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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시작 #25] “팁은 니가 챙기면 돼. 눈치껏 알아서 하라고”

이용준
  • 입력 2017.12.13 00:00
  • 수정 2021.12.16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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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침묵

술에 흠뻑 취한 여자들에게 드링크제를 강제로 먹이고 술을 깨게 하는 것도 웨이터 임무였는데, 이 일이 제일 힘들었다. 화장실에서 토악질하고 있는 여자를 발견하면 대기룸으로 데리고 와 물수건으로 씻기고 따듯한 물을 마시게 하고 눕혀 놓아야 했다.

“사랑이야말로 유일하게 이성적인 행동이라구.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일수록 늘 사랑이란 주제에 사로잡혀 있어. 그들은 매번 새로운 사랑을 찾아다니지. 감정에 이끌린 게 아니라 이성에 이끌린 행동이야.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정욕은 지성인들에게는 결코 쉽사리 충족될 수 없는 무한한 궤도 같은 거야. 이성과 감정의 조합인 의지가 잘못될 때 문제가 생기기는 해. 단순한 조합이 아니야. 본격적으로 감정 문제가 개입하는 거지. 배신과 배반에 대한 이성의 반응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본능에 가까워. 하지만 감정이, 특히 교만이라는 인간의 왜곡된 파토스가 기존의 질서와 사실의 전복을 꿈꾸기 때문에 배신하게 만들고 배반을 때리는 거야.
사랑, 섹스, 애정은 지극히 이성적 행동이지만 바람을 피우고 난교를 하고 우상을 섬기고 동성애를 하는 건 감정적 행동인 거야. 이성을 벗어난 행동은 원래 질서와 맞지 않아. 원래의 질서가 뭐냐고? 그런 것이 있기나 하냐고? 사실이라고 하는 것, 진리라고 하는 것을 우습게 대하지 마. 네가 남자라는 것,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사실이야. 그렇다고 네가 소나 돼지처럼 다른 인간에게 사육되고 지푸라기 같은 것을 먹는 건 상상할 수 없잖아. 마찬가지로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됐고 변함없는 행동 양식에 순응해야 할 의무를 가진 존재라구. 왜 하필 신이냐고? 그럼, 다른 이름이 있을까? 우리를 매번 괴롭히다가도 사랑한다고 하고 우리도 모르는 힘으로 우리를 움직이는 그 무엇을 당신은 뭐라고 부르지? 그게 신이야. 어떤 신이냐고 묻는 것이 더 현명한 질문이겠지.
아무튼, 도대체 누가 사랑을 가리켜 감정이라고 표현한 것일까? 후대 사람들은 그 말을 왜 곧이곧대로 믿어버린 것일까?”

날카로운 음성이 그쳤어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음침한 응접실에 놓인 테이블 한쪽 구석에서 여자는 술에 취한 목소리로 혼자 그렇게 떠들어댔다.
아침에 일어나 미루에게 우유와 사료를 주고 방 곳곳에 개껌을 두고 집을 나왔다. 집 앞 전철역 지하상가에서 형이 준 돈으로 싸구려 캐주얼 양복을 한 벌 사 입었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신사역에 도착했고, 5시 정각에 나타난 형과 만났다. 4번 출구로 나와 출구 바로 앞에 있는 KFC를 끼고 뒷골목으로 가면서 형은 간장게장을 맛있게 한다는 식당을 소개했다. 식당을 지나 두 번째 골목으로 20m 걸어가니 온통 주택뿐인 길가 옆에 로열 블루빛 빌딩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빌딩 왼쪽 아래에는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 위에는 ‘오디세이아’라고 쓰인 불 꺼진 간판 하나만 달랑 달려 있을 뿐이다. 계단을 내려가자 굳게 닫힌 철문이 나타났다. 형이 세 번 정도 짧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그는 형을 보더니 ‘어서 오십시오!’하고 크게 외치며 넙죽 인사를 했다. 형은 묵례만 하고 입구를 지났다. 뒤따라가던 나는 이곳에서의 형의 지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던 그 남자는 형이 지나가자 고개를 살짝 들었고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의 눈빛을 피한 채 형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영업 시작 전인지 실내는 사물이 겨우 구분될 정도로 어두웠지만 꽤 큰 규모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걔 사진이랑 등본은?”
입구 옆에 있는 의자에 앉자마자 형은 용건부터 챙겼다. 나는 어젯밤 진아의 서랍에서 꺼낸 사진과 등본을 내밀었다.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런데 여긴 어디예요?”
“어디긴, 우리 영업장이지. 오늘부터 여기에서 웨이터로 일하면 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조명도 그렇고…..”
“저녁이면 사람들 많이 와. 자정까지는 보통 일반 룸살롱하고 같고 새벽 2시부터는 다른 영업을 해.”
“다른 영업이라면….”
“그때 말했다시피 남자애들이 선수로 와서 여자 손님을 받는 거지. 호스트바라고.”
형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 그렇구나….”
“준이는 자정까지만 근무하면 돼. 매일 오후 6시부터 자정까지 웨이터로 일한다고 애들한테 말해놨어. 이봐, 요한이! 여기야.”
요한이라는 사람은 홍균이 형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20대 후반의 남자였다. 주방에서 나와 어딘가로 걸어가다가 형의 목소리를 듣고는 쏜살같이 뛰어와 우리들 앞에 섰다. 헤어젤을 잔뜩 발라 머리를 전부 뒤로 넘겼고, 비쩍 마른 흰 얼굴을 하고 있었다. 180cm는 됨직한 큰 키에 마른 몸매를 한 그는 검은색 기지 바지에 하얀 라이더스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어제 얘기했지? 얘가 준이야. 앞으로 잘 봐줘. 준이야, 여기 매니저야. 말 잘 들으면 별일 없을 거야.”
“니가 준이냐? 홍균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난 여기 매니저인 요한님이시다. 하하. 앞으로 나를 깍듯하게 모시도록!”
초면인데도 그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거나 특별히 반가운 얼굴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내가 누구라는 것만 확인하려는 표정을 지으며 거만한 말투를 썼다.
“잘 부탁드려요.”
“요한이, 준이 오늘부터 일할 수 있지? 다른 얘들한테는 얘기해놨고?”
형이 말했다.
“미리 다 손 써놨지. 일단… 음, 옷은 깔끔하게 입었지만 좀 촌스럽잖아, 이런 건. 자, 이 마이는 벗고. 여기선 셔츠만 입고 서빙해야 하니까. 일단… 몇 가지 주의 사항들만 간단히 얘기할 테니 잘 들어.”
손님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싸워서는 안 된다, 룸에 들어갈 때는 항상 노크해야 한다, 팁을 받으면 매니저인 자신에게 얘기해야 한다… 등등 간단한 업무 사항을 말하다가 그는 무언가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아차, 내 정신 좀 봐!’ 하면서 다시 주방으로 뛰어갔다.
“저런저런, 정신없기는…. 준이야, 팁은 니가 챙기면 돼. 눈치껏 알아서 하라고. 일하다가 누가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면 언제든지 전화해. 하긴,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 그래도 여기 놈들은 믿을 게 못 되니까 늘 주의하고. 알았지?”
“응, 고마워요.”
“그리고 오해 말고 들어둬. 앞으로 나를 대할 때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인사를 깍듯하게 해야 해. 큰 목소리로 인사하는 걸 잊지 말고. 아까 들어올 때 문 앞에서 하는 거 봤지? 그렇게 해야 조직 기강이 잡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부탁할게.”
“네, 알겠습니다! 근데 이건 영 어색한데, 하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게. 나도 이런 건 싫은데 뭐 남들 눈도 있고 하니…. 아무튼 난 이만 가볼게. 일 잘하고, 나중에 보자. 진아 건은 내가 꼭 해결할게.”
“그래요, 형. 신경 써줘서 고마워. 나중에 봐요.”

형은 서둘러 돌아갔다. 잠시 뒤 매니저가 왔고 주의 사항을 더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구석구석을 일일이 데리고 다니며 여기가 화장실이다, 여기는 주방이다, 여기는 1번 룸이다 라며 위치를 파악하게 했다. 마지막으로는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과 나이든 주방장 두 사람, 나보다 먼저 웨이터로 일하고 있던 네 명의 남자를 소개했다.
“새로 온 녀석이야. 준이라고, 홍균 형님 소개로 왔대. 당분간 연습생으로 있을 예정이니까 친하게 지내.”
아까는 홍균이 형에게 반말했던 매니저도 사람들 앞에서는 형님이라는 깍듯한 표현을 썼다. 매니저 지시대로 옷을 갈아입고 각 룸마다 물과 우롱차, 탄산음료, 냅킨 등을 새로 정리했다. 7시가 지날 때쯤 화사한 옷차림을 한 여자들이 떼로 몰려왔다. 매니저 말로는 자정까지 여기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니 친하게 지내두라고 했다.
“빠순이들이 말이지, 성격 좀 드럽고 가끔 진상들 때문에 골치 아파서 그렇지, 먹어본 놈들이 맛을 안다고. 정말 맛있지. 가끔 밝히는 얘들한테 걸리면 잠을 못 잘 정도야. 낄낄낄. 손님들도 손님 나름이지만 얘들한테 우선 잘 보여야 팁 받는 것도 도와주고 짓궂은 짓도 안 하고 가끔 한 번씩 주기도 하고… 그야말로 일석 삼조지. 안 그래? 하아, 하! 자, 내가 인사시켜 줄게. 따라와.”
여자들이 대기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조용히 혼잣말하던 매니저는 이상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오늘 컨디션은 어떠냐, 어제 집에는 잘 들어갔냐, 이차 비용 제대로 계산해서 받았느냐면서 한참 말을 걸었다. 매니저는 여자들의 팔이고 허리고 엉덩이고 가릴 것 없이 주물러댔는데 그런데도 싫은 내색을 못 하는 여자들의 표정을 보며 남자의 권위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여자들은 대기룸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거나 화장을 고쳤다. 한 명은 테이블에 엎어져 잠을 청하려고 했다. 그중 몇 명은 매니저 뒤에 서 있는 나를 마뜩잖은 눈으로 쳐다봤다.
“오빠, 쟤는 뭐야. 새로 온 애야?”
윤기 번지르르한 검은색 긴 생머리가 얼굴은 물론 허리춤에까지 찰싹 달라붙은 여자가 물었다.
“오늘 새로 온 식구다. 홍균 형님이 아는 동생이라 소개받아서 왔고, 뭐 당분간은 웨이터를 맡을 거야. 식구처럼 잘해주고 괴롭히지 말고!”
“우리가 뭐 놈팡이들 건드리는 년인가. 어째 그렇게 들린다?”
갈색 머리 끝만 웨이브 펌을 한 도도한 분위기의 여자가 말했다.
“뭐 꼭 그런 뜻은 아니지만 틀린 말도 아니잖아? 하하하.”
매니저는 양손을 들어 어깨를 들썩거리며 대답했다.
“준이야, 인사해라. 뭐 꼭 다들 인사시키는 건 아닌데 니 경우는 좀 특별하다.”
“안녕하세요. 준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많은 여자 앞에서, 그것도 짧은 옷차림에, 언제든지 달려들어 껴안을 것 같이 요염하고 색기로 가득 찬 여자들 앞에서 인사하는 것은 민망했다.
‘휙휙.’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몇 명은 탄성이나 짧은 신음을 내기도 했다.
“샌님같이 말쑥하니 생겨서 무슨 일을 하겠다고.”
“홍균 오빠가 데리고 왔다는데 어떻게 아는 사이야?”
“뭐야, 인사하는 게 너무 뻣뻣하잖아. 내가 좀 녹여줄까? 깔깔깔.”
“피부 하나는 끝내주게 좋네. 근데 좀 어려 보이지 않아?”
여자들은 모두 한마디씩만 했을 뿐인데 룸 전체가 들썩거렸다. 소음 때문에 발생한 공명과 자극적이고 짙은 갖가지 향수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중 한 명이 내게 직접 물었다.
“몇 살이니? 고향은 어디고?”
둥그런 얼굴을 짙은 화장으로 덧칠한 여자였다.
“18살이에요. 서울 출신이고요.”
“어머! 18살이래!”
“꺄악!”
“너무 어린 거 아냐?”
“학교는 짤린 건가?”
“누나라고 불러. 잘 보이면 누나가 젖 좀 줄게, 낄낄낄.”
짧은 세미 보브 컷 스타일의 여자는 자신의 가슴을 두 손으로 비비며 말했다.
“막내보다 한 살 어리네. 야! 막내야! 너 친구 왔다!”
“쟤가 왜 내 친구예요? 동생이지….”
막내라는 여자는 가장 앳돼 보였는데 교복과 비슷한 스타일, 색깔의 투피스에 분홍색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준이는 나가서 일하고. 넌 여기서 미성년자라고 하면 안 돼. 알았어? 이제 자기들도 영업 준비해야지. 자자, 서둘러.”
매니저 말대로 먼저 룸을 나왔다. 매니저가 다독거리며 재촉하자 한참을 떠들던 여자들은 끼리끼리 흩어졌다. 5명은 1번 룸으로, 그 외 몇몇은 밖으로 나갔고 나머지는 그대로 앉아 수다를 떨거나 담배를 피웠다.
자정까지 나는 거의 아무 말 없이 열심히 일만 했다. 술을 나르고 안주를 나르고 밴드를 불러 룸에 넣고 술 취한 손님을 화장실까지 배웅하고, 3번 룸 손님들이 나가면 열심히 테이블을 닦고 바닥에 흥건한 술과 오물들을 씻어냈다. 같이 일하는 네 명의 남자와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술에 흠뻑 취한 여자들에게 드링크제를 강제로 먹이고 술을 깨게 하는 것도 웨이터 임무였는데, 이 일이 제일 힘들었다. 화장실에서 토악질하고 있는 여자를 발견하면 대기룸으로 데리고 와 물수건으로 씻기고 따듯한 물을 마시게 하고 눕혀 놓아야 했다. 처음 대면했을 때 나더러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던 여자는 이미 화장 일부가 지워지고 머리는 반쯤 풀어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나는 정성스레 그녀 얼굴을 닦고 의자에 눕혀 잠시라도 잠 잘 수 있게 했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일차로 영업이 끝나자마자 대청소를 시작했다. 일일이 바닥을 닦고 세팅을 다시 하고 화장실을 청소했다. 일을 다 마치자 새벽 1시 30분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퇴근하기 위해 준비하려는데 같이 일하는 네 명의 남자들은 도무지 퇴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기, 퇴근 안 해요? 예정보다 한참 늦어졌는데….”
키가 크고 선이 굵은 얼굴을 한, 상철이라고 이름을 밝힌 남자에게 물었다.
“먼저 퇴근해. 우리는 7시까지 일하거든.”
“아침 7시요?”
“그런 게 있어. 매니저 형한테 인사하고 먼저 가. 수고했어.”
아마도 2차 영업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호스트 영업을 할 때도 선수가 아닌 웨이터로서 일할 것이다. 돈도 그만큼 더 많이 벌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계속 있고 싶었다. 하지만 몸도 피곤했고 첫날이니 나중에 형에게 부탁하자고 생각하며 입구를 나설 때였다. 입구 쪽 카운터에 앉아 있던 매니저가 나를 불렀다.
“벌써 가려구?”
“네, 일이 끝났으니까요.”
“집은 어디냐? 갈 곳은 있어?”
“신설동 근처에 살아요.”
“그래? 준이 너도 아침까지 같이 일하면 좋겠는데.”
매니저는 손톱을 다듬으며 말했다.
“처음인데 괜찮을까요? 아직 일이 서툴러서….”
“사람도 부족한데 무슨 상관이야. 오늘 그 정도면 잘한 거고. 어때, 할래 말래?”
“저는 괜찮아요.”
“오케이. 그러면 오늘부터 아주 말 나온 김에 아침까지 일하는 거로 하자. 급여는 따블로 올려줄게. 그럼 됐지?”
“네.”
“그럼 다시 가서 손님 받을 준비해.”
“알겠습니다.”
대기룸은 비었지만 양주 냄새는 아직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벗어놓은 브래지어가 의자 한쪽 구석에 널려 있었다. 먹다 남은 음료수 캔들이 테이블 위에 굴러다녔다. 침과 여러 종류의 담배꽁초로 가득한 재떨이도 있었다. 엉망이었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콜라 캔을 하나 따서 마시며 방을 치우고 있을 때였다. 입구 쪽에서 웅성웅성하더니 대기룸 문이 열리며 열댓 명쯤 되는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어? 너, 준이 아니야?”
용욱이었다. 오랜만에 본 얼굴보다 금빛 목걸이와 비싸 보이는 시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근사한 회색 정장에 머리는 온통 무스를 발라 올백으로 넘긴 생소한 모습이었다.
“용욱이? 웬일이야! 반가워!”
시험이 끝나고 근 한 달하고도 반이나 보지 못했다. 우리 둘은 서로 얼싸안으며 인사를 나눴다.
“너도 여기서 일하는 거야?”
“오늘부터 일하게 됐어. 홍균이 형 덕분에.”
“근데 옷은 왜 이래?”
용욱이는 셔츠와 바지만 입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말했다.
“왜? 뭐가 어때서?”
“뭐가 어때서라니. 선수가 이렇게 입으면 안 되지. 진작 만났으면 가르쳐 줬을 텐데.”
“아, 난 웨이터로 일해. 용욱이는 아니겠지?”
“그렇구나. 난 또. 하하하. 아무튼 반갑다.”
십여 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자 밖에서 영업 안 할 거냐며 다그치는 매니저 목소리가 들렸다. 일이 끝난 후에 보기로 하고 룸을 나왔다. 그때 복도에서 술 냄새가 풀풀 나는 여자 세 명이 2번 룸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봐, 이봐. 여기 마담 어디 갔어?”
미끈한 재질의 자주빛을 띤 씨드 드레스를 몸에 꽉 끼도록 입은 여자는 벌써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인지 혀가 반쯤 꼬인 음성을 내뱉었다. 그 음성이 마치 영어를 못 하는 아이의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네, 곧 모셔오겠습니다. 먼저 룸으로 들어가세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내가 요한이 오빠 잘 아니까 잘 모셔라.”
“네.”
여자의 간들거리면서도 깔보는 듯한 교만한 태도가 거슬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남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편해지니까. 나는 매니저에게 2번 룸으로 여자 손님 세 명이 막 들어갔다고 전했다.
“그래? 혹 인상이 어떻든?”
“매니저님을 안다는 분은 키가 170cm에 이십 대 중반으로 보였어요. 키가 커서 그런지 살집도 있어 보였고….”
“손등에 커다란 점 있었지? 얼굴은 못생겼고?”
“손등까지는 못 봤고요, 얼굴은 뭐 그럭저럭….”
“쌍, 뭐가 그럭저럭이야. 완전 진상이지! 화장실 갔을 때 올 게 뭐람. 제기랄!”
매니저는 답답하다는 듯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년들 북창동에서도 알아주는 진상들이라고. 외상값도 오백 넘게 있는 것들인데 한동안 안 오나 했더니 또 지랄하겠군. 아, 씨팔! 대기실 가서 애들 세 명씩 나오라고 해!”
매니저는 곧장 2번 룸으로 향했다. 나는 대기룸으로 가서 용욱이에게 손님이 왔고, 매니저가 3명씩 오라고 했다고 전했다.
“응, 고마워.”
“어이, 둘이 아는 사이야? 용욱아, 나한테도 좀 소개해 줘야지.”
용욱이 옆에 있던 한 남자가 우리 둘을 보면서 말했다.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는 운동을 했는지 떡 벌어진 어깨에 덩치가 좋아 보였다. 커다란 중절모를 쓰고 있었는데 머리는 삭발한 듯이 보였다.
“같이 검정고시 공부한 친구예요. 준이라고 해요. 이 녀석 수재인데 왜 이런 곳에 와 있는지 모르겠네. 하하.”
“준이라고 합니다.”
“어, 그래. 홍균이 형님과 막역한 사이라고? 무서운 형님이 왜 너 같은 녀석을 좋아하는지 모르겠군. 아무튼 반가워. 난 간담이야.”
남자는 자신이 간담이라고 밝혔다.
“네? 간… 담?”
“왜, 웃기냐? 성이 간 씨고 우리 아버지가 이름을 담이라고 했다. 나도 맘에 안 드는 이름이야. 이름이 좆같아서 이런 곳에 있는 것 같다고 나도 늘 생각해. 낄낄.”
“네….”
“그냥 담이 형이라고 불러. 아님 그냥 형이라고 하던가.”
“알았어요.”
“자자, 용욱이, 민수, 철완이가 선발대다. 그 다음에는 상기, 현수, 고성이….”
간담이 가장 맏이로 선수들을 총지휘하는 듯했다. 보통 이런 사람을 마담이라고 하는데 간담과 마담이라니.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선수들은 간담이 조를 짠 차례대로 2번 룸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용욱이를 제외한 두 명이 다시 돌아왔고 간담은 그다음 조를 보냈다.
“다행이야. 이 진상들 또 왔어. 초이스 된 용욱이만 죽어났지 뭐.”
민수라고 했던 남자가 말했다.
“야, 난 그래도 차라리 돈을 버는 게 낫겠다. 며칠째 뺀찌만 먹고 이게 뭐야.”
시커먼 얼굴의 철완이가 대답했다.
“그나저나 너, 준이라고 했지? 주방에서 찾던데?”
민수가 전해준 대로 주방에서 찾는다고 해서 그들의 대화를 더 들을 수는 없었다. 누구는 선택되고 누구는 버림받고, 손님에 따라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이 즐거워한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룸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다.
주방에 가서 주방장이 내놓은 간단한 기본 안주와 맥주를 가지고 룸으로 향했다. 노크하고 들어가자 문 옆에는 두 번째 조로 지명됐던 남자들이 서 있었다. 룸 안쪽에서는 여자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남자들의 소개를 들으며 즐거워했다. 매니저를 빨리 데리고 오라고 했던 그 여자 옆에 용욱이가 앉아 있었다. 매니저와 간담은 앞자리에 앉아서 여자들의 흥을 돋우는 애드리브를 하고 있었다. 나는 한쪽 구석을 지나 테이블에 술과 안주를 올려놓았다.
“야야, 소개를 그따위로 밖에 못하냐. 그래서 언니들이 어디 웃겠어?”
여자들을 욕했던 매니저는 여자들 앞에서는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다.
“아, 아. 죄송합니다. 누님들, 저는 부천에서 한때 오토바이 하나로 이름을 날리던! 현수라고 해요. 오늘 밤 누님들과 쌔끈하게 오토바이! 한 번 몰고 싶습니다!”
현수라는 남자는 웃옷을 벗더니 그것을 가랑이 사이에 끼어 양옆으로 흔들어댔다. 그의 입에서는 오토바이 시동을 거는, 김빠진 소리가 터졌다. 각도 있게 허리를 흔들기까지 했다. 유치하고도 어색했지만 여자들은 크게 웃으며 만족해했다.
“한번 맛보면 평생 못 잊는다는 고성이! 인사 올립니다. 제가 왜 고성이냐! 소리만 지른다고 다 고성이! 아닙니다. 누님들이 언제든지 올라타도 고! 고! 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고! 밤새 성난 사자처럼 누님들을 만족시켜 준다고 성! 그래서 고성입니다. 외로운 밤, 누님들을 책임지고 모시겠습니다!”
고성이라는 남자는 스무 살 후반은 돼 보였지만 여자들을 향해 끝까지 누님이라 했다.
“뭐야, 쟨… 늙었네.”
“오빠 아니야, 오빠? 왜 우리가 누나야? 깔깔깔.”
역시나 여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외모는 현수보다 훨씬 잘 생겼지만 단지 나이가 문제였다. 소개가 끝나자 매니저는 남자들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다.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눈치를 주고받았다. 용욱이를 선택한 여자가 매니저에게 귓속말했다. 잠시 매니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간담에게 다른 아이들을 불러오라고 시켰다. 나도 간담과 함께 룸을 빠져나왔다.
“쌍년들, 졸라 지 년들 생긴 대로 놀 것이지 왜 다 뺀찌를 놓고 지랄이야. 선수들도 부족한데. 야! 영민이, 종수, 태현이! 빨리 나와!”
간담은 화가 단단히 난 듯했다. 그 뒤로 세 명의 남자들이 룸으로 들어갔다. 별달리 룸에 갈 일이 없었던 나는 입구 옆 카운터 의자에 앉았다. 두 차례 더 들락날락한 후에야 파트너가 정해진 듯 간담과 매니저가 룸에서 나왔다. 여전히 진상인 여자들의 귀에는 안 들릴 정도로 상스러운 욕을 해대면서.
“야, 준이! 오늘은 상철이가 마무리하면 되니까 그만 가 봐. 오늘 온다는 손님도 이젠 더 없어.”
새벽 5시 무렵이 되자 매니저는 그만 가도 좋다고 했다. 이미 룸 안으로 맥주 10병, 양주 7병과 과일 화채, 돈가스와 같은 안주가 들어간 뒤였다. 다들 많이 취했는지 아니면 배가 부른 건지 노래방 기계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게임도 했다.
“청소는요?”
“내일 저녁에 일찍 와서 하면 돼. 그만 가봐.”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 말하는 매니저는 꽤 많이 피곤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매니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나는 옷을 갈아입고 업소를 서둘러 빠져나왔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에 다다랐을 때 용욱이에게 인사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내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며 첫차를 탔다. 집에 오니 6시가 다 됐다. 여전히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이갈이하는 미루 덕분에 집안은 온통 엉망이었다. 전선을 몇 개 물어뜯었고 침대 오른쪽 다리를 갉아서 그 나무 부스러기들이 널려 있었다. 엉망이 된 집을 보면서 허탈했지만 나를 보고 반기는 미루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녀석은 밤새 기다리다 지쳤는지 다른 날보다 더욱 반겼다. 쉴 새 없이 손을 핥고 바지 끝을 물어대는 녀석까지 없었다면 이 집에 발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고독한 느낌도 적응한 걸까. 별다른 감흥도 없고 더 이상 진아를 기다리지도 않고 있음을 문득 알았다. 단지 오늘 있었던 룸에서의 일들과 여자들, 새로 만난 사람들의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할 뿐이었다. 낮과 밤이 뒤바뀐 첫날이라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뒤척거리다 겨우 잠이 들었을 때는 해가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by 이준 -Copyrights ⓒ말산업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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