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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51 ] 변복(變服)

김홍성
  • 입력 2020.08.1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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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복(變服)을 했을 뿐인데 천애고아로 사바세계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불안하고 무섭고 외로웠다. 군중들이 고통스러운 중생의 모습으로 저마다 지닌 후출한 보퉁이처럼 앉고 눕고 서성이는 파트나 역전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나중에 시킴에서 들은 무상 스님 얘기 중에서 몇 대목만 일찌감치 밝히는 게 낫겠다.

 

...... 혼자가 된 스님은 비하르 주의 수도 파트나로 갔다. 그곳 어느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손님들이 입다가 두고 간 옷가지들 중에 더 입어도 될 만한 것들을 세탁하여 팔고 있었다. 다리미질까지 해서 얌전하게 걸어둔 힌두 풍의 새것 같은 옷가지들도 보였지만 스님은 빨랫줄에 널어놓은 허름한 옷가지들 중에서 골랐다. 무릎을 가리는 정도의 펑펑한 반바지와 얇은 면으로 만든 헐렁한 긴 팔 티셔츠가 그것이었다.

 

방에 들어와 누군지 모를 여행자가 입었던 옷을 입고 서서 금방 벗어 놓은 동방아(간편하게 입는 짧은 두루마기)와 적삼과 바지 등 먹물 들인 겉옷들을 내려다보자니 눈물이 핑 돌았다. 출국할 때는 빳빳하게 풀을 먹여서 날아갈 듯 산뜻했던 먹물 옷들이 풀이 죽고 여기저기 닳아서 넝마처럼 보였다. 아니 구렁이가 허물을 벗어 놓은 것 같았다.

 

큰 대야에 세제를 풀어서 먹물 옷들을 푹 담가 놓았다가 빨아 널고는 그대로 둔 채로 게스트 하우스를 떠났다. 역으로 향하는 배낭 속에는 성지의 사원에서 예불할 때 동방아 위에 둘렀던 가사(袈裟)만 들어 있었다. 그 가사는 비구니계와 함께 받은 진정한 의미의 법복이었다.

 

변복(變服)을 했을 뿐인데 천애고아로 사바세계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불안하고 무섭고 외로웠다. 군중들이 고통스러운 중생의 모습으로 저마다 지닌 후출한 보퉁이처럼 앉고 눕고 서성이는 파트나 역전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기가 질리고 숨이 막혀서 주저앉을 뻔 했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먹물 입성을 걷어서 다시 걸치고 싶었다. 배낭 속에 갈무리한 가사라도 펼쳐서 두르고 싶었다.

 

5년 넘게 입었던 군복을 벗었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국가가 부여하고 통제하며 보호하는 제복을 벗고 일반 사회에 적응하는 데는 알몸으로 기는 애벌레의 고통이 따랐다. 밖에 나가기가 싫었다. 무섭고 외로웠다. 그래도 거기는 태어나서 자란 익숙한 땅이었다. 전화만 걸면 달려올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는 곳이었다. 파트나는 달랐다. 인도 전역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범죄가 많은 비하르 주의 수도가 파트나였다. 또한 주민 인구가 많은 도시였지만 아는 주민은 아무도 없었다.

 

가까스로 광장을 가로질러 건물 안으로 들어간 스님은 중음신들을 연상시키는 군중들 속에서 동양인 여행자 넷을 발견했다. 두 남자는 한국인이었고 두 여자는 일본인이었다. 그들도 스님처럼 바라나시로 간다고 했다. 순례 중에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지만 그렇게 반가운 적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바라나시가 초행이었지만 스님은 바라나시는 물론 거기서 가까운 사르나트까지 두 도반과 함께 한 순례를 통해 이미 경험한 곳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만행은 파트나 역에서 시작되었다. 스님은 그들과 일행이 된 것만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스님은 아는 소리를 일체 삼가느라고 말을 아꼈다. 대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사바세계의 희로애락을 듣는 일이 마치 어렸을 때 듣던 라디오 드라마처럼 경이로웠다. 바라나시에 도착해서 잠시 같은 숙소에 머물다가 헤어질 때까지 그들 중 아무도 스님이 승려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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