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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63 ] 고사

김홍성
  • 입력 2020.08.2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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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따라 놓고 잠시 묵념했다. 따라 놓은 술을 가운데 손가락에 찍어 허공에 떠도는 희미한 안개를 향해 세 번 퉁겼다. 그것으로 원혼들을 달래는 고사는 끝났다.

ⓒ김홍성 

 

 

종이봉투에 말아 준 1 리터짜리 위스키 병을 갓난애 안듯 보듬어 안고서 한 발 한 발 계단을 오를 때 '너는 어쩌다 이렇게 가증스러운 술꾼이 되었냐?' 라는 물음이 목구멍 저 밑에서 올라왔다. 물음이라기보다는 비난이나 자책에 가까웠다.

 

식당에서는 주류에 대한 정부의 면세 정책에 분노해서 술을 거부하더니 금방 술이 무슨 죄가 있냐는 핑계를 만들어 술을 사러 나갔으며, 술가게에서는 작은 위스키 병을 집어 들었다가 순식간에 변심하여 큰 병으로 바꿔들었던 것을 뉘우치는 것이기도 했다.

 

망국의 원혼들을 달래고 위로하는 데는 술만 한 것이 없지 않느냐고 변명했다. 종일 먼 길을 달려왔으니 노독을 씻어야 되지 않겠냐고 변명했다. 뚱바를 마시려고 했는데 뚱바는 어디서 파는지를 모르니 어쩔 수 없지 않으냐고 변명했다.

 

그렇게 변명을 만들면서 한 발 한 발 올라와 옥상에 발을 딛고 보니 합숙방에 드나드는 젊은 남녀들이 있었다. 단체 관광을 나갔다던 투숙객들이 돌아온 것이었다. 모두가 서양인들이었는데 그 중 한 젊은 여성의 얼굴은 십중팔구 한국인이었다. 십 촌 이내의 우리 친척 중에 누군가와 닮은 얼굴인데 그게 누군지는 생각이 안 났다.

 

침대에 술병을 내려놓고 그 여자의 음성이 들리는 쪽으로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렸을 때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여자는 반짝 미소를 지었다. 순전히 버릇일지는 몰라도 뭔지 모를 그리움과 반가움 같은 것을 감춘 미소였다. 분명히 한국인 혈통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자리에서 물어볼 수는 없었다.

 

스님은 침낭 속에서 벽을 보고 누워 있었다. 고단해서 자는 지도 몰랐다. 스님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용히 움직였다. 우선 야영용 매트리스를 침낭 밑에서 빼다가 바깥 벽 밑에 깔고 술병으로 눌러 놓았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다 보는 자리이기는 했으나 동선을 크게 방해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빛이 있는 곳은 거기뿐이었다. 다시 들어가서 침대 밑에 둔 배낭을 뒤져 술잔을 꺼내 들고 나와 앉았다.

 

망국의 원혼들을 달래는 고사를 지낼 모든 준비는 끝났으므로 마개를 비틀어서 술병을 땄다. 술을 따라 놓고 잠시 묵념했다. 따라 놓은 술을 가운데 손가락에 찍어 허공에 떠도는 희미한 안개를 향해 세 번 퉁겼다. 그것으로 원혼들을 달래는 고사는 끝났다. 이제는 가증스러운 술꾼의 목구멍을 적실 일만 남았다.

 

천천히 마셨다. 취하기 전에 그쳐야 했으므로, 취해버리면 1리터를 혼자 다 비워버릴 수도 있으므로 야금야금 핥듯이 마셨다. 캘커타에서 마셔 본 위스키보다는 품질이 좋았다. 그것보다는 부드럽게 넘어가고 향취도 좋았다.

 

합숙방에서 한 서양 청년이 나처럼 등산용 매트리스를 반으로 접어들고 나왔다. 그는 매트리스를 옆구리에 끼고 옥상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다가 결국 내 앞에 오더니 내 옆에 자기 자리를 만들어도 좋겠냐고 물었다. 왜 안 되겠나, 환영한다. 라고 말했더니 내 왼쪽 벽 밑에 길게 깔아놓고 앉아서 좋다고 웃었다. 그는 지나가는 자기 일행들을 불러서 어떠냐고 물었다.

 

누구는 히피 같다고 했고, 누구는 멍크 같다고 했다. 누구는 뿌자(고사의 힌디어)를 하는 거냐고 했다. 누구는 옆에 있는 자가 너의 구루(스승)이냐고도 했다.

 

그러는 중에 자기 담요를 가지고 나와 깔고 앉는 자도 생기더니 급기야 대여섯 명이 그렇게 각자 깔개를 준비하여 옥상에 나와 앉았다. 그 중 몇 명은 거리에 나가 마실 것과 씹을 것을 사오고 방에 들어가 자기 컵을 들고 나왔다.

 

마치 고사 뒤풀이 같은 광경이 벌어졌을 때 샤워실에서 나온 여자가 우리 앞으로 걸어오면서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인 혈통일 거라고 생각했던 그 여자였다. 내 옆에 자리 잡은 자가 그녀에게도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는 재미있다고 대답하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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