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난간에 엉덩이를 기대고 서서 길을 물어볼 행인을 기다리는 중에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다리 건너 저쪽에서 걸어오는 한 쌍의 남녀가 바로 취생과 몽사였다. 그들을 알아본 순간 나도 모르게 만세 하듯이 두 손을 들었다. 그들은 멀지 않은 마을에서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아침에 헤어진 마크와 존이 필름 통을 술잔으로 갖고 있었기에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나서 스님을 소개했다. 스님이 합장을 하자 두 사람도 자연스럽게 합장을 해 보였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며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
이튿날 오전에 스님과 나는 욕숨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우리도 마크와 조앤처럼 욕숨의 삼툭 마을에 방을 잡고 산책이나 다니면서 며칠 푹 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결과였다. 버스가 자욱한 운무 속을 달리는 동안 나는 잠들어 있었다. 이따금 깨어나서 차창 밖에 스치는 운무를 멀거니 바라보기도 했다. 참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는 운무였다. 다르질링의 운무가 씨킴까지 따라온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르질링도 씨킴의 일부이며, 씨킴 땅은 설산 칸첸중가의 동쪽 기슭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휴게소에서 생수를 사서 마시고 소변을
내 옆에 자리를 깐 청년은 영국인이고 이름은 마크였다. 종이봉투 속의 위스키를 보여 주고 한 잔 하겠냐고 물었더니 좋다는 듯 씩 웃고는 방에 가서 자기 잔을 가져 왔는데, 그것은 뚜껑이 붙어 있는 빈 필름 통이었다. 마크는 자기 짝이 곧 나올 거라며 미리 양해를 구했다. 나는 그때까지 마크의 짝이 누군지 몰랐다. 특별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소년처럼 천진해 보이지만 이미 서른 살이라는 마크와 대작을 시작했다. 두 번 째 순배가 되었을 때 마크의 짝이 나왔다. 남인도 풍의 헐렁하고 긴 통치마 위에 점퍼를 걸치고 나온 그녀는 손으로 집어
종이봉투에 말아 준 1 리터짜리 위스키 병을 갓난애 안듯 보듬어 안고서 한 발 한 발 계단을 오를 때 '너는 어쩌다 이렇게 가증스러운 술꾼이 되었냐?' 라는 물음이 목구멍 저 밑에서 올라왔다. 물음이라기보다는 비난이나 자책에 가까웠다. 식당에서는 주류에 대한 정부의 면세 정책에 분노해서 술을 거부하더니 금방 ‘술이 무슨 죄가 있냐’는 핑계를 만들어 술을 사러 나갔으며, 술가게에서는 작은 위스키 병을 집어 들었다가 순식간에 변심하여 큰 병으로 바꿔들었던 것을 뉘우치는 것이기도 했다. 망국의 원혼들을 달래고 위로하는 데는 술만 한 것이
가이드북에 간추려진 기록에 의하면, 시킴은 독립된 불교 왕국이었다. 대국 사이에 낀 소국이어서 외세의 간섭과 침략에 의해 늘 흔들렸다. 다르질링도 사실상 영국에게 빼앗긴 시킴의 영토였다. 결국 시킴 전체가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는데, 인도가 독립하면서 시킴도 인도의 보호령이 되었다. 1975년에는 국민투표에 의해 인도의 22개 주 중의 1개 주가 되었다. 불과 20 년 전에 망한 나라에 와서 세금 없는 술을 즐긴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면세 특혜는 원주민들로 하여금 망국의 한을 술로 달래고 술로 잊으라는 인도 정부의 술수라고 생각
칼림퐁과 갱톡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어름이었을까? 자동차 타이어들을 엉성하게 쌓아둔 어떤 집 앞 마당에 지프가 섰다. 간판 하나 없이 자동차 펑크만 전문적으로 때우는 집이었다. 영감님이 나와서 쇠 지렛대와 망치를 이용하여 타이어를 벗겨내고 고무 튜브를 꺼내어 물통에 담가 주물럭거리며 펑크 난 자리를 찾는 동안 어디선가 암탉이 병아리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암탉이 마당의 흙을 발로 헤치면 병아리들은 헤친 흙 속에 서 먹을 것을 찾았다. “시골에 온 느낌은 나는데 왠지 좀 스산하네요.”“저도 그래요. 아까 그 대숲 속 해우소에 다녀오면서
지프가 다시 쉰 곳은 오래된 휴게소가 있는 언덕 위였다. 희미한 안개 속으로 깊은 골짜기가 내려다 보였다. 언덕에서 골짜기까지 이르는 비탈은 계단식 경작지였다. 드문드문 차밭도 보였는데 언젠가는 차밭이 경작지 모두를 점령할 것 같았다. 골짜기에 흐르는 계류에는 팔루트 언저리에서 발원한 실리콜라의 물도 섞여서 같이 흐를 것이다. 지프는 우리를 내려놓고 왼쪽 앞바퀴의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있었다. 승객들은 펑크가 난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내려서 보니 그 바퀴가 현저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운전사와 조수는 지프가 왼쪽으로 쏠리는 느낌을 통
국도를 달리던 군용 지프가 있었다. 길가에 있던 아이들 중에 하나가 갑자기 국도로 뛰어들었다. 운전병은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이미 늦었다. 아이는 머리통이 터져서 길바닥에 널브러졌다. 지서 순경이 마침 현장에 있었다. 지서 순경은 의식을 잃고 피를 철철 흘리는 아이를 안고 길가의 병원에 뛰어 들어갔다. 병원의 의사는 누군지 알 수 없을 만큼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침착하게 수술대 위에 누이고 퉁퉁 부어오른 아이의 얼굴과 머리를 알코올을 적신 거즈로 씻겨내기 시작했다. 아이의 얼굴이 점점 드러났다. 의사는 아이를 알아보고 집안에다 고함을
지프는 다시 안개 속을 달렸다. 올 때처럼 계속 아래를 향해 구불구불 내려갔는데 어느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한 후로는 위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아래도 위도 모두 안개가 가득 차 있어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래로 달릴 때는 브레이크가 터져서 곤두박질 칠까봐 걱정되더니 위로 오를 때는 엔진이 터질까봐 조마조마했다. 눈을 감았지만 귀는 열려 있어서 지프가 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엔진 소리, 바퀴 소리, 바람을 가르는 소리, 쿠션들이 삐꺽대는 소리, 창틀에서 유리가 바르르 떠는 소리, 다른 차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소리를 듣
지프가 섰다. 콜라와 사이다 광고판이 큼직하게 자리 잡은 도로변 주차장이었다. 주차장 안쪽에 라라 카페라는 간판을 단 기다란 건물이 있었다. 주차장에는 이미 여러 대의 버스와 지프들이 주차해 있었다. 뚱뚱한 운전사와 바싹 마른 조수를 포함한 10 명의 승객들이 우리 지프에서 내렸다. 주차해 있는 세 대의 지프 중 에서 우리 지프가 유난히 고색창연했다. 바싹 마른 조수가 10분 동안 휴식이라면서 화장실은 카페 뒷마당에 있다고 알려 주고 운전사를 따라 카페로 들어갔다. 스님을 포함한 세 명의 여자들은 카페 뒷마당으로 갔다. 남자들 몇몇
안개를 뚫고 알리멘트 문 앞에 온 10인승 합승 지프는 실망스러웠다. 과연 갱톡까지 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고물이었다. 타파도 2차 대전 때 지프가 올 줄은 몰랐다며 투덜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프의 조수는 우리 배낭을 받아 지붕에 싣고 밧줄로 칭칭 동였다. 우리 자리는 지프의 뒷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 보고 앉는 자리였다. 스님 옆 자리는 중년의 따망 부인, 내 옆 자리는 유스호스텔에서 일하다가 칸첸중가로 일하러 간 락바 라마를 생각나게 하는 중년의 사내였다. 지프는 시가지를 벗어나 차밭 사이로 달렸다. 안개 속에서 갑
원효 대사 아시죠? 물론 저보다 더 잘 아시겠죠. 저는 그 때 원효 스님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주워들은 짧은 얘기만 기억하고 있었죠. 즉, 원효 스님이 의상 스님과 함께 당나라로 불법(佛法)을 구하러 떠났다, 움막에서 자게 된 어느 날 밤 자다가 깨서 물을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중에 마신 물이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이었다, 이 때 크게 깨달은 원효 스님은 당나라에 가지 않았다. 겨우 이게 전부였죠. 그 얘기를 듣고 ‘아, 이럴 수도 있구나!’ 싶었던 자가 마침내 그럴듯한 해골바가지를 얻었으니 어찌 흉내를 내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