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에서 만나지 못할 사람은 없다 흰색으로 된 파이프로길 끝자락에서 무척이나 많이 맞았다고내 어린 소년이 자랑했다 다 맞으면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며,우리는 축하의 의미로 짜장면을 먹었고먹다 남은 단무지로 멍을 지웠다 아이들은 손으로 혓바닥을 가리키며 날 찾아다녔다다리에 곰팡이가 피었다옆집 할아버지가 잠든 채 죽어가던한낮이었다 우리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속닥거렸다그때마다 슬쩍 보이는 초록빛이내 뺨에 닿을 때너는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 말했다 내 품에 매달린 소년이거처를 잡지 못한 악몽을 끌어안았다지나치게 부푼 새콤한 냄새 내일이 되면다
나무를 오해하지 않기- 마혜경 섣불리 베지 마라땅과 나란히 눕지 않겠다중력과 태양에 당당해지기 위해 기도 중이다마른 가지를 보고 손목을 꺾지 마라그 하나로 사라지지 않는다내 끝은 처음이 아니다 어이없게도 밖에서 나를 찾는다면나는 없다계절이 흙에 가득 고이면 밀어낼 뿐이다 너희들의 언어로 말하겠다꽃도 피는 게 아니라 안에서 밀어내는 것이다 어머니도 별도詩도그렇게 밀어서 세상을 만나지 않았었나
사랑법 윤한로용산으로 밀양 현장으로 강정마을로 삼보일배로투사로 애국자로 농사꾼으로 살았으니뱃놈으로 사제로 머슴으로 내던져졌으니맨날맨날 싸우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아니다, 밑바닥에 깔리기 위해이름마저 구들장으로 바꿨으니, 방구들장 신부님안중근 도마 의사를 존경해서엄청 존경한 나머지왜적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쏘는 동상까지 세웠으니우리나라 곳곳, 골골을 짯짯이 사랑해서너무 사랑한 나머지본적마저 경기도에서 저 전라도 장성 땅으로 파 갔으니그러나 하느님께도이 세상 것 본인이 좋아하는 걸루 하나쯤희생 봉헌해 드려야 했기, 회로다 하자!그러구
콜라에 대하여- 마혜경 검은 물결 사이로 희고 작은 방울들쏴아아 쏴아아, 포말을 그리다콧등에서 톡 토독,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 누구를 만나든 주저하지 말아라오차 없이 정확하게 목적만을 도려내는비록 속은 안 보여도 뾰족한 맛 짜릿한 바다 멀리 갔나 싶더니 다시 돌아와목청껏 노래하는 달달한 밤하늘톡 토독, 영혼을 갉아내는 소리 칼날 같은제국 같은
이상한 동물원에서- 마혜경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북극곰과 한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최악의 디자인이야 재주 좀 부려보시지두 발로 오래 서있네미련 곰탱이그러나 세 번 중에 한 번은 같은 생각을 한다 세상에나, 쯧쯧쯧 이렇게 서로를 관람하는데티켓은 왜 한쪽에서만 끊어야 할까
내 탓은 목적 없이 나에게 돌아와싫었어 귀신이 되지 못한 것들의 침묵이내가 숨을 성을 쌓았어 성난 아버지의 표정을 모아밥상을 만들고 구멍난 양말에 머리를 집어넣고 싶었어망령이 되면 좋은 것 이 방은 항상 떳떳하고그릇들, 사진들, 처연한 병들깨지지 않는 대신녹아버리고 그랬어평범은 평화호피 무늬에 그려진 눈들을 하나 둘 세고바닥엔 얼음나비 누군가 말했는데누군가 바람을 불었는데 성냥을 키면 하늘을 향하는 불꽃이그래, 흔들렸어 내 손은 목적없이 나를 떠나가마구 깨문 자리 싫었어어디론가 닿으면 기별을 남겨줘불꽃 위에 얼음을 올려두었어 내가
내 짝궁- 마혜경 밥 안 먹는 누렁이 발맘발맘 따라가니분홍머리 흰둥이와 폴짝폴짝 꼬리잡기누렁아, 밥 먹어야지 집에 가자 빨리 와 다가가면 도망치고 약 올라 쫓아가니흰둥이 찾아 나온 전학 온 그 아이하얀 손 피아노 소리 콩닥콩닥 발그레
어느날 문득국토가 두동강 나던 그 시절골육상잔의 피비린내가 산하를 물들이던 시간인민군과 국방군이 혹은 빨치산과 토벌대가대립하던 역사인민군이 점령했을 때도국방군이 수복했을 때도빨치산이 해방을 외칠 때도토벌군이 빨갱이를 잡을 때도이 골짜기에는 사람이 살았다이 편을 요구할 때는 이 편이 되고저 편을 요구할 때는 저 편이 되어풀잎으로 살았다서슬퍼런 이념의 벼린 칼날에 베이고편견에 갇힌 우직한 군홧발에 짓밟히며잘리고 문들어져도 생명줄 놓지 않았다정성을 다하여 꽃을 피우고꽃이 피니 나비가 나는아름다운 자연은 변함이 없건만자본
어떤 사과- 마혜경 순녀 씨네 가족은 강원도 큰 언니네 과수원으로 휴가를 갔다 올라오는 날 수고비라며 사과 다섯 박스가 트렁크에 실렸다 뒤에 앉은 딸과 순녀 씨는 도로의 사정에 따라 좌우로 흔들렸다 차가 멈췄다 조금 달렸다 딸의 노래가 잠들었다잠시 후 오른쪽 길입니다남여주 IC로 빠져나오니 이제 길이 뚫렸다 콰과 쾅,추월하려던 대형 크레인이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았다차가 반 바퀴를 돌고 멈췄다 순녀 씨와 딸은 아직 모른다사과가 대신 터졌다는 걸여태 사과향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어떤 사과는자신의 쓸모를 다르게 해석한다
시지프스의 무게- 마혜경 신호에 멈춘다한 남자가 횡단보도를 가로지른다수레에 물건이 잔뜩 있다박스는 언제나 궁금하다 쿠쿠 압력밥솥 10인용삼성 김치냉장고대우 식기세척기LG 공기청정기오뚜기 식용유농심 신라면박카스 참이슬 새우깡청송 사과당근주스카스,저게 다 얼마야당장 하나 준다면 식기세척기를 골라야지그러나 누군가 손댄 빈 박스 그의 마누라와 아들 딸에게도새 박스를 뜯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 착한 무게를 잴 수 있도록.
질투를 부르는 데이트- 마혜경 토요일 오후였죠 3시를 조금 넘은송도 거리는 신발들로 간지러웠고적당히 소름 끼쳤죠발길 따라 낙엽들의 이정표가 바뀌고어떤 구름은 못 본 척합니다 볼수록 예쁜 건 너 하나뿐.그들의 대화는그가 그녀의 어깨에서 나뭇잎을 하나를떼어내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 순간이 너무 달달해서나무는 화가 났어요홀로 엿듣다 질투가 났답니다
토렴, 그 따뜻함! 예닐곱 살이나 먹었나?전대를 허리춤에 감추시고쇠전 갈 채비를 하시고는아무개야 애비랑 쇠전 가자 황배기 소는 그날따라솔질도 간추렁이 잘 되고고삐도 새 새끼로 꼰 것이었어아마 나를 동행하시는 것은소 판 돈 간수하시는 호위병 쯤 거간꾼의 흥정이 활발해지고지루함에 죄없는 돌멩이 툭툭 차고드디어 피차에 맞는 선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아버지는 어린 새끼 차가운 뱃속을 채워 주셨지쇠고기에 시래기 듬뿍 든 장국밥나이 지긋한 아줌마는 뚝배기에 밥을 담고 토렴을 했지대여섯 번 뜨거운 국물을 토렴질 했어그 따뜻함 가득한 장터국밥아버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마혜경 아바 사르나와 노니는 결혼했다분명 재산을 노린 거야,열여덟 살 노니가일흔한 살 아바를 꼬셨다며사람들은 그녀를 의심했다 사랑은 이렇게도 시작된다기름 가게에서 일하는 노니가아바네 농경지로 농기구 기름을 배달하면서둘은 정이 들었다53년의 간격에 기름 한 방울이라도 닿은 걸까 가난한 아바에게서 금 11g과 840만 루피아를 받은 노니 가족은간소한 결혼 준비로 딸의 사랑을 존중했다 멀리 인도네시아에서 건너온 소식에이곳에서도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다늙은이가 돈으로 매수했어,모두 아바를 의심했다 암만 떠
개떡 윤한로수도국산이나 개건너 살 때똥구멍이 찢어져라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에도개떡 인심은 좋았으니그 누가 개떡 먹는 걸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라 치면즈이도 그것밖에 먹을 게 없지만별 도리 없어라한 쪼가리 떼어 주고 말았으니꺼끌꺼끌 말라붙어양중엔 차돌멩이만큼이나 딱딱한 개떡그 한 쪼가리를 또 애꼈다간미웁고도 싫어라마침내 막내 모개한테까지 떼어 주니어린 마음에도 묘리 없어라개떡은 본디 떼어 주고 또 떼어 주란 것인가감출 수도, 숨길 수도 없는 것이던가이 구석 저 구석 굴러다니며 발로 채이기까지나누고 나누어도 왜 그렇게 남는 것이냐이따금 그
때로는 -마혜경 손수레가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하고 있다아, 죽고 싶어? 미친 인간아노인을 간신히 피한 차들이 창문을 열고 같은 욕설을 한다지나가던 한 노인이 달려와노인의 손을 잡고 주변에 수신호를 보낸다 클락션 소리 두 배로 울린다 묻지마라법의 잣대로 따지지 마라누구나 길 잃을 자격이 있지 않나
편지 가을 닮은 하늘에당신 이야기를 전합니다.어쩌지 못한 잘못일랑구름 닮은 말로 사과합니다.그 때 그 시절당신은 가을이었습니다. 봄과 여름을 품어야가을의 아름다움이함초롱한 청포도처럼영글어가겠지만당신의 언어는 늘봄이었습니다. 가을이 다시 돌아오며는미뤄 두었던 숙제처럼편지를 씁니다.부치치 못할 편지인지라답장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오늘 시리도록 투명한 이 가을날에당신께 편지를 쓰렵니다.봄이었고 가을이었던당신을 그리는 그림으로편지를 쓰렵니다.가슴 벅찬 풍요가 밀물처럼 밀려오는 가을날에가을 닮은 언어로 구름 닮은 편지를 쓰렵니다.
문틈 사이로- 마혜경 문에 매달려 놀았던 적이 있다열렸다 닫혔다 반원을 그으며발끝으로 벽을 밀고 왼쪽 오른쪽삐걱 쇳소리에 노래를 부르다대문 내려앉는다, 야단을 맞고서야매달린 문에서 내려왔었다 골목에서 문을 보았다한 뼘 정도 열린 틈으로매달리고 싶다는 마음을 매달아본다작게 둥근 선을 그으며 왼쪽 오른쪽최대한 소리소문없이 매달려본다노래도 어떤 소리도 들키지 않아야단치는 사람이 올 수 없다 어떤 틈은 추억을 부른다
추억낙엽을 밟고 있어요.어릴 적 밟던 낙엽은 놀이였지요.은숙이는 노랑 밟아라 경란이는 빨강 밟아라낙엽처럼 웃음을 굴리며 놀았죠오늘은 어릴 적 추억을 밟으려 했어요먼 먼 시간이 지난 일이라 낯이 서네요경란이도 은숙이도 먼 기억이네요소꿉장난하기가 참 싫었어요동한이는 계집애들이랑 같이 놀고 싶어 했고나는 늘 그게 싫었어요그래서인지 동한이는 그 애들이 거리를 뒀고나는 늘 그 애들이 불렀죠더러는 나도 좋은 구석이 있었나 봐요나름 잘 생겼나? 히히낙엽을 밟아요.과거를 밟죠.추억을 밟고 은숙이 경란이를 밟아요.그러면서 나를 밟아요.살아온 시간과
배꼽-마혜경 주소가 생겼다숫자를 지우니 좀 더 본질적인오아시스에 딱 맞는 검지손가락 누군가 오랫동안 누른 초인종처럼
저 빛을 보라- 마혜경 젊어서는 처자식을 업고 다녔다그는 별을 읽으며 집에 돌아가곤 했는데그때마다 돌쟁이 아들의 잠꼬대를베고 잠들었다세상이 이율배반적이라고 떠들어도그의 등에 실린 짐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아들은 지 살기에 바쁘고아내는 류머티즘으로 거동이 불편하다 그의 어깨는 언제쯤 가벼워질까세상의 무게 모두 내려와 언제쯤 동그랗게 빛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