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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너처럼 장미였노라]

2020.8 한국산문 당선작 심사평 등단소감

솟을대문

2020. 07. 29 by 김주선 수필가

 

  어릴 적 우리 집은 솟을대문이 있는 기와집이었다. 중류층의 보통 집 구조였으나 새마을운동 이전에는 부러움을 사는 고택이었다.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집안일을 거드는 일꾼의 살림방이 있는 행랑채가 있었다. 대문은 두 개였다. 바깥마당에서 안마당으로 들어서는 중앙에 자리 잡은 솟을대문은 아버지의 벼슬 같은 자랑이었다. 행랑채는 살림방 외에 대문을 중심으로 외양간과 광(곳간)이 있었고, 집터를 아우르는 흙담 아래로 봉숭아가 피는 화단이 있었다. 목수인 조부에게 집 짓는 일을 배운 아버지는 전쟁통에 절반은 허물어진 어느 집 고택을 사, 기둥과 대들보를 분리해 지금의 집터로 옮겨왔다. 어찌 보면 한옥은 암수를 서로 끼워 맞추는 형식이었기에 분리가 쉽고 조립도 쉬웠다.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얹어 끼운 다음 지붕의 뼈대인 서까래를 얹었다. 지붕을 덮는 기왓장도 암수가 있어 한옥은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전통가옥이었다. 
 
 문경시 틀모산에 작은 암자를 짓고 사는 큰댁 오촌 당숙은 대처승이었다. 당숙이 돌아가시고 당숙모가 암자를 지키며 여생을 보살로 살다 가셨다. 대를 이어 나와는 육촌지간인 큰아들도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아버지는 큰댁의 영향을 받았지만, 불경(佛經)보다는 무경(巫經)에 가까운 ‘명당경(明堂經)’을 독경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소반에 맑은 물 한 사발을 떠 놓고 늘 의관까지 정갈하게 갖춘 모습이었다. 새벽잠을 깨우는 아버지의 경문 외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귀를 막고 이불 속에 있었다는 언니들보다, 나는 참 듣기 좋았다. 특히 후렴부에 ‘여시여시우여시 천세천세천천세 만세만세만만세 부귀부귀증부귀(如是如是又如是 千歲千歲千千歲 萬歲萬歲萬萬歲 富貴富貴增富貴: 이처럼 천년만년 부유하고 또 부유하게)’라는 칠언(七言)으로 반복되는 문구는 어린 나도 외울 정도였다. 

 아버지는 집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키는 작고 말랐으나 눈매가 다부진 아버지는 흰 바지저고리에 삼베로 된 검은 건을 쓰고 양반다리 자세로 새벽기도를 하셨다. 어르신이 기침(起枕)하신 줄 알고 행랑방 일꾼이 쇠죽을 쑤러 나오는 시간이었다. 머리에 쓰는 건이나 갓은 대나무로 만든 원추 모양의 틀에 종이를 발라 기름을 먹인 갓집에 보관하였는데 그 또한 솟을대문 못지않은 권위였다. 하루에 세 번씩 명당경을 외고 기도를 드리면 집터가 좋아지고 그 집에 사는 사람도 삼재가 소멸한다고 아버지는 믿었다. 가족이 사는 집과 조부모님의 산소가 명당이기를 바라는 기원이 첫째고, 두 번째 기도는 식솔들의 건강과 만복을 비는 내용이었다. 

 마을은 같은 성씨를 쓰는 씨족 단위여서 거의 친족 간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는 음력 10월에는 문중 연례행사인 시제를 올리고 선대 묘소에 가 축복을 구한 다음 가정의 평안을 축원하는 안택(安宅) 고사를 집에서 지냈다. 70년대 새마을운동이 일고 민속신앙을 미신으로 치부해 어느 해부턴가 안택 고사는 사라졌지만, 해마다 음력 10월이 되면 아버지는 큰댁 스님을 모셔와 가문의 번성과 식구의 무탈을 비는 안택 축원을 했다. 이때 쌀을 소복하게 담아놓은 그릇에 무명실타래를 감은 숟가락을 꽂아 두었다. 일이 잘 안 풀리고 식솔 중에 병자가 생기면 집터를 지키는 지신(地神)에 대한 정성이 부족한가 염려하여 큰댁 스님보다는 풍물패를 부르기도 했었다.

 어느 해 염불과 독경으로 간소하게 하던 안택고사가 판이 커져 ‘안택굿’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삼재에 들고 무엇보다 집터에 센 기운이 들어왔다는 운수 때문이었다. 집안끼리 모여 하는 절실한 제의였으므로 부정이 들까 봐 풍물패가 초저녁부터 요란을 떨었다. 떡의 켜에 붉은 팥이 들어간 시루떡과 백설기를 엎어놓고 집안 어른들이 예를 갖추었다. 자정 무렵, 신위를 올리고 촛대에 촛불을 밝히므로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둥근 파문을 그리며 어둠 속으로 퍼져 나갔다. 둥. 둥. 둥. 이어 놋쇠로 만든 꽹과리가 북소리 사이사이에 박자를 넣었다. 쵱쵱체체쵱. 짖던 개도 놀라 조용해지자 북과 꽹과리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장단을 맞추며 흥을 고조시켰다. 법사의 독경 소리가 최고조에 접어들고 꽹과리 소리가 신내림을 재촉하듯 호흡이 빨라졌다. 작은아버지가 잡은 나뭇가지 신장대가 흔들리고 쌀그릇이 요동쳤다. 온 방 안에 쌀알이 흩어졌다. 종이로 접은 고깔을 쓰고 앉아 있는 작은아버지에게 신내림이 된 것이었다. 노여움을 탄 지신을 달래느라 새벽닭이 울 때까지 북과 꽹과리는 멈추질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 그러니까 정월 대보름이 아버지 환갑잔치였다. 아버지는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지만, 나이 터울이 많았다. 막내인 나는 아버지 나이 오십이 훌쩍 넘어 귀하게 얻은 딸이었다. 자반고등어 구이가 놓인 아버지 밥상에서 집안의 장손과 겸상을 하는 유일한 딸이었다. 양 무릎에 장손과 막내딸을 앉혀놓고 일가친척 절을 받던 아버지의 환갑잔치는 일주일 내내 마을 잔치로 열렸다. 88세 미수연에 돌아가실 때도 꽃상여에 태워 잔칫날처럼 보내드렸다. 화려한 만장이 상여꾼을 따라가던 호상이었다. 
 부를 이루고 많은 땅을 남기고 떠났음에도 아버지의 재산은 삼대를 못 갔다. 장남인 덕에 아버지의 재산 중 절반을 넘겨받은 큰오빠는 아버지의 땅을 관통하는 도시화 도로가 생기면서 몇 배의 토지 보상을 받았다. 그 재산 다 어쩌고 매달 들어오는 기초연금을 확인하러 은행을 찾는 신세가 되었다. 아버지가 세 딸에게는 땡전 한 푼도 나누어 주지 않았지만, 여식들은 별 불만이 없었다. 새벽마다 명당경을 외우며 애착을 보이던 아버지의 집은 장조카 내외가 허물고 그 자리에 식당을 지었지만, 장사가 잘 안되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중인의 자손으로 물려받은 땅 한 쪼가리 없이 쓸모없는 돌밭을 일군 아버지는 그 돌밭이 명당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일생을 사셨다. 향교에서 뒷자리에 앉아 시제를 올려야 하는 천시를 견디며 일군 아버지의 땅과 집터였다. 분명 아버지의 땀과 눈물이 밝고 좋은 기운을 내린 명당이었을 것이다. 어느 명문가의 대들보를 사 와 지금의 집터에 대들보를 올린다고 하여 우리 집이 명문가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 한들 자손 대대로 무탈하게 살고 아버지가 자리 잡은 집터에서 오순도순 화목한 우애로 살아가는 자손을 바랬던 것은 아닐까. 솟을대문을 바라보며 아버지 대에서 끝내고 싶었던 절실한 그 무엇, 가난은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열망과 함께 ‘천세천세천천세 만세만세만만세 부귀부귀증부귀’를 새벽마다 외우던 아버지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근래에 마지막 남은 사과 과수원과 아버지의 집터를 장조카는 매물로 내놓았다. 사과나무도 이젠 늙어 버려 단맛이 없고 그나마 꽃도 잘 안 피어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래다. 천년만년 자자손손 부귀를 갈구하던 아버지의 명당경 외는 독경 소리는 백 년도 못 가 약발이 떨어졌지만, 여명을 등지고 앉아 낭랑하게 경문 외는 아버지의 음성이 그립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11월의 스산한 바람이 마음을 휩쓸고 간다. 내 기억이 오래오래 아버지의 집터에 머물고 깨금발로 뛰놀던 계집아이 하나가 온종일 마당가에서 고무줄놀이를 한다. 명당경 운율에 맞춰.

 

<심사평>

 토착정서나 전통문화와 문학예술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문화란 새로운 것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기능과 함께 한 나라나 민족, 부족이 오랫동안 정착해서 창출된 토착정서와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역할을 겸한다.
 한국 수필계는 격변하는 사회적인 변모에 부침하면서 너무 새로운 것 콤플렉스에 쫓겨 전통문화를 경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너무 과거만 돌아보는 건 자칫하면 수구적인 가치관에서 헤어나지 못할 위험성이 있지만, 전진을 위한 되돌아봄의 자세는 항상 절실하다.
 김주선 님의 문학세계는 이런 관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솟을대문>은 한국전쟁 이후 급격하게 허물어지기 시작한 전통적인 가치관이 새마을운동을 전환점으로 농촌사회의 풍경이 변모해오는 속에서 한 집단체가 어떻게 부침해 왔는가를 아름다운 서정적인 눈으로 바라본 글이다. 경지에 이른 작가의 농익은 인생살이가 반영된 글이다.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윈 : 송하춘 박상률 이재무 김창식 김응교 조헌 박종희 유성호 이순원  


<등단 소감>

 정초쯤, 심심풀이로 본 토정비결에 나를 도와주는 귀인을 만나 말을 타고 장안을 달리는 형국이니 사방에 이름을 떨친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한 심심풀이 땅콩 같은 객담(客談)이 우습게도 새삼 생각이 난다. 무엇인가 준비가 되어 있던 일이라면 그것이 ‘시작’이 될 운이니 더욱더 정진하라는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문운인가 싶어 사소하게 흘려버린 한마디도 새겨 두었나 보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논술 준비를 하는 아들 녀석의 책상에서 작가 이문구의 <관촌수필>에 매료되고부터다. 플롯과 무관한 사적인 이야기로 ‘수필인 듯 수필 아닌 수필 같은’ 단편소설을 연작으로 엮은 걸작이었다. 서술자의 자전적 내용이 섬세하게 쓰인 수필적 담화는 나의 삶을 풀어내는 수필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날카로운 가르침을 주신  임헌영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등단은 힘 있는 격려이자, 적극적으로 내 글에 책임감이 주어지는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 내 문학 인생에 귀인이었던 김성은 수필가에게 무한 애정과 감사를 전하고 싶다. 아마도 선생님은 말을 타고 달리느니 산책하듯 즐기면서 쉬엄쉬엄 주변을 잘 관찰하며 걸으라 할 것이다. 쓴소리도 보약이 되게 하는 문학의 도반이자 선배인, 그녀에게  좋은 글로 화답하는 것이 도리라 여겨진다. 길을 열어주신 <한국산문>과 수수밭 동아리 문우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청소와 빨래를 전담해 준 최고의 후원자 남편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응원해 준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린다. 
 생의 위로가 된 유년의 기억과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마주하는 일이 언제나 즐거웠던 것은 아니었다. 글을 쓰는 일은 묵은 매듭을 풀고 나의 결핍을 채워가는 과정이므로 매 순간 나를 바르게 세워야 했다. 시력이 점점 나빠지고 있어 걱정이지만, 결명자를 우려내는 일이 번거롭더라도 커피를 줄여 인생 후반전은 필마(筆馬)의 고삐를 바짝 잡고 뛰어 볼 참이다.

한국산문 2020.8  vol.172
한국산문 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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