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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신사(50) - 밤은 존재한다

서석훈
  • 입력 2011.03.20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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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창(소설가, 시인)
살찐 뱀 같은 마담과 가슴이 허한 배삼지 국장이 수상한 카페의 2인용 비닐 소파에 허벅지를 밀착시키고 앉아, ‘대담’이라고 할 수는 없고 ‘토론’은 더욱 아니고 ‘친교’가 합당할 같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쯤에서 돌아보자면, 도대체 우리의 허름한 당나귀 신사는 어디 갔으며, 관능적인 몸매와 뇌쇄적인 눈빛과 달착지근한 숨결의 마돈걸은 또 어디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당나귀 신사 백팔만 씨는 경마장에서 목돈을 날리고 크게 상심하여 몇 잔 약주를 걸친 다음 나귀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 걸로 알고 있다. 가서 쉬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당나귀 신사를 오빠라고 부르긴 하지만, 당나귀 신사가 감히 넘보기 힘든 존재인 마돈걸은 유세련이라는 재미교포 2세와 모텔 9층의 베드에 누워 계신 걸로 또 알고 있다. 그들은 영혼은 없다시피 하고 육체만은 비상하게 발달한 이상적인 현대 남녀로서, 지나치게 전희를 오래 끄는 관계로 잠시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베드의 마돈걸에게 전화를 건. 문화 체육계의 주요인사인 배삼지 국장이 차후에 연락 주시라는 그녀의 당부를 듣고 발길을 돌린 곳이 동네 어귀의, 살찐 뱀이 경영하는 수상한 카페였다. 얘기인즉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룻밤 얘기가 너무 긴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팔자인 독자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해드리고 싶다.
독자 제위께서는 혹시 잊지 못할 어떤 밤을 갖고 계신가? 어떤 대낮은 있으시다고? 뭐 아무튼 세월이 지나도,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생생히 되살아나는 밤이 있다는 게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거기엔 저마다 하나의 사연이 있을 터, 1987년, 1999년, 2007년의 어느 밤이 바로 그러한 밤이다. 그 밤은 사랑하는 연인이 떠나간 밤이기도 하고, 주식이 휴지가 된 날 밤이기도 하고, 똥말이 제일 먼저 결승선에 머리를 들이민 날이기도 하고, 담배를 안 빌려준다고 10대들에게 두들겨 맞은 날이기도 하다. 어찌 그뿐이랴. 그 밤은 겨울 바닷가를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차분히 거닌 밤이기도 하고, 그랬던 그 사람이 너 죽고 나 죽자며 목 조르려고 달려들던 공포의 밤이기도 하다.
아니다. 그 밤은 아무 일도 없었다. 사건도, 행운도 불행도 없었다. 그저 시선, 허공에서 얽히는 뜨거운 시선, 살짝 닿은 손끝에서 전해오는 심장이 타들어가는 전율만이 있었다. 그냥 그대의 입가에 머무는 단순한 미소였던가? 때론 밤풍경, 언덕에서 내려다 본 거대한 도심, 밤 버스에서 바라본 어두운 강, 그 강 건너 불빛이었던가? 왜 그 밤들이 유독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걸까? 그것은 각자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기로 하자. 따라서 우리는 이 밤을 이토록 길게 묘사하는 까닭에 대해 특별히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 주지하다시피 때론 긴 밤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찐 뱀 같은 마담의 허벅지가 밤은 여기부터라고 또 속삭이고 있지 않은가.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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