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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27 ] 낙원

김홍성
  • 입력 2020.07.19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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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어 주고, 화장실 문도 열어 주고, 그녀 스스로 반바지를 내리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곧 주저앉을 듯이 상체를 흔들고 있었다.

 

이미 말했던가? 캘커타에서 지냈던 1월은 취생몽사의 나날이었다고? 자세한 얘기는 안 했던 것 같다. 날마다 호텔 마리아의 옥상에서 아침까지 마셨다는 얘기는 했지만 어느 날 새벽에 여자의 방 화장실에 따라 들어갔던 얘기는 안 했다. 그런 얘기를 할 때 나는 그가 된다. 비겁하지만 그가 되지 않고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없다.

 

여자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면서 일어서려는 몸짓을 하다가 주저앉곤 했다. 일어서지를 못했던 것이다. 주변의 누구도 그녀를 돕지 못했다. 그들 혹은 그녀들은 낄낄낄 웃기만 했다. 모두 만취했기 때문이다.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있었던 그가 일어섰다. 그도 취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정신은 있었다. 그녀는 잘 걷지도 못했다. 그는 그녀가 걸을 수 있도록 부축했다.

 

옥상의 공동 화장실은 진작부터 폐쇄되어 있었다. 각자 자기 방의 화장실을 쓰거나 아래층 로비의 화장실을 써야 했다. 로비까지 내려갈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의 방이나 그의 방, 둘 중 어느 하나에 있는 화장실을 써야 했다.

 

그녀의 방은 옥상 밑에 있었고 그의 방은 한 층 더 밑이었다. 그녀의 방 앞에 이르자 그녀가 목에 목걸이처럼 걸고 있던 방 열쇠를 조금 들어 보였다. 그녀의 목에서 그것을 벗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의 목이 자꾸 꺾였기 때문이다.

 

문을 열어 주고, 화장실 문도 열어 주고, 그녀 스스로 반바지를 내리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곧 주저앉을 듯이 상체를 흔들고 있었다. 그가 도와야 했다. 반바지 허리를 여민 쇠단추를 제치고, 지퍼를 내렸다. 팬티가 보였다. 팬티와 함께 바지를 내리려고 팬티의 고무줄에 손가락을 찌른 순간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이때껏 그의 목에 둘렀던 팔을 급히 거두어 떠밀며 '동작 그만 개새끼야'라고 소리쳤고, 이어서 '차렷 개새끼야' 라고 소리 질렀다.

 

그는 술이 확 깨는 것을 느끼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무엇에 홀린 듯 돌아서서 조용히 나왔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옥상으로 올라가면서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생각했다. 동작 그만이나 차렷은 군대 용어 아닌가? 수십 년 전 졸병 생활 3년 동안 그토록 군대식 명령어에 세뇌되었던 건가?

 

옥상에 올라서 보니 동이 트고 있었다. 산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일망무제의 평야, 그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맞이하며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묘한 안도감과 쾌감이 따랐다.

 

옥상의 남조선 술꾼들 몇몇은 상체가 꺾였거나 드러누워 있었고 몇몇은 서로에게 기대거나 포개져 있었다. 그들 중에 아무도 그가 여자를 데리고 화장실에 갔다가 혼자 올라왔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가 그 여자를 폭행하고 살해했다 하더라도 그들 남조선 동포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낙원을 찾아서 캘커타에 왔고 그들만의 낙원에서 취생몽사하고 있었다. 거기엔 일탈, 탈피, 망각, 치유, 향수, 감격, 쾌락, 자유, 평화, 만족이 있었다. 그러나 술이 깨고 혼자 남으면 극심한 불안만이 남았다. 그들은 다시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날마다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동작 그만 개새끼야, 차렷 개새끼야……라고 명령했던 그녀는 다음 날 아무도 몰래 어디론가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말은 마리아 호텔 옥상의 남조선 술꾼들 사이에서 한동안 회자되었다. 그는 입이 쌌다. 맨 정신에는 입안에서만 맴돌던 말들이 술이 취하면 취할수록 질질질 천박하게 새나왔다. 그게 그의 고질병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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