 올림픽이고 뭐고 사람부터 살려야 한다며 풀 속에 뛰어들어 빠져 죽어가는 남상남을 구출해 내어야 했다.

축 늘어진 남상남은 숨이 멎어 있었다. 성 박사는 재빨리 휴대용 산소 호흡기를 꺼내 남상남의 코에 대고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수영장의 관중들과 TV를 지켜보던 전 세계 시청자들은 뜻밖의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얼마간 급박한 상황이 지난 후 남상남은 긴 숨을 토해 내며 소생했다.

그런데 왜 올림픽 수영 선수가 풀장에서 익사할 뻔 했을까?

첫 올림픽 무대의 부담감, 처음 경험하는 엄청난 규모의 실내풀장 그리고 자신 보다 훨씬 큰 선수들을 이겨내고 좋은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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