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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대통령이다] #27 사제라면서 예언의 달란트는 없는 거냐고 자존심을 긁고 화를 돋웠다

이용준
  • 입력 2017.07.10 00:00
  • 수정 2020.07.15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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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라면서 예언의 달란트는 없는 거냐고, 남자가 왔으면 분명히 7을 봤을 거라며 자존심을 긁고 화를 돋웠다. 게다가 이젠 경마가 재미없다고도 했다. 마권을 박박 찢어발긴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자정이 가까워지는데도 여자는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자는 여자의 얼굴은 비교적 평온해 보였다. 깊게 패었던 미간도 평평해졌고 입가에는 웃음이 살짝 깃들여진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장난기 가득한 아이의 미소였다.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묻고 싶었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1400m 핸디캡 경주, 3세 이상 국산마 14두가 출전했다. 이 가운데 최근 1400m 경주에서 3위 내로 입상한 말은 1번 ‘퍼펙트샤인’, 3번 ‘마하나임’, 9번 ‘포트레이’, 10번 ‘선기어’ 그리고 4번 ‘일기당천’이다. 경주 전, 변수는 이미 생겼다. ‘포트레이’는 왼쪽 앞다리를 절면서 출전 취소가 결정됐고 39조에서 야심 차게 밀었던 ‘퍼펙트샤인’은 문세영 기수가 전 경주에서 낙마하며 박을운 기수로 변경됐다.

‘일기당천’이 예시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여자는 환호했다. 지난 경주에서 와이어투와이어 우승을 한 뒤 빠르게 승군해서 기대치가 높다. 남자는 지난 경주에서 이 녀석을 히든카드로 지목했었고 예언은 적중했다. 오늘도 역시 컨디션이 좋다. 4kg이 늘었고 고개를 좌우로 치대는 게 호기심이 넘쳐 보였다.

경마 예상지에서는 ‘일기당천’을 빼고 13번 ‘엘캄페온’을 위의 4마리에 더해 5두 마번으로 추천했다. 복병으로는 12번 ‘엠제이하트’를 손꼽았다. 출전한 말들이 능력 차이가 적어 혼전이 예상된다지만 실은 2군에서 기복이 심한 녀석들만 모인 편성이다. 내가 보기에 3번 ‘마하나임’과 10번 ‘선기어’, 13번 ‘엘캄페온’과 12번 ‘엠제이하트’ 그리고 ‘일기당천’의 싸움이다.

대가리는 단연 ‘마하나임’이다. 일본 최강 씨수말인 ‘선데이사일런스’의 손자로 7번 출전에 5번 우승을 했고 71.4%라는 경이적인 승률을 보이고 있다. 승군을 했어도 승산이 있다. 3연승 도전이다. 종반 탄력이 좋은 선행 습성을 가진 말이기에 선행이 약한 이번 경주 편성에 있어 유리하다. 선행을 잘 치고 나가면 추입도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마하나임(Mahanaim)이라는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지명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뜻은 대군, 두 군대(two camps)로 야곱이 오랜 도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으로 오던 도중 그곳에서 하느님의 군대, 천사를 만난 데서 유래됐다. 비겁한 야곱은 팥죽 한 그릇 때문에 형 에사우의 분노를 사 고향을 떠났고, 작은 아버지이자 장인이기도 한 라반을 속이고 자매 사이인 두 아내를 거느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던 때였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자신을 죽이려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곳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또 마하나임 출신 여자들은 춤을 잘 춘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를 종합하면 마하나임은 피난처로써 새로운 일을 작당할 수 있는 안전지대다. 이 녀석을 대가리로 인정하기로 했다.

다음에 주목할 녀석은 10번 ‘선기어’다. 기대치만큼 최근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비카’와 ‘아라비안주얼’의 혈통을 이어받아 잠재력을 보유했다. 10주 만에 출전하며 휴양 기간도 충분했고 훈련량도 적절하다. 그다음은 추입력이 좋은 13번 ‘엘캄페온’이다. 이름에 걸맞게 기대치도 높다. 훈련평도 좋았는데 꾸준히 강도 있는 훈련으로 전력을 다졌고 유연한 발놀림에 스피드감도 좋다. 특히 9조 담당 조교사가 이번 경주에 2번 ‘백운산성’과 동반 출전시키며 견제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1군까지 승승장구했던 ‘봉암사’가 최근 퇴사해 상금을 벌어다 줄 말에 혈안이 된 마주의 주머니를 채워야 할 의무 때문이기도 하다. 12번 ‘엠제이하트’는 비교적 높은 몸값과 혈통 기대치를 자랑하지만, 그간 보여준 게 없었다. 하지만 이번 경주는 적정 거리인 1400m이고 젊고 유능한 서승운 기수로 교체하며 승부수를 띄웠다. 3위로만 들어온다면 짭짤한 배당을 안겨줄 녀석이다.

말과 기수가 예시장을 벗어나 경주로에 들어섰다. 배당판이 요동쳤다. 가장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됐던 3번은 역시나 단승식 1.8배, 연승식 1.2배를 기록하며 낮은 배당을 보였다. 그다음은 10번으로 단승식 5.4배, 연승식 1.8배다. 이미 마음에서 제외한 1번은 6.5배와 2.0배를 찍고 있다. 반면 ‘일기당천’은 15.6배와 4.3배, ‘엘캄페온’은 무려 25.6배와 5.5배, ‘엠제이하트’는 31.6배와 4.5배다. 올 것이 왔다. 남자가 없었기에 여자를 실망시킬 순 없다. 나도 말을 보는 눈이 있고 예언에는 더욱 도통하지 않던가. 그래도 여자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 여자의 직감을 무시해서는 모든 일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마하나임의 성경적 의미를 설명하며 추천했으나 여자는 거부했다. 그런 의미라면 챔피언이 무난하다며 ‘엘캄페온’은 어떠냐고 했다. 훈련이 좋고 마방 승부도 충분했기에 합리적이라고 판단해 동의했다.

복승으로는 3-1, 3-10이 팔리고 있다. 쌍승도 마찬가지다. 삼복승은 1-3-10, 1-3-4순이다. 우리가 예상한 것처럼 3, 4, 10, 13, 12 그리고 1과 7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1은 무조건 없다고 봐야 한다. 경마 바닥이 비리의 온상이라지만 말의 능력 70%와 기수 능력 30%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경마는 수백만 가지의 요소를 추리해 도출하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국가가 인정한 합법적 도박이다.

마권 발매 마감 1분을 남겨 놓고 이번에는 상한액인 10만 원만 베팅하자고 여자가 솔선수범한다. 3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복승으로 3-4와 3-13에 5만 원씩 걸었다. 3이 워낙 인기가 좋아 배당은 12.8배와 15.7배에 그쳤다. 기껏해야 60만 원, 80만 원짜리다. 나는 돈이 되는 삼복승에 10만 원만 하기로 했다. 3-4-13, 3-4-10, 3-13-12, 4-10-12, 4-13-12에 각각 2만 원씩 걸었다. 각각 101.5배, 22.7배, 78.5배, 401.5배, 마지막은 무려 1130.3배의 배당이다. 3과 4는 확실하고 그다음으로 12와 13 중에 하나만 들어오면 게임은 끝난다.

베팅을 끝내자마자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초반 혼전 속에 7번이 도주하지만, 곧 4번 ‘일기당천’에게 선두 자리를 빼앗겼다. 녀석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3번이 3위, 10번이 4위, 1번이 5위로 뒤따른다. 4코너를 돌면서도 ‘일기당천’은 선두를 놓치지 않았다. 직선주로에 들어서자 갑자기 7과 3의 대결로 압축됐다. 거짓말처럼 다른 모든 말들은 사라졌다. 결승지점 200m를 앞두고 3이 역전에 성공,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7이 3/4마신차로 2위, 그다음은 5마신 차 이상으로 벌어져 10, 8, 1순으로 안착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7번 ‘선더캣’이 2위를 차지하면서 마권은 종이 쪼가리가 됐다. 7은 두 달 전 거세했고, 최근 모든 경주에서 하위권을 전전하던 똥말이었다. 이번 경주에서도 가장 최하위로 예상됐다. 훈련도 특출난 점이 없었고 예상가들 누구도 7을 잡지 않았다. 장난친 게 분명하다. 곳곳에 있는 모니터를 통해 재방송되는 경주 영상을 다시 유심히 보니 이유를 알 것 같다. ‘일기당천’을 몬 기수는 마지막 직선주로에 들어서자마자 고삐를 헛당겼다. 속도는 당연히 급속도로 처졌다. 꾼들이 흔히 말하는 속칭 ‘빼먹기’를 한 것이다. 겨우 8위를 기록했다. 12번 ‘엠제이하트’는 13등, 최하위였다.

배당판을 다시 보니 특이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7의 능력은 최하위였는데도 단승 15.0배와 연승 3.9배로 배당에서 6위를 기록했다. 즉, 이 녀석이 말판에서의 승부수, 장난의 대상이었다는 것이 수치로 증명된 셈이다. 아는 인간들끼리 소스를 공유해 베팅하지 않고서는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다. 말의 능력이 그 말을 모는 기수, 그 뒤에서 조종하는 조교사 그리고 그들의 밥줄인 마주의 집단 음모가 경주 결과를 뒤흔든다는 사실이 판가름 난 것이다. 뭐 그래 봤자 복승 18.3배, 삼복승 25.3배다. 물론 단승은 1.8배, 쌍승은 24배에 그쳤다. 배당은 남자가 단박에 맞췄던 지난 경주보다 약간 좋을 뿐이다.

겨우 20만 원, 그것도 내 돈을 날렸을 뿐인데 여자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애써 위로했지만, 여자는 돈이 아깝다고, 다음이 또 언제 있을 줄 아냐고 칭얼거렸다. 사제라면서 예언의 달란트는 없는 거냐고, 남자가 왔으면 분명히 7을 봤을 거라며 자존심을 긁고 화를 돋웠다. 게다가 이젠 경마가 재미없다고도 했다. 마권을 박박 찢어발긴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여자의 기분과 감정이 그대로 전염돼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디로든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그곳이 브니엘 동쪽 10km 지점에 있는 마하나임이어도 상관없다. 경마 하나 맞추지 못하면서 무슨 사제를 하려고 했던 건지, 자기 여자 관리 하나 못하면서 사랑 타령은 또 뭔지 나 자신이 극도로 혐오스러웠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누구에게든 따져 묻고 하소연해야만 살 것 같았다.

by 이준 -Copyrights ⓒ말산업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편집자 주
‘여자가 대통령이다’는 여성을 대표할 수 없는 한 여자의 유령이 한 나라를 집어삼킨 현재, 이 시대를 살아 내는 한 민초 여자와 동갑내기 신부 박용성, 경마 기자 이영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재소설입니다. 작가는 “간통죄가 합헌이어도, 여자는 위헌”이라며, “우리를 대표한다는 대통령에게, 우릴 창조한 신에게만 유죄라고 통보한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습니다.

제주로 떠난 이영민의 마지막 편지와 이미아, 박용성의 ‘하룻밤 일기’가 담긴 #22, 이영민을 찾으러 제주로 떠난 박용성의 방황이 담긴 #23, 이미아의 제주 고향집에서 함께 살며 그녀를 기다리는 두 남자의 일상을 담은 #24, 제주의 한 방석집에서 이미아의 흔적을 찾고 성매매하는 이미아를 찾아 나선 박용성의 이야기 #25, 중국 VIP 손님으로 가장하고 결국 호텔에서 조우하게 된 이미아의 그간 행적과 박용성의 구마(驅魔)의식이 담긴 #26은 향후 발간할 책 본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7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참고로 본문에서 언급된 경주는 2015년 2월 1일 일요일 서울 제10경주입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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