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장준하 의문사 사건 조사관 고상만'의 포천 약사봉 현장 강연

김홍성
  • 입력 2020.06.22 12:05
  • 수정 2020.06.22 23:4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준하 의문사 사건(張俊河疑問死事件)은 1975년 8월 17일,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 장준하가 경기도 포천시 약사봉에서 수상쩍은 정황 하에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유신정권은 하산 도중 실족사로 발표했으나, 사건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1993년 민주당 진상조사위원회,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재조사했지만 아직까지 타살 여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위키백과에서 발췌)

2020년 6월 20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포천 약사봉 밑에서 '장준하 의문사'에 관한 초청 강연이 있었다. 100분 동안 이어진 이 강연에 초청된 강사는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 조사관으로 장준하 의문사를 조사한 인권운동가 고상만 씨.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군인권포럼 위원인 그는 2012년에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판한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의 저자이다. (맨 아래 책 소개 사진 있음)

강연은 경기도의 후원으로 포천교육문화 사회적협동조합(이사장 김준권)에서 진행한 민주시민 교육 2020년 상반기 5강 중에서 제3강이었다(포스터 사진 있음). 포천교육문화 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들을 포함한 30 여명의 수강생들은 강연이 끝난 현장에서 고인의 영전에 간소한 제물을 올리고 묵념했다.

장준하는 3선 개헌 반대 투쟁 및 유신 헌법 개정 운동으로 1974년 1월 13일 구속되었고, 같은 해 12월 3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개헌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앙정보부는 장준하에 대하여 24시간 자택 전화 감청 및 미행, 감시 등 지속적인 관찰을 하고 있었는데, 장준하는 1975년 8월 20일 경 '제2의 100만인 개헌 서명 운동'이라는 거사를 추진하던 중 거사예정일을 불과 3일 앞둔 1975년 8월 17일 약사봉 등반 도중 사망하였다.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299쪽 '소수의견'에서 발췌)     

의문사위는 창설 이래 장준하 사건에 관련된 정보 공안 기관에 대하여 장준하와 그에 관련된 당파나 인사, 가족에 대한 사찰 감시나 기타 공작에 대한 기록을 공개하고 제공할 것을 일관되게 요청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새삼스러운 지적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거부되어왔다. 
여기서 문제는 관계기관의 장준하 사찰 등 제반 행위는 정치공작으로 관계기관 본래의 업무영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사안에 따라서는 정치공작으로서 범죄행위이고, 민사상 불법행위이다. 따라서 그들은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이른바 국가기관이라면서 정당한 정치활동에 대한 탄압을 일상적으로 자행해 온 것을 우선 사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나라 이 정부 기관은 박정희나 그 후속부류의 사유물이 아니다. 공직자는 공직을 사유할 수 없다. (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307쪽 '소수의견'에서 발췌)

장준하에 대한 정치 공작에 관련된 기관의 정식 직원 이외에 에이전트 또는 프락치(망원), 밀고자나 하수인 등이 있다. 이들에 대한 신상공개는 하나도 없다. 그들의 신상만 확인이 된다면 장준하 사건의 실마리는 풀리고 나아가서 살해에 직간접으로 가담, 조력하거나 책임질 자들을 밝혀내는 데 증거가 잡힐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일관되게 국가안보 또는 개인의 인격권 보호 등을 이유로 내세워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 _중략_ 더욱 더 큰 문제는 장준하의 일상 동정이 각 기관에 의해서 시간 시간 기록되고 보고되고 있었는데, 어째서 사망 당일에는 그렇지 않고 기록이 다른 문건으로 바꿔치기되거나 빠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각 정보 공안 기관에는 당시에 박정희에 대해 반대한 야당 거물인 장준하를 전담하는 팀과 책임자들이 엄연히 있어서 활동을 해왔는데 그들의 신상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가. 김대중 납치 살해 미수 사건에서는 지금 그 공작 팀의 책임 실무부서가 거의 공개적으로 인지되고 있다. 
그런데 장준하 사망사건에서는 그 정체가 잘 잡히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반드시 비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비밀로 미궁 속으로 덮어야만 이익이 되는 자는 누구인가. 비밀이 궁극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제기 이전에 이것은 공적 기관이 책임을 지고 반드시 규명되어야 할 사안이다. 
장준하 사망을 추락사로 가정하여 사망을 타살이 아닌 실족사로 몰아간 것이 사망 직후부터의 관계당국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컴퓨터 시물레이션 기법을 통해 그의 억지 주장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당초부터 실족사했다고 하고 그것을 발견했다는 김용환의 주장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 장준하 사망 당시의 관계 당국의 사건 처리 과정도 모순투성이였다.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307~308 쪽, '인정 의견에 대한 보충 의견 : 한상범'에서 발췌)

이제 2004년 시간 종료로 인해 강제로 문이 닫힌 의문사위원회가 다시 문을 열 시간이 되었다. 두 가지 남은 숙제 중 묘지 이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장준하의 유골의혹은 이제 국가 차원의 재조사를 통해 법의학적 분석을 거치면 그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숙제는 하나다. (중략) 의문사위원회 조사관들이 직접 정보기관의 문서고를 실지조사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이 담긴 새로운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조속히 만들어져야 한다. (중략) 자신이 타살되었음을 밝혀줄 중요한 열쇠를 37년만에 드러내 준 장준하 선생. 이제 남은 것은 '살아있는 우리의 몫'이다.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311~312 쪽 에필로그에서 발췌) 

법의학적 분석은 2012년 당시 유족의 요청에 의해서 유골을 육안 검시한 이윤성 서울대 의대 교수(법의학교실)가격에 의한 것인지 또는 넘어지거나 추락하면서 부딪혀 생긴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고 했고, 법의학 분야에서 권위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꼽히는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법의학교실)"추락이 아니라 가격(에 의한 골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강연 현장. 장준하 선생의 시신을 발견한 벼랑에서 300백 미터 아래 개울가. 사망 당일 시신을 옮겨 놓은 이곳은 현장 강연 및 추모 장소이기도 하다.       

 

인권운동가 고상만 씨.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였던 2003년 7월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에서 장준하 의문사를 전담한 조사관이었다. 

 

포천교육사회적협동조합(이사장 김준권) 조합원들과 포천 각지에서 찾아온 수강생들이 현장에서 장준하 선생의 영전에 제물을 올리고 묵념했다.

 

장준하 선생 사망 이듬해인 1976년, 시신이 발견된 바위 벼랑 오른쪽에 붙인 불망비.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국민을 보호해야할 국가는. 그러자면 불행했던 시대의 문제들은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 진실을 밝히고 책임질 것은 책임진 후 미래로 가자고 해야지, 미래를 위해 과거사를 역사에 맡기자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는 껄끄러운 과거사 문제만 나오면 역사에 맡기자고 한다. 역사는 그런 문제들을 맡아주는 전당포가 아니다.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13쪽 명진 스님 추천사에서 발췌)     

 

인권운동가 고상만 씨와 포천교육문화 사회적협동조합 운영위원들이 장준하 선생이 실족사했다는 벼랑을 올려다 보고 있다.

 

묵념 후 기념 사진을 찍는 사람들 뒤에 이 장소가 장준하 의문사 유적지 임을 알리기 위해 설치한 하얀 말뚝이 서있다. 이 말뚝에는 <장준하 선생님 원통히 숨지신 곳>이라고 적혀 있다.  

 

하산. 앞에서 걷는 분이 인권운동가 고상만 씨.  

 

박정희가 혈서를 써 친일 군인이 되었다면 장준하 선생은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다. 6,000리를 걸어 중경 임시정부에 들어가 독립군이 되었다. 장준하 선생은 말하지 않아도 박정희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정권 아래서 스물일곱 차례 연행되었고아홉번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12쪽 명진스님 추천사에서 발췌)    

 

진실한 삶, 올바른 삶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리고 있는, 숨기고 있는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면 된다. 검은 구름 흩어지면 달이 저절로 드러나듯 진실을 드러내면 그것이 바로 정의가 되고, 올바름이 되고, 이 세상의 희망이 되는 것이다.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13쪽 명진 스님 추천사에서 발췌)

 

코로나 19 방역 문제로 민주시민 교육의 실내 강연은 25명으로 제한했다. 

 

장준하 의문 사건 현장으로 가는 길에 포천시에서 설치한 안내판.   

 

고상만 선생이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을 끝내면서 국가기록원에 넘긴 자료는 무려 2만여 쪽 분량의 종이 문서와 상당량의 동영상 테이프 등이 있었다. 그가 얼마나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를 조사해 왔는지를 말해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해 온 방대한 양도 양이려니와 핵심 쟁점에 대한 정리도 사실은 간단치 않다. 더욱이 그 자료가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것이고, 설령 접근한다 해도 그 방대한 양의 핵심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고상만 선생은 바로 그 불가능한 일들을 이 책을 통해 해주었다.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8쪽 정연주 추천사에서 발췌)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