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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59 ] 말더듬이

김홍성
  • 입력 2020.08.20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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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아득해지면서 내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귓바퀴 안에서 식는 것을 느끼며 다시 의식을 잃었다.


국도를 달리던 군용 지프가 있었다. 길가에 있던 아이들 중에 하나가 갑자기 국도로 뛰어들었다. 운전병은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이미 늦었다. 아이는 머리통이 터져서 길바닥에 널브러졌다. 지서 순경이 마침 현장에 있었다. 지서 순경은 의식을 잃고 피를 철철 흘리는 아이를 안고 길가의 병원에 뛰어 들어갔다.

 

병원의 의사는 누군지 알 수 없을 만큼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침착하게 수술대 위에 누이고 퉁퉁 부어오른 아이의 얼굴과 머리를 알코올을 적신 거즈로 씻겨내기 시작했다. 아이의 얼굴이 점점 드러났다. 의사는 아이를 알아보고 집안에다 고함을 질렀다. 안에서 의사의 아내가 달려 나왔다.

 

나는 아버지가 고함치는 서슬에 놀라 잠시 의식을 회복했던 듯하다. 아버지는 함경도 사투리로 소리치고 있었다. 요컨대 이 놈을 당장 내다 버리라는 거였다. 어머니가 그 때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더 크게 고함을 질렀다.

 

“‘빨리 내다 버리라는데, 내 말이 말 같지 않소?”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아득해지면서 내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귓바퀴 안에서 식는 것을 느끼며 다시 의식을 잃었다.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고 있었더라면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다가온 아버지의 든든한 손길을 느꼈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가 못했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구나, 이제 나는 죽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의식을 잃었다.

 

군의관으로 임관하기 전에 아버지는 의과 대학 학생이면서 부산 육군병원의 문관이었다. 문관 시절에 아버지는 수술실 조수로 일했다. 아버지가 수술을 도왔던 외과 의사 중에는 두개골 파열에 의한 뇌손상에 관한 전문의도 있었다. 그 경력을 바탕으로 아버지는 옛날 시골 개인의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술을 마쳤다. 아버지는 의사로써 최선을 다 했으니 아들이 살고 죽는 것은 이제 아들놈 팔자소관이라고 말했다 한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 맨 먼저 본 것은 기뻐하는 어른들의 얼굴이었다. 옆집에서 약방을 하는 작은 아버지와 숙모, 뒷집에서 여인숙을 하는 고모와 고모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과일과 과자와 통조림들이 보였다. 좀 더 회복된 후에 거울을 보니 내 머리에는 석고 붕대가 단단하게 둘러져 투구를 쓴 것처럼 보였다.
 

의식을 잃은 아들의 머리에 석고 붕대를 두른 아버지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지프 운전병을 데리고 나가 자장면을 사주었다는 얘기를 훗날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헌병대 수사관에게는 각서도 써 주었다고 했다. 각서의 내용은, 갑자기 길에 뛰어든 내 자식이 잘못이지 그걸 미처 보지 못해서 사고를 낸 운전병은 억울하다. 내 자식이 비록 깨어나지 못하고 이대로 죽는다 하더라도 운전병에게 사고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였다고 한다.

 

내 잘못으로 차에 치었고, 최선을 다 한 아버지 덕분에 살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사고가 있고 나서부터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아버지 앞에서는 말을 더듬었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나에게 말더듬이라고 퉁망을 주었고 동생들은 내 흉내를 내며 재미있어 했다. 집요하게 말더듬이 형 흉내를 내던 아우도 얼마 후 말더듬이가 되었다. 형 흉내를 내다가 굳어진 것이었다. 동생은 곧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오랫동안 말더듬이로 살았다.

 

내 귀에는 사고 때 들었던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불현 듯 환청처럼 들려오곤 했다.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엄습했으며 이명이 들리다가 편두통이 왔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악몽을 꾸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그런 얘기를 하면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아버지에게 가서 내 말을 전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애가 허약해서 그렇다며 닭이나 한 마리 잡아 먹이라고 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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