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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은 정말 '쇼' 였을까? 김일과 장영철 일화

기영노 전문 기자
  • 입력 2020.09.2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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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일 선수의 모습

“프로레슬링은 쇼”다.

반은 맞는 말이고 절반은 틀린 말이다.

물론 극도로 발달된 미국의 프로레슬링은 시나리오 작가까지 있는 거의 완벽한 쇼라고 할 수 있지만 장영철, 김일, 천규던 등이 전성기를 누리던 6~70년대 한국의 프로레슬링은 시나리오까지 있지는 않았다.

그러면 왜 한국 프로레슬링이 반은 쇼고, 절반은 실제상황인지 알아보자.

1965년 11월27일 밤 서울 장충체육관은 프로레슬링을 보기위해 7천여 관중이 가득 들어찼다.

한국, 미국, 일본, 캐나다 등 5개국 친선 국제레슬링 대회에 이 같이 많은 관중이 들어 찬 것으로 보아 당시의 프로레슬링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김 일과 장영철, 천규덕의 인기는 그 후 프로야구 등 모든 프로스포츠를 통틀어도 따라 갈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높았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그날의 메인이벤트(가장 중요한 경기)는 한국 프로레슬링 챔피언 장영철과 일본의 2류 급 선수 오구마의 3판 2선승제의 싱글매치(1대1 대결)였다.

예상은 장영철이 이기는 것은 너무 당연했고, 과연 어떤 기술로 어떻게 이기느냐에 관심을 모았다.

저녁 8시가 약간 넘어 장영철이 특유의 긴 턱수염과 함께 금빛 가운을 걸쳐 입고 링 위에 올라섰다. 장영철이 두 손을 버쩍 쳐들고 인사를 하자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오구마는 관중들의 엄청난 환호성에 주눅이 들었는지 약간은 기가 질린 표정으로 장영철의 반대편 코너에 서 있었다.

공이 울리자 오쿠마가 장영철의 머리를 휘어잡고 군밤을 여러 번 먹였다. 장영철은 곧바로 두발로 오구마의 허리를 껴안으며 나뒹굴었다. 그 후 장영철은 오구마의 허리를 집중적으로 공략을 해 오구마가 비틀거리자 자신의 주 무기인 두발당성(몸을 날려 두발로 가슴을 차는 것)으로 먼저 한판을 따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장영철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제는 이제까지 그랬었던 것처럼 장영철이 한판을 내 준 뒤, 세 번째 판에서 이기느냐, 아니면 그대로 두 판을 내리 이기느냐 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두 번째 판에서 오구마가 정영철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다가 이기면서 분위기가 이상해 졌다.

문제의 3번째 판.

오구마는 장영철의 약점인 허리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장영철은 오구마가 허리만 공격해 오자 당황한 듯 로프를 잡으며 시간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오구마는 장영철을 링 가운데 끌어내려 넘어뜨리더니 타고 앉아서 허리를 뒤로 꺾기 시작했다.

허리를 뒤로 꺾인 장영철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링 바닥을 두드리며 심판에게 기권의사를 보냈다.

천하의 장영철이 홈 링에서 패하는 대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장영철이 일본의 2류 선수 선수에게 패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영철이 기권 패를 당하자 링 주위에 몰려있던 최시운, 조경구, 김학구, 이석윤 등 장영철의 제자 6~7명이 음료수 병 등을 손에 들고 링 위로 올라가 오구마를 마구 가격했다.

오구마의 얼굴은 이내 피 범벅이 되었다.

오구마는 급히 성모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링 위에는 오구마에게 어이없이 1대2로 패한 장영철과 장내아나운서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장내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장영철에게 넘겨주었다. 이 사태에 대한 해명을 하라는 듯.

마이크를 넘겨받은 장영철은 “나는 머지않아 김 일에게 도전을 하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로말했다.

장영철은 관중들이 떠드는 바람에 잘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종전 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다.

“김 일에게 도전해서 꼭 설욕 하겠습니다” 라고 외쳤다.

그러니까 자신이 오구마에게 패한 것은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김 일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공작을 한 것으로 치부한 것이다.

한편 중부경찰서는 난동을 부린 최시운, 조경구 등을 특수폭행 혐의로 연행 했고, 장영철은 경기용 팬티 차림으로 중부서로 끌려가야 했다.

장충체육관에 남아있는 프로레슬링 관계자들은 이 사태를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었다.

하나는 이날 경기는 원래 장영철이 2대1로 이기도록 되어있었는데, 오구마가 약속을 어기고 너무 심한 반칙을 하는 등으로 비겁하게 이겼기 때문에 장영철의 제자들이 우발적으로 폭행을 가한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또 다른 편에서는 장영철이 한국 프로레슬링 1인자 였는데, 이제 김일 선수의 인기에 눌려 점점 인기가 떨어지자 이에 대한 반감으로 장영철의 제자들이 노골적으로 감정을 폭발 시킨것 이라고 봤다.

당시 5개국 국제프로레슬링 대회는 김 일이 프로모터 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전자가 더 신빙성을 갖고 있었다.

당시 프로레슬링은 국민들의 유일한 스포츠이자 위안거리였다. 흑백 TV가 보급되던 62~3년 경 부터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까지도 가장 즐겨보게 되었다.

실내체육관인 장충체육관의 건립과, 나중에 일본에서 괴한의 칼에 찔려 죽었지만, 세계 프로레슬링 챔피언을 지낸 재일동포 역도산의 내한 그리고 TV의 보급 등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장영철 선수의 모습

당시 국내 프로레슬링은 두발당성을 주 무기로 하는 장영철, 역도산 처럼 가라데 촙을 특기로 긴바지를 즐겨 입던 천규덕(탈랜트 천호진의 아버지), 그리고 몸무게 110kg의 당시로는 거한인 백곰 우기환, 키 197cm의 쌍둥이 거한 박성남 박성모 등이 일류급 선수였다. 이들이 출전하는 프로레슬링 경기는 비록 국내 경기라도 8천여 명을 수용하는 장충체육관을 가득 메웠었다.

국제경기에는 표를 구하지 못해 입장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국제경기를 할 때 마다 일본이나 미국 캐나다 선수들은 무조건 악역을 맡아서 역전패를 당했지만, 프로레슬링 팬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당시 프로레슬링 입장권은 한일전 때는 1~2백 원 현재 시가로 약 4~5만 원정도 했었지만 프리미엄이 붙어서 5백 원까지 치솟았다.

국제대회를 한번 하려면 체육관 대관료 선수 출전료 등을 합해서 2백만 원 가량 들었는데, 프로레슬링은 프로복싱과는 달리 오늘 경기를 치른 선수가 내일, 모레까지 사흘 내내 출전할 수가 있어서 3일 정도 경기를 치르면 관중수입 TV중계료 등으로 1천만 원이 넘는 수입을 올렸었다.

김 일이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수입의 절반은 장영철이 갖고 나머지 절반을 경기에 출전한 2~3류 선수들이 나눠가졌는데, 2~3류 선수의 몫도 10만원이 넘어서 B급 선수도 집을 몇채 씩 갖고 있었다.

프로레슬링이 이 같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파 장영철과 뒤늦게 나타난 해외파 김 일이 주도권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장영철로부터 공개적으로 도전을 받은 김 일은 지금은 폐간된 신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세계챔피언 급인데, 일본의 2류 선수(오구마)에게 패한 장영철이 감히 나에게 도전을 하는가, 만약 매치가 성사되면 단 2분 만에 이길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그리고 장영철이 경찰서에서 “프로레슬링은 사전에 경기 방법과 승패를 미리 논의 하는 법”이라고 말해 사실상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것을 인정 했다는 것을 의식한 듯.

“프로레슬링은 절대로 사전에 승부를 조작할 수 없다. 실력에 의해서만 승패가 결정된다. 장영철 선수가 그렇게 말했다니 정신상태가 의심스럽다”며 ‘레슬링은 쇼라’는 것을 극구 부 인했다.

그 후 장영철은 한국 프로레슬링 계에서 비겁자로 낙인이 찍혀 뒤안길로 사라졌고, 김 일은 ‘역도산의 후계자라는 후광과 ’살인적인 박치기‘로 독보적인 선수로 활약하면서 대통령으로부터 레슬링 전용체육관인 ‘김일 체육관’을 하사받는 등 절정의 시간을 보냈다.

프로레슬링은 분명히 사전에 각본을 짜는 쇼다.

다만 대부분 실력이 이기는 선수가 이기는 쪽으로 승부를 정한다. 실력이 뒤지는 선수가 이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사전에 각본을 짜야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한 선수가 공격을 하고 다른 선수가 그 공격을 받아주는 과정이 관중이나 시청자들에게 재미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영철, 김 일은 생전(生前)인 2006년 2월에 만나 극적으로 화해를 했다.

장영철은 2006년 8월, 김일은 2006년 10월, 천규덕 씨는 아들 천호진이 KBS 주말 드라마 “한번 다녀왔습니다”가 인기리에 방송되던 때 인 2020년 6월2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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