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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73 ] 귀보시

김홍성
  • 입력 2020.09.02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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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취생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었다. 취생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며칠 동안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바람 소리를 듣고, 풀이 눕는 소리를 듣고, 높이 날아오르려는 새의 날개짓 소리를 들어주고 있었다.

 

몽사는 물론 씩씩하게 걸어갔지만 혼자라서 쓸쓸하게 보였다. 다르질링의 호리 축제 때 그 광란의 골목을 빠져 나가던 몽사와 취생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금송 숲에 있을 두 여성의 모습도 떠올랐다. 귀보시라고 했던가? 남의 하소연이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보시. 거슬린다는 기색 없이, 판단이나 조언도 없이, 그냥 끝없이 잘 들어주는 보시.

 

스님은 취생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었다. 취생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며칠 동안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바람 소리를 듣고, 풀이 눕는 소리를 듣고, 높이 날아오르려는 새의 날개짓 소리를 들어주고 있었다.

 

나니 디디도 그런 사람일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 조용히 뜨개질만 하고 있었다는 사람. 우리가 노비구니의 다비장에서 본 사람들 중에 나니 디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룸부 셀파도 떠올랐다. 사방 백 리 밖으로는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했던 노인. 그 노인이야말로 혹시 도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내 생각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었다. 바람에 날리는 솜털이나 먼지처럼 이리 날고 저리 날았다. 계통도 갈래도 없었다. 여기 붙고 저기 붙었다. 스님은 말했었다. 거의 모든 생각은 망상이라고. 망상에서 자유로우면 이미 도통한 거라고.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걸 배우는 중이라고 했던가? 절하고 염불하고 명상하는 그 모든 것이 결국 망상에서 자유롭기 위한 거라고 했던가?
 

 

저녁이 되도록 몽사는 오지 않았다. 혼자 짜장면에 뚱바를 마시면서 삼툭 마을의 세 동포를 생각했다. 몽사는 오히려 스님을 고마워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기나긴 취재 여행에 지친 취생이 스님에게 기대어 좀 쉴 수 있으면 다행 아닌가 싶었다.

 

몽사는 두 사람이 친밀해진 것을 질투하는 지도 몰랐다. 대범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왜 갑자기 옹졸해졌을까, 몽사와 취생, 두 사람의 관계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1년 중 6개월은 취재 여행을 다니고 나머지 6개월은 국내에 체류한다고 했는데 국내에서의 6개월은 어떻게 지내는 것일까? 국내에 그들이 함께 사는 집은 있을까? 그들은 국내에서 합법적이고 당당한 부부로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걸까? 자식은? 재산은? 미래는? 그들의 과거는? 1년에 반을 부부가 함께 떠도는 삶은 오래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숙소에 돌아와서 일기를 썼다. 일기장에는 스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채워지고 있었지만 그걸 들어 주던 스님의 귀는 그 때 취생을 향해서만 열려 있었다. 취생에게 스님의 귀를 빼앗긴 나는 왜 취생을 질투하지 않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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