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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신사(97) - 그 여자의 낮과 밤

서석훈
  • 입력 2012.03.17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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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창(소설가, 시인)
불같은 사랑을 한 여인을 알고 있다.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였으며 대기업 임원의 아내였다. 40대 초반의 그녀는 남편의 이른 출세에 동창생들보다 일찌감치 앞서가는 삶을 살았다. 강남 33평 자가 아파트에 억대의 주식펀드, 그리고 남편 명의의 골프 회원권과 남편과 그녀 이름으론 된 두 대의 자동차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년에 한번은 남편을 따라 해외여행을 갔고 전무 사모님을 회장으로 둔 임원 부인들 소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졌다. 남편이 거래처로부터 받아온 오페라 초대권으로 문화적인 욕구를 간간이 충족시키며 이론적인 배경을 강화하기 위해 문화센터에 나가 이 시대의 예술 특히 회화에 대해 식견을 쌓았다. 그 와중에 자식들의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지속적인 투자를 해왔다. 물론 시댁이나 친정 행사에도 빠지지 않고 동서 간에도 우애를 유지해왔다. 필요하면 금전적으로 작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녀는 직업이 없으면서도 바빴고 그녀가 바쁘지 않으면 이 사회가 잘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모두가 의미 있는 행동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모든 것이 시들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치킨 한 마리를 살까 해서 밤늦게 동네 호프집에 갔다가 그녀 또래 여자들의 건강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녀들은 떠들어대며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고 테이블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나무리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했다. 그녀들은 남편 흉을 보며 웃고 돈이 없어 쩔쩔맨 애기를 하며 웃었고 아무 얘기나 하면서도 또 웃었다. 그녀들은 서민들이었고 옷차림도 꾸민다고 꾸민 게 그 모양인 하류 인생들이었다. 그런데 그녀들은 왜 저렇게 웃고 있는가? 평상시에 그녀들은 걸핏하면 돈 걱정을 하며 한숨 쉬지만 저런 호프 자리라도 마련되면 그거나마 행복이라고 저렇듯 자지러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녀들과 달리 돈 걱정 따윈 없이 평소엔 온갖 예의와 고상과 우아를 떨다가 혼자 남으면 알 수 없는 외로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 되었나? 그녀의 동창들도 대기업 중역 사모님이 된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동창들 몇은 꼴에 바람을 피운다고 남편 몰래 싸돌아 다닌다. 그녀들이 바람을 피워 봐야 과연 뭘 어떻게 하겠는가? 돈이 없으니 돈 많은 늙은 남자를 만나든가, 아니며 같은 가난뱅이끼리 궁상을 떨며 가난한 행각을 하겠지. 누가 봐도 조잡한 연애가 아닌가?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가난한 연애가 낭만적이고 순순해 보이지만 현실은 어디 그런가? 돈이 있으면 분위기가 묻어오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로맨스가 이루어지고 로맨스는 또 사랑이 되는 거지.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진실을 목도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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