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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성 수필]

파도를 헤치며 넘실넘실 다가오는 도선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새 눈보라를 뒤집어 써서 눈사람 같았다. 그들을 마중 나온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눈사람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김홍성 수필 [ 39 ] 울릉도 1 / 도동항

2020. 03. 12 by 김홍성 시인

 

따스하게 느껴지는 집어등 불빛이 무대의 조명처럼 선창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 찢어질 듯 펄럭이는 어선의 깃발들, 육지에서 오는 선객들을 마중 나온 동네 사람들이 반가웠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본 적이 언제였던가? 겨우 1주일이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을 대하니 가슴이 따듯해졌다. 딱히 기다릴 사람도 없었던 내가 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선창에 나갔던 것은 무료했기 때문일 것이다. 집어등 불빛에 환하게 드러난 사람들,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네 사람들의 얼굴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친숙하게 느껴졌다.

울릉도에 도착한 첫날부터 일주일 동안 폭설이 오거나 눈보라가 쳤다. 뱃길도 막혔다. 여인숙 방에서 자다 깨다 하는 나날이었다. 한번 씩 선창 근처의 식당에 가서 짬뽕을 먹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중년 사내가 소년 한 명을 데리고 운영하는 허름한 식당인데, 주 메뉴가 짬뽕이었다. 다른 음식도 팔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하루에 딱 한 끼만 배를 채워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집 짬뽕은 특별히 맛있었다. 국물이 특별했다. 오징어의 본고장이니 짬뽕 국물을 낼 때 오징어를 듬뿍 썼다. 오징어와 함께 면을 건져 먹고 남은 국물을 들이킬라치면 소주 생각이 났지만 매번 참았다.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나서도 한참 앉아 있었다. 세찬 바람이 문을 흔들 때마다 문틈에서 눈가루가 날렸다. 주인은 말수가 적고 소년에게도 무뚝뚝했지만 인정은 있었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앳된 청년이 가여웠던 걸까? 두 번 째 갔을 때부터였지 싶은데, 짬뽕 그릇을 다 비우고 그냥 앉아 있으니 소년이 국물만 따로 한 사발 더 가져다주었다. 셋째 날에는 짬뽕이 올 때 식은 밥일망정 밥도 한 사발 같이 왔다.

70년 대 초반의 겨울, 혼자 무전여행을 나선 길이었다. 남쪽을 돌다가 강릉 가는 길에 포항에 들렀는데 울릉도 가는 배가 곧 떠난다기에 무작정 승선했다. 뱃길이 사납고 멀어서 무척 고생했다. 울릉도에 도착하니 눈보라가 치다가 폭설이 쏟아졌다. 눈보라와 폭설은 날마다 계속되었다.

길이 눈에 파묻혀 행인이 드물었다. 눈보라가 심할 때는 밤인지 낮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루 한 번씩은 눈길을 뚫고 그 허름한 식당을 찾아갔다. 짬뽕도 좋았지만 사람이 더 그리웠다. 세찬 눈보라가 식당 문 유리창에 달라붙는 춥고 우중충한 날들을 그들 덕분에 견딜 수 있었다.

도동항에는 눈보라가 드세게 불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파도도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멀찍이 정박한 여객선에 가서 승객들을 수십 명 씩 싣고 오는 도선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파도를 헤치며 넘실넘실 다가오는 도선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새 눈보라를 뒤집어 써서 눈사람 같았다. 그들을 마중 나온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눈사람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이 젖어 발이 시렸지만 사람들의 모습과 풍경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기는 서운했다. 도선에서 선창으로 내려서는 선객들, 손을 흔들고 큰 가방을 받아 드는 사람들, 섬에 내리는 선객들의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찬찬히 바라보는 사람 중에 나 같은 여행자도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집요한 형사처럼 맨 마지막 선객이 도선에서 선창으로 내려선 후에야 발길을 식당으로 돌렸다. 짬뽕을 주문했다. 그리고 소주도 한 병 청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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