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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64 ] 조앤과 마크의 술잔

김홍성
  • 입력 2020.08.2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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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남인도 끝의 바닷가에서 처음 눈길이 스쳤다. 각자 짝이 있는 상태였다. 두 커플은 마드라스 동쪽 바다의 섬 안다만으로 가는 정기여객선 갑판에서 또 만났다.

ⓒ김홍성

 

 

내 옆에 자리를 깐 청년은 영국인이고 이름은 마크였다. 종이봉투 속의 위스키를 보여 주고 한 잔 하겠냐고 물었더니 좋다는 듯 씩 웃고는 방에 가서 자기 잔을 가져 왔는데, 그것은 뚜껑이 붙어 있는 빈 필름 통이었다.

 

마크는 자기 짝이 곧 나올 거라며 미리 양해를 구했다. 나는 그때까지 마크의 짝이 누군지 몰랐다. 특별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소년처럼 천진해 보이지만 이미 서른 살이라는 마크와 대작을 시작했다.

 

두 번 째 순배가 되었을 때 마크의 짝이 나왔다. 남인도 풍의 헐렁하고 긴 통치마 위에 점퍼를 걸치고 나온 그녀는 손으로 집어 먹기 좋게 자른 치즈를 한 접시 들고 서서 나에게도 미소를 지었다.

 

좀 전에 샤워를 하고 들어간 여자, 즉 한국인 혈통일 거라고 생각한 여자였다. 내가 누군가, 제대로 예절 교육을 받은 사람 아닌가. 마크보다 먼저 일어나서 치즈 접시를 받아 들고 자리를 권했다. 그녀는 마크 옆에 앉았고, 마크는 안에 들어가서 빈 필름 통을 하나 더 들고 나왔다.

 

그녀의 이름은 조앤, 마크와는 달리 미국인이었다. 둘은 남인도 끝의 바닷가에서 처음 눈길이 스쳤다. 각자 짝이 있는 상태였다. 두 커플은 마드라스 동쪽 바다의 섬 안다만으로 가는 정기여객선 갑판에서 또 만났다. 그들 영국인 한 쌍과 미국인 한 쌍은 사흘 동안 배에서 카드놀이도 하고 기타를 치며 노래도 했다. 섬에 체류하는 동안은 물론이고 마드라스로 돌아와 이튿날 작별할 때까지 넷은 그렇게 한 팀으로 즐겁게 어울렸다.

 

보름 쯤 지난 후에 마드라스 북쪽에 있는 어떤 유명한 명상센터에서 혼자가 된 조앤과 혼자가 된 마크가 다시 만났다. 마크의 짝은 뉴델리를 통해 귀국했고, 조앤은 태국 방콕으로 가는 짝과 캘커타에서 헤어졌다고 했다.

 

마크와 조앤이 명상센터에서 함께 체류한 기간은 약 1주일, 둘 다 단조로운 생활이 지겨워서 같이 나왔다. 그들은 오릿사 주의 푸리라는 바닷가 마을에서 보름쯤 게으르게 살다가 캘커타와 다르질링을 거쳐 시킴까지 올라왔다.

 

시킴에서는 주로 욕숨에 머물다가 체류 기한 만기일이 임박하여 갱톡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합숙방 투숙객들끼리 지프를 대절하여 북쪽 국경 쪽에 다녀왔다. 국경 쪽은 곳곳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도로 사정이 안 좋고 차가 고물이라서 못 오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은 실리구리로 나가서 국경을 넘어 네팔 카트만두로 간다고 했다.

 

마크와 조앤은 욕숨에 있을 때 칸첸중가 트레킹을 시도해 보려고 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아 포기했다. 대신 날마다 산책이나 하이킹을 다녔다. 안개로 인해서 칸첸중가의 모습도 후련하게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묵은 숙소에 한국인 커플이 있어서 함께 어울렸다.

 

뚱바와 위스키도 같이 즐기고 하이킹도 몇 번 같이 했다. 이름과 생김새를 물었더니 취생과 몽사 커플이 분명했다. 조앤과 마크가 술잔으로 사용하는 두 개의 필름 통은 몽사가 준 특별한 선물이라고 했다. 작고 가볍고 뚜껑까지 있는 술잔, 때로는 찻잔으로도 사용했다는 것이다.

 

마크와 조앤은 취생과 몽사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 덕분에 무상 스님과 나에게도 특별한 호기심을 가졌던 것 같다. 나도 조앤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지만 조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은 질문은 애써 삼갔다. 성장 배경과 문화가 다른 이국인들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갑자기 족보와 혈통을 따질 수는 없었다. 그런 얘기는 조앤 스스로가 먼저 시작해야만 이어질 수 있었다.

 

취하기 전에 술을 그칠 작정이었지만 결국 취해서 일어섰다. 조앤이 혹시 혈통에 대한 말을 꺼낼 지도 모른다 싶어서 때를 기다리다보니 어느새 취했던 것이다. 두 사람을 위해 술병은 그냥 그 자리에 두고 일어섰는데 마크가 술병을 들고 따라 들어와 내 침대 밑에 놓았다. 건너편 침대의 스님은 아까 그 자세 그대로 고요히 누워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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