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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평론가 기영노 콩트 116] 스포츠계의 달인들 11 - 1986년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

기영노 전문 기자
  • 입력 2020.05.0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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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피아>는 국내 최초의 스포츠 칼럼니스트, 기영노 기자의 ‘스포츠 평론가 기영노의 콩트’를 연재합니다. 100% 상상력을 바탕으로 쓴 기영노 콩트는 축구, 테니스, 야구 등 각 스포츠 규칙을 콩트 형식을 빌려 쉽고 재미있게 풀어쓰는 연재입니다. 기영노 기자는 월간 <베이스볼>, <민주일보>, <일요신문>에서 스포츠 전문 기자 생활을 했으며 1982년부터 스포츠 평론가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야구가 야단법석』, 『재미있는 스포츠 이야기』 등 30여 권이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임춘애 선수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여자 육상 중거리 800m, 1500m 그리고 3000m를 모두 석권한 것은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나오기 어려운 대기록이다.

중(中)거리에 해당되는 800m와 1500m 까지 2연패를 하거나, 장(長)거리인 3000m와 그 절반을 달리는 1500m 2관왕은 가능하지만 중장거리 종목인 800m 1500m 그리고 장거리 종목인 3000m 3종목을 모두 석권하는 선수는 좀처럼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1986년 9월30일 오후 3시 잠실 메인스타디움.

임춘애는 자신의 취약종목인 800m에서 김번일 코치의 지시대로 중국의 양 리우샤는 잡았지만 아시아 최고의 기록을 갖고 있던 인도의 쿠리신칼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임춘애는 쿠리신칼에 이어 2위로 골인, 은메달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큰 이변이 일어났다. 쿠리신칼 선수가 초등학교 육상선수도 하지 않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1985년 9월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벌어진 제6회 아시아육상 선수권대회 여자 8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던 쿠리신칼 선수가 왜 남의 코스를 침범했는지는 지금도 미스테리하다.

지난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10,000m 레이스에서 세계최강 네덜란드의 크레이머가 금메달 기록으로 골인을 하고도 코스를 침범하는 바람에 실격을 당해 이승훈 선수가 어부지리로 금메달을 딴 것과 흡사한 경우다.

아무튼 쿠리신칼은 800m의 경우 출발 이후 120m 지점을 지나야 자신의 코스 즉 세퍼레이트 코스를 벗어나 오픈 코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규정을 어기고 120m 지점 이전에 오픈 코스로 접어든 것이 적발되어서 금메달이 박탈되고 은메달에 그친 임춘애가 금메달을 차지한 것이다.

임춘애는 자신의 취약종목인 800m에서 행운의 금메달을 따자 주 종목인 1500m에서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

10월 3일 오후 2시 여자 1500m 결승전이 벌어졌다.

임춘애는 처음부터 자신 있는 레이스를 전개하다가 4분21초38의 호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해 2관왕에 올랐다.

임춘애는 “800m에서는 다른 선수의 실수로 금메달을 땄지만, 1500m에서 내 실력으로 금메달을 차지해서 더욱 기뻐요”라고 소감을 밝혔다.

2관왕에 오른 다음날인 10월 4일 오후 3시30분.

임춘애는 1500m와 함께 2관왕을 노렸던 부종목인 3000m에 출전했다.

여자 3000m 레이스를 앞두고 아시안게임 개최국 한국 뿐 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가냘픈 17세 한국 소녀가 이미 800m와 1500m를 제패하고, 이제 3000m까지 석권 3관왕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000m에서도 임춘애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침착한 레이스를 벌였다.

처음부터 선두로 나서지 않고 선두권 선수들 바짝 뒤에서 달렸다.

3000m는 400m 트랙을 7바퀴 반을 도는 비교적 장거리다.

임춘애는 베테랑 중공(당시 중국을 중공으로 불렀다)의 장시우윤을 2900m 지점까지 뒤로 쫒아 가다가 골 인 지점 100m 정도를 남겨 놓고 스퍼트, 결국 장시우윤을 제치고 9분11초92의 호기록으로 1위로 골인, 대회 3관왕에 성공했다.

임춘애의 육상 중장거리 3관왕은 이전 아시안게임에도 없었고, 앞으로 아시안게임에서도 당분간 나오지 않을 대기록이다.

그러나 임춘애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 출전하지 못할 뻔 했었다.

임춘애는 아시안게임을 5개월 앞두고 1986년 5월에 치러진 ‘86 아시안게임 육상 최종 선발전’에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달 후에 열린 전국체육대회에는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 여고 3000m에서 종전 한국기록을 약 5초가량 단축한 9분21초69의 놀라운 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 기록은 아시안게임에 동메달 이상을 차지할 수 있는 좋은 기록이었다.

임춘애는 3일 후에 치러진 10,000m와 1600m 계주에서 잇따라 우승을 차지해 전국 체전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당시 대한육상 경기 연맹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육상에서 금메달을 자신할 수 있던 종목은 남자 육상 200m의 장재근 한 개뿐이어서 ‘육상 신델렐라’ 임춘애의 출현은 그야말로 가뭄 끝에 단비였다.

그러나 대표 선발에는 원칙이 있다.

아무리 기록이 좋고 뛰어난 선수라도 아시안게임 대표 최종 선발전에 나오지 않은 선수를 아시안게임 대표로 뽑을 수는 없었다.

대한육상연맹이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7월26일과 27일 이틀 동안에 열린 비호기 육상경기 대회에서 임춘애는 1500m에서 4분19초85의 한국신기록을 세웠고, 800m에서도 2분7초42로 대회 신기록을 경신했다.

이제 임춘애는 한국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정상권 선수라는 것이 기록으로 입증되었다.

그 와중에 임춘애가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하지 않은 것이 임춘애 자신 때문이 아니라 경기도가 임춘애를 전국체전에 출전시키기 위해, 일부러 아시안게임 최종 예선에 내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임춘애를 아시안게임 최종 선발전에 내보내지 않았다 해서 경기도 육상연맹 전무이사가 이미 징계를 당한 상태였다.

오랫동안 고민을 해 오던 대한육상연맹은 아시안게임을 2개월 여 앞둔 7월 30일, 임춘애를 아시안게임 대표로 선발했고, 대한체육회 경기력 향상위원회도 이를 추인했다.

아시안게임 3관왕 임춘애 선수의 별명은 '라면 소녀.' 항간의 오해와 달리 후일 인터뷰에서 그녀는 라면만 먹고 뛴 게 아니라 당시 체력 보강을 위해 도가니탕과 삼계탕은 물론 뱀탕까지 먹었다고 밝혔다(사진= 국가기록원).
아시안게임 3관왕 임춘애 선수의 별명은 '라면 소녀.' 항간의 오해와 달리 후일 인터뷰에서 그녀는 라면만 먹고 뛴 게 아니라 당시 체력 보강을 위해 도가니탕과 삼계탕은 물론 뱀탕까지 먹었다고 밝혔다(사진= 국가기록원).

가상 인터뷰-

미디어 ;만약 대한육상연맹이 원칙대로 임춘애 선수를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 출전시키지 않았다면?

임춘애 ; 오늘날의 나는 없었다. 나의 수준은 아시안게임에서는 정상권이었지만 올림픽(세계 육상선수권 대회)에서는 메달을 따기 어려운 기록이었기 때문이었다.

미디어 ; 800m에서 쿠리신칼 선수의 실격 덕을 봤는데.

임춘애 ; 그래서 영웅이 탄생하려면 실력과 함께 운이 따라 주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미디어 ; 영웅?

임춘애 ; 내가 방금 영웅이라고 했나? 아시아의 영웅!!!

만약에-

임춘애가 아시안게임 3관왕에 오르자 “라면을 먹고 훈련을 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나 라면을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라면이 (육상부)주식이 아니라 간식이었다.

만약 라면이 주식이었다면 절대로 좋은 기록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임춘애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직후에 열린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자신의 주 종목인 1500m 등에서 모두 예선 탈락을 했는데, 아시아와 세계의 육상 기록이 차이가 났을 뿐만 아니라 비과학적 훈련(당시에는 코치가 상습적으로 매를 들었다)의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었다.

※ 기영노의 스포츠 콩트는 100%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픽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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