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슈켄트=최희영 기자]그의 체구가 유독 커보였다. 다른 어느 때보다 보폭도 컸다. 영화로 치자면 엔딩 스크롤 직전, 각본에 없던 그가 나타났다. 박빅토르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문화협회장. 한국 방문을 마치고 급히 귀국하는 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님을 예방하는 자리에서 여러분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고려인 청년들을 위해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전했습니다. 지난 4월 대통령님께서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해 개관식까지 치러주셨던 그 뜻 깊은 장소에서 한국 영화인들과 고려인 청년들이 영화로 하나 되는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을 갖고 있다고 말씀 드렸더니 흐뭇해하셨습니다.”
박빅토르 협회장은 수료식에 참석 못해 무척 아쉬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작은 파티라도 열자며 쁠롭 상차림을 준비했다. 쁠롭은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음식이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으로 반전의 감동은 더욱 컸다.
그의 한국 방문도 갑작스레 이뤄졌다. 우즈베키스탄 하원의원 자격으로 나르바예바 상원의장의 한국 방문에 동행하게 된 것. 그는 수료식을 3일 앞둔 8월 6일 한국 방문에 나서 7일 문희상 국회의장 예방과 8일 문재인 대통령 예방 등의 일정을 소화하고 이날 서둘러 귀국했다. 그리곤 타슈켄트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양국 간 문화 교류가 한층 더 품격 있게 발전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청년들도 영화를 아주 좋아합니다. 문화 교류란 이렇듯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르일 때 가장 뜨겁게 하나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고려인 청년들이 이번 프로그램에 깊이 빠져 한국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됐고, 시나리오를 만들면서 고려인의 정체성을 찾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됐다는 보고를 한국에서도 잘 듣고 있었습니다.”
박빅토르 협회장은 이곳에 파견돼 3주 내내 영화 아카데미 전 과정을 꼼꼼하게 챙긴 김용훈 영진위 교육단장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면서 한국영화 100주년과 봉준호 감독의 칸 영화제 쾌거를 다시 한 번 축하했고, 오는 10월 3일부터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의 고려인문화협회 출품작 <양귀비 필 무렵>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박빅토르 회장님의 귀국 시간에 맞춰 수료식을 연기할까도 고민했습니다만, 다른 내빈들 일정이 안 맞아 우리끼리 수료식을 치른 게 많이 아쉬웠습니다. 박 회장님과 이곳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문화협회가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도움을 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저와 우리 강사들도 우즈베키스탄과 고려인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밤 비행기로 돌아갑니다. 귀국해서도 여러분들이 보여주신 후의, 잊지 않겠습니다.”
김용훈 교육단장의 인사를 끝으로 7월 22일부터 8월 9일까지 3주 동안 이어진 ‘청년 고려인 영화아카데미 in 우즈베키스탄’ 행사는 모두 마무리됐다. 그 과정을 통해 29명의 현지 영화인이 새롭게 탄생했고, 양국 문화교류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는가 하면, 이곳 고려인 사회와 한국 사회의 ‘시차 제로’ 시대를 여는 데도 기여했다.
이날 오전 수료식에는 강재권 신임 주 우즈베키스탄 한국대사가 참석해 이번 행사의 의의를 더욱 키웠다. 400여명의 고려인들이 행사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치러진 이날 수료식에서 강 대사는 “한국영화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타슈켄트 한국문화예술의집에서 고려인 청년 영화 아카데미를 개최한 것이 참 의미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또 오석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도 영상 축사를 보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고려인 청년들이 한국을 좀 더 많이 알게 되고, 현지에 파견돼 학생들을 지도한 한국감독들도 우즈베키스탄과 고려인 동포들을 더 많이 알게 된 좋은 계기였다”고 평가했다.
영진위가 주관한 이번 청년 고려인 영화 아카데미는 ▲문재인 대통령의 4월 중앙아 순방 이후 공식적인 첫 문화교류 ▲‘한-아세안 영화기구’(ARFO) 출범에 앞선 글로벌 우수 영화 인력 양성 등 다목적 사업의 일환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를 찾아 처음 진행됐다.
영진위는 이를 위해 영화 아카데미 출신의 젊은 감독 4명을 현지에 파견했고,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문화협회는 강의 장소를 무료로 제공했다. 그리고 전 세계 세종학당 중에서도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 받는 타슈켄트 세종학당(학당장 허선행)과 현지 민간단체인 ‘희망 유라시아’(대표 신현권)가 나서 이번 프로젝트를 적극 도왔고, 대한항공 타슈켄트 지사(지사장 박재윤)에서는 수강생 전원에게 뜻 깊은 선물을 안겨 수료식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한마디로 너무 감동스런 모습이라 가슴이 찡합니다. 우리 고려인 청년들이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몰라요. 처음에는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몰라 답답해하던 학생들이 어쩌면 그렇게 빨리 적응해 나가는지 우리 민족은 역시 총명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학생들 수준에 맞게 아주 자상하게 가르쳐 주는 한국 영화감독님들을 보면서 저런 능력을 가진 분들이니 세계가 알아주는 영화 최고 국가가 됐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고 마리나 카라칼파크스탄 고려인문화협회장은 이번 프로젝트를 지켜보며 고려인은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고 흐뭇해했다. 카라칼파크스탄은 수도 타슈켄트에서 1,100Km 떨어진 우즈베키스탄의 서부 오지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글과 우리 전통 문화를 무료 보급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카라칼파크스탄은 아랄해가 있는 지역이다. 중앙아시아 이주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살던 지역 중 하나다. 물이 있어 논농사가 가능했다. 그러나 물이 마르며 지금은 많은 고려인들이 그곳을 떠나 또 다시 뿔뿔이 흩어진 이산의 땅이 됐다.
영화의 힘은 역시 셌다. 고마리나 회장은 기자에게 은근한 압력을 행사했다. 내년에는 이번 프로젝트를 꼭 카라칼파크스탄으로 유치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럴 힘이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런 열망이라도 전해 달라 했다. 그래서 기사로 남기겠다고 했다. 그러면 다 된 거나 다름없다고 좋아했다. 큰일이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누가 알랴. 영화의 반전처럼 삶의 반전도 종종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니던가. 그런저런 기대감을 갖고 지난 3주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