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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시작 #27] “왜 그래? 나보다 쿨한 사람 아녔어?”

이용준
  • 입력 2017.12.17 00:00
  • 수정 2021.12.16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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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영원한 것들

신의 아들과도 같은 일몰, 그 시작의 순간에 우리는 죄의 깊은 침잠 속에서 경건과 은혜 그리고 구원을 꿈꿀 수밖에 없다. 나를 구원할 존재는 하늘에만 있는 신인가, 아니면 그냥 사람인가? 그도 아니면, 성육신한 신인가? 죽음 이후의 영혼, 정신이 지금의 나와 동일하지 않다면 구원의 의미는 없다.

눈을 떴다. 익숙한 침대와 베개의 느낌이 전해졌다. 한 찰나가 지나자 아직 살아 있다는 느낌도 전해졌다. 어제 어떻게 집에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포장마차 앞에서 들었던 진아 목소리는 생생했지만 그 이후 기억은 없다. 평소와 다른 누군가를 대하거나, 쇼크를 받거나, 낯선 장소에 다녀온 다음 날에는 기억이 부분적으로만 남았기에 잊어버린 그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기억력과는 정반대인 다른 무언가가 뇌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으로 가려졌고 세상은 한껏 어두웠다. 컨디션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언가에 찔린 듯 왼쪽 관자놀이의 통증이 심했다.
눈을 뜨고 인기척을 내자 침대 아래에서 자고 있던 미루가 뛰어 올라왔다. 내가 어제 누굴 만났는지 안다는 듯, 자신도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평소보다 더 극성맞게 안겼다. 미루는 아직도 내게 진아의 체취가 남아 있다는 걸 증명하듯 코를 킁킁거렸다.
‘미루야, 진아는 아마도 나를 다시 만날 생각이 아닌가 봐. 우리가 정말 헤어진다면 그때 진아에게 보내 줄게.’
미루에게는 무책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진아가 집을 나간 이후로 미루도 성격이 바뀌었다. 유난히 극성맞았고 활달하고 잘 짖고 뛰어놀던 녀석은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어딘가를 응시하기만 했다. 날아다니는 파리 한 마리나 방 천장, 창틈으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는 미루를 보며 개들에게는 어디까지 이성이 허락됐는지 궁금했다. 단지 간단한 사고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았고, 반복된 훈련에도 이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인간의 이성 일부를 나눠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아마도 이성이나 감정은, 그 종과 상대를 구분하지 않고 전이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 선릉역에 왔어. 4번 출구로 나와서 쭉 오다 보면 대명빌딩이 보일 거야. 그 건물 2층에 ‘PS’라는 커피숍이 있어. 그쪽으로 와. 기다릴게」

오후 4시경 진아에게서 호출이 왔다. 아직도 내 번호를 기억하고 호출할 줄 안다는 생각이 들자 배신감은 더욱 커졌다. 내가 남긴 수많은 연락은 무시하고, 떠나보내기 위해 이렇게 연락하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이대로 만났다가는 다시 싸우고 화를 낼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 정말 모든 관계를 끝내야만 하는 것인지, 정말 이미 모든 게 끝난 것인지 믿기 싫었다. 사랑은 왜 질투, 미움을 동반하는가? 애증은 가능하지 않는가? 사랑의 속성은 어쩔 수 없이 질투나 미움을 동반하지 않는가? 신 또한 인간을 질투해서 많은 죽음을 생산하고 많은 피를 쏟게 하지 않았나. 사랑 그 자체라는 신조차 그러할진대 나약한 인간들의 사랑이란 결국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10분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진아는 이미 와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홀 가장 안쪽 창가에 앉아 있는 그녀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로 출근하려는 듯 짙은 화장을 했다. 청량리에서 일할 때 그 모습과는 무언가 달랐다. 보니 룩 스타일로 브이 네크라인 스웨터와 남보라색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의자 옆에는 롱 카디건이 놓여 있었다.
문이 열리자 진아는 고개를 들어 내 쪽을 한번 보고는 숨을 길게 그러나 소리 나지 않게 내쉬었다. 테이블 반대편 의자에 앉자 향수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가게에서 일하는 여자들에게서 맡았던 냄새와 비슷했다. 향이 짙은 플로리 엔탈 계열일 것이다. 내가 자리에 앉자 진아는 먼저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많이 기다렸지?”
“괜찮아, 뭐 좀 마셔.”
진아는 그 작은 코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여기요, 녹차 하나랑….”
“난 커피 마실게.”
“카페 모카 마시지? 모카 하나 주세요. 녹차는 미지근하게 해 주세요.”
진아는 차를 주문하고, 담배를 마저 다 피우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불을 끄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
“나도. 그간 잘 지냈지? 시험은 합격했다는 얘기 들었어.”
진아는 우리 헤어짐의 시작이자 관계의 끝이었던 시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날 아침의 기억이 동시에 우리 두 사람 사이로 흘러들었던 건지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역시 진아였다.
“길게 얘기 안 할게. 뭘 궁금해하는지 잘 알아. 묻지는 말고, 그냥 내가 말하는 걸 들어만 줬으면 좋겠어. 아이는 네가 원한대로 중절 수술로 지웠어. 그리고 난 이제 네가 싫어졌어. 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연락조차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음성은 어느 곳 하나 떨리지 않았다. 때때로 내게 보였던 그 강인한 모습으로 진아는 또박또박 말했다. 단어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 깊이 상처를 내서인지 가슴이 아리고 저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대답했다.
“그… 그렇구나….”
“여전하네. 하긴 내가 임신했을 때 좀 이상했었던 거지. 아무튼 난 그 말 외에는 더 할 얘긴 없어.”
“나,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
“빨리 물어봐. 피차 서로 바쁜 몸이니까.”
“왜 내가 싫어진 거야? 잘못한 건 알지만, 이렇게 쉽게 끝날 수는 없잖아….”
“왜 그래? 나보다 쿨한 사람 아녔어? 앞으로 함께할 미래가 안 보여서 그래. 나도 많이 답답했어.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
“쿨하다는 뜻이 무언지는 알아? 정말 쿨한 게 뭔지 아냐구!”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내가 알고 있는 만큼, 내가 믿고 있는 만큼대로만 행동하면서 살 거니까.”
“왜 그렇게 갑자기 떠났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그래….”
“거짓말했잖아. 윽박질렀고. 그날 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알아? 너무 했었어.” 그렇게 말하는 진아 눈에는 눈물이 살짝 맺혔다.
“한번 저지른 실수 용납 못 하는 거야? 헤어질 만큼 그 문제가 그렇게 컸던 건 아니잖아. 나랑 평생 함께한다고 했잖아….”
“이제 싫어. 싫으니까 그만해. 더 물어볼 말 없으면 그만 갈게.”
진아는 주문한 녹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일어나려 했었다.
“하나만 더, 하나만 더 물어볼게. 사고 났다면서 왜 연락하지 않았어? 그것도 내가 싫어서 그랬던 거야?”
질문을 듣자마자 진아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는 듯이. 진아의 두 눈은 한동안 무얼 생각하는지 한곳에서 멍하니 주저하더니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조용히 떨어지는 눈물을 배신하듯 진아는 입을 꼭 다물고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다. 5분 정도 침묵이 흐른 뒤, 전과는 반대로 진아가 내게 묻기 시작했다.
“내… 내가 사고당한 건 어… 어떻게 알았어? 홍균이 오빠도 모르는 일인데….”
나는 모든 것을 진실하게 털어놓아야만 했다.
“실은 어제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들었어. 세아를 다시 만난 것도 알게 됐고.”
“그, 그렇구나… 휴….”
진아는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급하게 담배를 피우고는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이제 진정이 된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어차피 다 지난 일이야. 그러니까 쉽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실대로 말할게. 그날 아침에 니가 집으로 올라가자마자 난 바로 집을 나갔어. 답답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무작정 걷고 싶었거든. 한 시간쯤 걷고 있다가 마음도 진정되고 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오는 길에 뺑소니 사고를 당했어.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차에 치였었어.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아이는? 얼마나 다친 건데?”
나는 진아의 말을 자르며 다급하게 물었다. 마치 그 상황 전부를 알아야 한다는 듯.
“…….”
“진아야, 속 시원히 말 좀 해 줘.”
“다 잊었어. 잊었으니까 더는 묻지 마. 먼저 일어설게.”
무언가 할 말을 꺼내려다가 포기한 것이 분명했다. 진아는 다시 마음을 다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아야, 그럼 집에 있는 짐들은 어떻게 해? 옷이나 화장품, 살림살이들 모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버리든 말든 알아서 해. 마지막으로 이 얘길 하고 싶었어. 나, 교회 다니게 해줘서 고마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돼서 지금까지 견디며 살 수 있었던 거야. 그것만으로 우리 관계는 성공한 거 아닐까? 함께 있어서 행복했어. 그리고 이제 나 준이를 용서했어…. 솔직히 아직도 준이를 사랑하지만, 다시 만나서 전처럼 살 자신은 없어. 네가 아닌 네가 내게 상처를 주는 게 낯설고 두려워. 물론 나도 마찬가지야. 나랑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된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 지금 모습 그대로 평생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딨어. 진아야, 이렇게 가지 마. 아니, 진아야. 그럼 밥이라도 먹고 가. 밥 한 끼만 같이 먹고 보내게 해 줘….”
“아니, 서로 바쁘잖아. 나도 가서 돈 벌어야지.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 가까운 사람들에게 허락된 소중한 순간이야. 헤어진 연인이 만나서 단지 배고프다고 밥을 먹고 다니는 건 아무 사랑 없이 섹스하는 것 같잖아. 의미 없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아. 나 그만 갈게.”
발목까지 오는 짙은 남색 앵클부츠를 신은 진아는 깊이 패는 구둣발 소리를 남기며 또박또박 걸어 나갔다. 진아는 끝까지 내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달려가 붙잡고 싶었지만 더는 그래서는 안 됐다. 사랑했던 사람이 남이 되는 순간에는 그 어떤 행동도 무모한 것이 되며 무의미한 것이 된다. 이별을 재촉할 뿐이었고 나쁜 기억만 만들어 낼 뿐이다. 나는 관계의 결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날씨 덕분에 빠르게 식은 커피는 더는 김을 내지 않았다. 진아의 녹차는 식은 지 이미 오래지만 그 향은 아직도 전해졌다.
커피숍을 나오니 하늘에서는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김포공항에서 봤던 그것, 지리산 꼭대기에서 봤던 그것, 정신병원 창틀에 매달려 봤던 그것, 자취방에서 봤던 그것, 진아와 함께 갔던 바닷가에서 봤던 그것, 시험이 끝나고 나오는 하굣길에 봤던 그것…. 일몰은 인생 최고의 순간에 늘 우리 곁에서, 모든 것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태초 전부터 그랬듯이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태양이 죽어 사라지더라도 빛은 남아 우리의 인생을 덥혀주고 우리 눈을 열어줄 것이다. 일몰은 단지 탄생과 종말을 동시에 알려주는 시작만을 가지고 있다. 영원히 시작만을 위해 존재하며 금세 그 종말을 맞이하고는 무한히 열려 있는 우주와 인간과의 합일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조력자다. 신의 아들과도 같은 일몰, 그 시작의 순간에 우리는 죄의 깊은 침잠 속에서 경건과 은혜 그리고 구원을 꿈꿀 수밖에 없다. 나를 구원할 존재는 하늘에만 있는 신인가, 아니면 그냥 사람인가? 그도 아니면, 성육신한 신인가? 죽음 이후의 영혼, 정신이 지금의 나와 동일하지 않다면 구원의 의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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