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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풍경 모음 1

최진규 작가
  • 입력 2019.07.09 10:06
  • 수정 2019.09.28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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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운대 앵벌이

백운대 오르는 길
백운대 오르는 길

 

청설모를 찾을 수 없어 대신 올리는 청설모 사진입니다.
청설모를 찾을 수 없어 대신 올리는 청설모 사진입니다.
음식을 얻어먹고 떠나는 삼색 고양이
음식을 얻어먹고 떠나는 삼색 고양이

  아주 오래 전이다. 그날도 직장에서 퇴근하자마자 북한산으로 달려갔다. 하지(夏至)가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저녁 시간이었지만 한낮처럼 밝았다. 백운대 꼭대기에 섰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800 고지인데다가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더위는커녕 한기마저 느껴졌다.

  정상 바위에서 내려서자마자, 나를 향해 급하게 달려오는 청설모 한 마리가 보였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바위덩어리 산꼭대기에 웬 청설모? 처음에는 짐승들도 정신이 나갈 때가 있는가 보다 하면서, 흥미거리로만 보아 넘기려 했다. 그러나 내 발 바로 밑까지 온 놈의 상태를 보는 순간, 아! 하는 탄식이 나왔다. 청설모의 앞발 하나가 으깨져 있었던 것이다. 저 상태로는 스스로 먹이를 구할 수 없을 게 확실해 보이는 심각한 부상이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 다니며 먹이 활동을 하고, 먹이를 두 발로 모아 먹는 습성을 가진 청설모가 앞발 하나를 못 쓴다면, 이는 곧 사망선고나 진배없을 터였다. 이 청설모도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글렀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백운대까지 올라와 던져주는 음식을 얻어먹고 살기로 한 모양이었다. 제법 꾀가 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왜 하필 바위밖에 없는 산꼭대기를 골랐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청설모의 행동이 유별났다. 본래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무척 많은 짐승인데, 제 발로 내 앞에 와서, 먹이를 달라며 생떼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도 아니었다. 녀석은 필사적으로 내 발에 매달리려 했다. 나는 발가락이 드러나는 산악샌들을 신고 있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녀석이 발을 깨물 수도 있겠다 싶어 두 발을 동동 구르며 녀석을 떼어내려 했다. 그때마다 녀석은 잠시 물러났다가 또 달려들었다. 일종의 협박처럼 보였다. ‘빨리 내게 먹이를 줘!’ 정말 죽을 만큼 배가 고팠는지도 모르겠다. 메고 있던 배낭을 뒤졌다. 간식으로 먹고 미처 버리지 못한 빈 빵봉지가 있었다. 빵부스러기를 탈탈 털어 청설모 앞에 뿌렸다. 몇 미터 차이지만 정상 바로 아래는 바람 세기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청설모는 다친 앞발을 오그리고 세 발로만 지탱한 채, 바람에 날려가지 않고 떨어진 마른 빵 가루를 핥아 먹었다. 어디 먹은 것 같기나 했겠는가?  다시 내 발로 덤벼들었다. ‘더 내놔! 배고파 죽겠단 말이야!’ 청설모의 절박한 호소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별 수가 없었다. 나는 간신히 청설모를 떼어낸 다음 하산길을 재촉했다. 뒤를 돌아보았다. 두 발로 선 채 두리번거리던 청설모가 황급하게 바위 아래로 숨고 있었다. 시간상으로 내가 그날 배고픈 청설모가 만난 마지막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도 백운대를 올라 다녔지만 앵벌이 청설모는 보이지 않았다.

  한 달 전쯤 올라간 백운대에서는 털이 더러운 흰색 고양이 한 마리가 앵벌이 짓을 하고 있었다. 특유의 날랜 몸으로 정상과 그 아래에 있는 백운산장을 거뜬히 오가며 살아가는 것 같았다.  청설모 사진을 찍으려고 온 산을 헤맸지만 매번 허탕을 치던 나는, 도봉산 입구에서 국립공원 직원을 만나 청설모 실종에 대한 대화를 간단하게 나눈 적이 있었다. 내가 인간들의 도토리 싹쓸이를 원인으로 꼽았더니, 그는 산에 고양이들이 많아진 것도 무시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백운대까지 접수할 정도로 적응을 잘한 고양이들 때문일까? 청설모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되었다

   한쪽에서는 산으로 올라온 고양이들이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이므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산으로 쫓겨 온 고양이들을 다시 매몰차게 몰아내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한다. 국립공원 측에서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자는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는데, 어떤 이들은 사료를 싸 들고 와서 고양이에게 먹이를 공급하고 있다. 이러는 사이 고양이들은 나름대로 산속에서 살아남을 생존 전략을 터득했다. 자기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용케 알아보고 피하지만, 내치지 않는 이들이 음식을 먹고 있으면 애절한 울음소리로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눈에 잘 띄는 곳에 얌전히 앉아서 은덕을 베풀기만 기다렸다. 등산객들이 식사를 많이 하는 장소에 가면 이런 고양이들이 상주하고 있다. 이 가운데 영양 상태가 괜찮은 놈들은 짝짓기를 하여 새끼 고양이들을 낳을 것이고, 강한 새끼는 살아남아 어미에게 구걸 방법을 학습 받으며 대를 이어 나갈 거라는 예상은 상식이었다.

  나는 오늘도 산에서 앵벌이하는 삼색 고양이를 보았다. 이놈은 식사를 하는 등산객들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기다리는 작전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등산객이 흘끔 자기를 쳐다보면 짧게 울었는데, 그 애틋함이 여간 아니었다. 그러자 곧바로 음식이 날아왔다. 개나 고양이들이 인간에게 최면을 건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할 정도로 사람의 행동이 즉각적이었다. 얻어먹을 것 다 얻어먹은 고양이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가까운 곳에서 새끼 고양이가 울고 있었다. 삼색 고양이의 99%가 암컷이라는 글을 어느 과학 잡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이 고양이가 새끼의 어미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 나는 도봉산에서 청설모 찾기를 포기했다. 이러다가 고양이들이 청설모나 다람쥐 대신 이 산의 고유종으로 자리매김하는 날이 언젠가 오지 않을까?

 

                                                   얀마

백구
백구

  며칠 안 보이던 작은 회사 백구가 나타났다. 내심 걱정하던 있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녀석과 적극적으로 사귀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아직도 살아있음에 대해 안도하며 반가운 표정만 지었다. 여전히 백구는 나를 본 척도 안 했다. 텃밭 순둥이를 물어 죽인 흉악한 개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채운 여러 떠돌이 개들 중 한 마리였던 이 녀석은 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무관심했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만 존재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백구는 등산객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회사 문 앞에 서서, 눈을 먼 데다 두고 멍 때리고 있을 때가 많았다. 누가 자기 곁을 지나가도 그 자리에 가만히 있거나 살짝 물러나면 그뿐이었다. 겁을 먹지도 않고 주변을 경계하지도 않았다. 녀석은 짖지도 않았고 꼬리를 흔들지도 않았다. 한결같이 무덤덤했다. 녀석은 나처럼 산을 좋아했다.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듯이 혼자 산속을 돌아다니는 녀석에게 ‘자유로운 영혼’, ‘무심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하지만 정작 녀석이 앞에 보이면 ‘야, 인마’를 줄여서 ‘얀마’라고 불렀다.

  하루는, 아! 글쎄 이 백구가 내가 사는 아파트, 그것도 10층이나 되는 현관 앞까지 올라온 적이 있었다. 왜 이곳까지 올라왔는지, 어떻게 올라 왔는지 그리고 하필 내가 사는 집 앞에 올라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현관문을 열었더니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서성거린다? 만약 다른 집 앞이었다면 119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는 등, 난리를 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녀석은 계단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을 텐데도 다시 계단으로 내려갈 생각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도 가도 못하는 녀석치고는 너무도 태연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여기에 있네요’. 하는 듯하여 황당하기까지 했다. ‘얀마!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내가 가볍게 나무라자, 녀석은 살짝 끙끙거렸다. 도움 요청이었다. 먼저 엘리베이터에 탄 다음, 녀석에게 손짓을 했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냉큼 들어왔다. 아파트 입구까지 내가 앞장섰고 녀석은 순순히 내 뒤를 따랐다. 녀석이 사는 작은 회사는 산 바로 밑에 있었기 때문에, 동네를 거쳐 가든지, 텃밭 뒤로 돌아 산길로 가든지 하면 되었다. 나는 산 쪽으로 녀석을 유도했다. 녀석은 말 잘 듣는 애완견처럼 무사태평한 짓을 골고루 하면서 내 뒤를 쫓아왔다. 산 입구에 서서 ‘이제 가라!’ 한 마디 했다. 녀석은 나라는 존재를 처음부터 몰랐다는 듯이 시크하게 나를 지나쳐 산길로 올라갔다.

  백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 해 겨울에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고 있을 때였다. 처음에는 산에 돌아다니는 유기견인가 보다 하였다. 하지만 그 녀석이 맞았다. 역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라는 존재를 아예 무시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면서도 내 주위를 한사코 떠나지 않았다. 길을 벗어나 눈이 쌓인 산비탈을 여기저기 마구 다니다가도 다시 내 쪽으로 달려오곤 했다. 그렇게 함께 걷고 있는데, 옆 골짜기 아래에서 대형견 크기의 멧돼지 한 마리가 주둥이로 눈 속을 파헤치며 먹을 걸 찾고 있었다. 나와의 거리가 이십 미터 이상 떨어진 아래쪽이라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멧돼지도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세상만사 그 어느 것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굴던 백구는 멧돼지만큼은 예외였던 모양이다. 녀석에게도 이처럼 맹렬한 호기심을 보일 때가 있었나 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멧돼지에게 덤벼들지는 않았다. 빠르게 멧돼지 주변만 뛰어 다녔다. 그러거나 말거나 멧돼지는 눈밭만 파헤쳤다. 멧돼지를 구경하는 나, 멧돼지 근처를 맴도는 개, 아무런 동요 없이 먹이 찾기에만 골몰하는 멧돼지! 언뜻 보면 평화로운 공존의 한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안전지대에 있다는 생각에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고, 공격본능을 상실한 백구는 물색 모르고 뛰고 있을 따름이며, 멧돼지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먹이 말고는 눈에 보이는 게 없어 저러고 있는 거라 판단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과는 너무 딴판이라서 그게 더 이상했다. 나는 낮게 소리를 내어 녀석을 불렀다. 백구는 이내 멧돼지를 포기하고 내 곁으로 달려왔다. 산을 다 내려와서는 목이 말랐는지 얼어붙은 계곡 바닥을 핥았다. 나는 얼음을 깨서 물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것으로 녀석과 나와의 만남은 끝이었다.

  봄이 찾아왔다. 처음 보는 개가 엉덩이와 몸 여기저기에 파란 잉크 같은 약을 잔뜩 바른 채로 작은 회사 안팎을 돌아다녔다. 그런 식으로 작은 회사 개들은, 순둥이를 죽였던 늙은 암캐가 대략 이 년 정도 살았던 것 빼고는, 길어야 일 년, 짧으면 반 년 단위로 바뀌었다. 그렇게 교체된 개는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대여섯 마리는 족히 되었다.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를 일이었다. 정확한 사실을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혹시, 그 회사 상무라는 사람이 떠돌아다니는 개가 나타나면 먹을 것을 주고 잘 보살펴 주기는 하는데, 그 시간이 1년 내지 6개월 단위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너희들에게 베푸는 나의 자비는 시한부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온갖 호의를 베풀며 자유롭게 살도록 키우다가 없애고, 새로운 떠돌이 개가 나타나면 정성껏 돌보다가 갈아치우고 한다는 괴상야릇한 애견 취미를 가진 자? 이런 엽기적인 상상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러나 피부병 약을 바른 그 개도 몇 개월 뒤에는 안 보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요즘 회사 근처를 지나다 보면 창고로 보이는 건물 안에서 신경질적으로 짖는 개소리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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