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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40 ] 가족 사진

김홍성
  • 입력 2020.08.0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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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세워 놓은 크고 작은 사진틀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흑백사진들이었다. 미쉘의 부모와 조부모, 외가의 조부모, 어린 시절의 미쉘과 요한, 그리고 짐작이 안 되는 소년. 모두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소년의 미소가 단연 돋보였다. 누가 봐도 천진하고 행복한 소년이었다.

 

비탈길을 에돌아 학교 마당으로 내려섰다. 미쉘은 거기 있었다. 인부들이 페인트칠 하는 벽을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정장 차림이었다. 무슨 모임에 다녀 온 듯 했다.

 

!”

미쉘이 반갑게 웃었다. 면도를 했는지 얼굴이 말쑥했다. 미쉘이 함께 있던 두 사람을 소개했다. 젊은 여자는 친정에 갔다던 미쉘의 아내 강가. 눈초리에 의심과 짜증을 달고 있었다. 체구가 큰 서양 남자는 미쉘의 형 요한. 형제라지만 둘이 너무 달랐다. 미쉘이 사근사근하고 순진해 보인다면 요한은 거칠고 야비해 보였다. 배다른 형제일지도 몰랐다.

 

요한은 나를 멀건이 세워 둔 채로 미쉘과 불어로 문답을 나누었다. 형사가 피의자를 심문하는 태도였다. 잠시 후 나에게도 그런 태도로 물었다. 빠른 영어였다.

 

나갈랜드에 가 봤냐? 반란군들은 꼭 너같이 생겼어. 노란 얼굴에 찢어진 눈.”

“.......”

 

잘못 들었나? 하지만 제대로 들은 게 확실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어서 말이 안 나왔다. 미쉘이 끼어들었다.

반란군 얘기는 그만 하는 게 좋겠어 형.”

미쉘의 형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미쉘의 아내 강가도 슬그머니 뒤채로 돌아갔다. 두 사람 다 나를 배격하는 게 분명했다.

괜히 왔구먼. 나는 간다. 잘 있어.”

형을 이해해 줘. . 형은 나갈랜드 내전 때문에 엄청난 재산 피해를 입어서 저래.”

“......”

 

미쉘은 내 눈치를 살피며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흔들었다.

오늘 벌써 네 알 째 먹었어. , 빈 병이지.”

미쉘은 빈 약병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내 팔을 잡아끌었다.

잠깐이라도 얘기 좀 더 하고 가.”

 

미쉘은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 어떤 문을 열었다. 널찍하지만 우중충한 사무실 같은 방인데 바닥은 마루였다. 크고 오래된 나무 책상과 헌 책들이 무질서하게 꽂혀 있는 책장이 먼저 보였다. 미쉘은 내게 팔걸이의자를 권하고 자신은 책상에 딸린 의자에 앉았다.

 

네 와이프는 친정에 갔다더니?”

나도 깜짝 놀랐어. 들어와 보니 자고 있더군. 네가 그냥 가버린 건 정말 다행이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돌아갔던 거지?”

고양이가 튀어 나온 게 불길하게 생각되었어. 그런데 광장에 올라가서는 미친개들을 만났어. 하마터면 당할 뻔했지.”

바지를 붙들고 혁대를 휘둘렀던 상황을 실연으로 보여 줬더니 미쉘은 배를 잡고 웃었다.

웃지 마, 난 심각했어.”

미안, 미안. 혁대를 휘두른 건 참 잘한 거야. 대단해.”

 

책상 위에 세워 놓은 크고 작은 사진틀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흑백사진들이었다. 미쉘의 부모와 조부모, 외가의 조부모, 어린 시절의 미쉘과 요한, 그리고 짐작이 안 되는 소년. 모두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소년의 미소가 단연 돋보였다. 누가 봐도 천진하고 행복한 소년이었다.

 

미쉘, 이 사진은 누구냐. 설마 너는 아니겠지?”

걔는 내 동생이야. 오래 전에 죽었어.”

이렇게 환하게 웃었던 소년이 죽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언제 죽었는데?”

결혼 하고 잘 살다가 죽었지. 동생의 가족사진도 있어. 보고 싶냐?”

그래.”

강가가 싫어해서 치워 놓았어.”

책상 서랍에서 꺼낸 사진틀에는 단란해 보이는 일가족이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제수가 정말 미인이구나. 지금은 어디서 사냐?”

미국.”

 

미쉘은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창 너머로 미쉘의 형이 인부들의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미쉘의 아내 강가는 그 옆 화단에서 풀을 뽑고 있었다. 미쉘은 반대편 창문을 마저 연 뒤에 양말 짬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미쉘은 담배 연기를 창밖으로 뿜었다.

식구들이 담배를 싫어하는군.”

싫어하지. 우리 아버지 빈센트 목사님을 비롯해서 우린 대대로 크리스천이다. 나도 요즘은 다시 교회에 끌려 다니고 있어. 오늘도 교회에 갔었다.”

첫 아내와 헤어진 건 언제냐?”

“20년도 넘었다.”

그럼 지금 아내와는 언제 만난 거냐?”

“4년 전.......말하자면 길어 .지금 아내는 네 번째다.”

네 번째?”

그래 네 번째……. 두 번째는 버마 여자였는데 캘커타에서 3년 살고 헤어졌어. 세 번째는 독일 여자였어. 지금 아내를 만날 때까지 여기서 함께 살았지.”

 

미쉘은 커다란 콧구멍으로 두 줄기 굵은 담배 연기를 빠르게 몇 번 뿜고서 꽁초를 창 밖 축대 위로 던졌다. 그리고는 동생네 가족사진이라고 했던 사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얘가 바로 나래. 믿어져? 얘가 나라는 게?”

 

우습다는 건지, 화난다는 건지 알 수 없는 웃음 끝에 미쉘이 입을 열었다.

 

미쉘의 첫 아내는 프랑스 여자였다. 미국에 가서 재혼했다. 아들은 3년 전까지는 상선의 선원이었다. 작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이 왔다. 딸은 어머니와 미국에서 살면서 대학을 다녔는데 작년부터 소식이 끊어졌다.

헤어진 지 너무 오래 됐어. 이제는 이 사진 속에서 만나야 서로를 알아 볼 거야.”

“......”

 

우울한 얘기가 길어지는 것이 싫었다. 그만 가 보겠다고 말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미쉘은 형이 퇴근하면 같이 나가서 한 잔 하자고 붙들었다.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고, 다음날 일찍 시킴으로 떠나야 한다고 대답했다.

 

마당으로 나왔다. 작별하기 직전에 미쉘이 어느 호텔에 머무느냐고 물었다. 숙소 이름을 말하면 찾아 올 것 같아서 그냥 게스트하우스라고만 대답했다. 미쉘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시킴에서 돌아오면 바로 자기한테 오라고 했다. 내 방을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하면서 무료라고 덧붙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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