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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대통령이다] #4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용준
  • 입력 2017.02.24 00:00
  • 수정 2020.07.1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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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키의 성 이냐시오께서는 믿음은 시작이고 사랑은 완성이라고 하셨지요. 믿음이 없어도, 믿음이 깨져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본질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여자가 대통령이다’는 여성을 대표할 수 없는 한 여자의 유령이 한 나라를 집어삼킨 현재, 이 시대를 살아 내는 한 민초 여자와 동갑내기 신부 박용성, 경마 기자 이영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새 연재소설입니다. 작가는 “간통죄가 합헌이어도, 여자는 위헌”이라며, “우리를 대표한다는 대통령에게, 우릴 창조한 신에게만 유죄라고 통보한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습니다. - 편집자 주.

한 주가 또 훌쩍 지났다. 프란체스코 교종이 시복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순교자를 기억하고자 마련한 시복 경축미사가 같은 교구인 정자동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될 예정이라 행정 지원을 하게 됐다. 말이 행정이지 잡다한 업무가 많았다.

잡일은 되려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게 한다. 내게는 그 여자였다. 병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여자는 온통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묵주 기도를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그때뿐이었다. 직접 대면해 다그치고 함께 기도해야만 생각이 그칠 것 같았다.

“수녀님, 클라라 자매님이 오늘 미사에 오거든 꼭 붙잡아 주셔요. 성당에 다시 나오기 시작했는데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신부님.”

교중미사에서 보이지 않았고 청년미사 전 고해 시간에도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미사 직전에 전교수녀에게 미리 부탁해 놨었다. 예상대로 여자는 남자와 함께 청년미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사를 집전하는 내내 그 둘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영성체 시간에도, 봉헌 시간에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어딘가 뚱해 보였다.

“신부님, 클라라 자매님과 함께 온 형제님을 신입교우실에 모셨습니다.”
청년미사 후 김안나 전교수녀가 조용히 찾아와 말했다. 서둘러 사제복을 갈아입고 본당 건물을 벗어나 구(舊)성전 지하로 향했다. 신입교우실에 들어서니 여자는 없고 남자만 멀뚱멀뚱 서서 서가에 꽂힌 책을 구경하고 있었다.
“형제, 반갑습니다. 저는 이 성당의 보좌신부인 박용성 프란체스코 사제입니다.”
“아, 네.”
남자는 책에서 눈을 떼지도, 통성명을 쉽게 허락하지도 않았다.
“지난주에 영성체를 받으러 나오셨었죠. 개신교도라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제야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기이했다. 당당하게 개신교인이라고 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우울하다 못해 침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습니다.”
“성당에는 어떻게 나오시게 됐죠? 개종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데 개종이라니요. 여자 친구를 위해 온 것뿐입니다.”

말하는 표정이 부자연스러웠다. 얼굴 왼편이 굳어 입술이 부자연스럽게 삐죽거렸고, 한쪽 눈만 깜빡이는 게 천국의 인(印)을 얼굴에 새긴 것 같았다.
“이미아, 아니 클라라 자매님과 연인 사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여자가 나타났다. 나를 보고는 흠칫하더니 금세 자세를 고치고 평범한 미소를 드러냈다. 비웃는 건 아니었지만,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이 왠지 비난하는 것 같았다.

“클라라 자매님… 맞지요?”
“오, 신부님! 저를 기억하시네요.”
여자가 입을 열었지만, 담배 냄새만 풍겼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최근 미사 때 몇 번 본 것 같아서 소식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 친구가 성당에 가보고 싶다 해서 오게 됐어요.”
그 목소리다. 분명하다.

“친구분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니 참 보기 좋습니다.”
“자기는 기독교철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해 여러 종교에 관심이 있대요. 나야 뭐, 교회도 성당도 잘 알지만 이 사람은 성당을 모르잖아요.”

여자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남자는 다시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시군요. 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에 관해 논문을 썼지요.”
“전 펠라기우스주의자입니다.”
“의외입니다.”
“하, 그러면 뭐해요. 지금은 경마와 술에 빠져 곤조나 부리며 사는걸.”

자기가 빠진 대화를 용납하기 싫었던 걸까. 열일곱 살에 사제가 될 것을 서원한 이후 연애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연인을 깎아내리는 말투가 여자의 일상인 것만은 확실했다. 부끄러움은 모르는 듯했다.

일상을 찌르면 기억이 된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걸음 폭에 익숙해질 때가 곧 일상이며 기억인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자의 유별난 언어와 행동에 이미 적응한 건지, 자신의 현재에 순응한 건지는 모르겠다.

“두 분이 만난 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나 보네요. 클라라 자매님은 그간 어떻게 지냈습니까.”
“1월에 직장을 쫑 내고 쉬다가 제주도에 가서 좀 살았어요. 제 고향이 제주도예요. 중간에 이 사람을 만나서 이제 100일 좀 넘게 연애도 하고 있고요.”
“자유로운 영혼이십니다. 주님의 은총이 늘 함께하기를….”
“신부님, 전 사실 아직 믿음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 사람이랑 잠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날 때 꼭 성당에 가야 한다고 강요해서 따라다니는 것뿐이에요. 그게 참 야먀 도는 일이긴 한데 원하는 대로 해주려고요.”

고해실에서 사랑받은 죄를 사해달라고 한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단어 구사력도 언뜻언뜻 거칠었다. 저 여자의 진심은 무엇일까. 마치 연극을 하는 것 같았다.

“믿음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사랑처럼 말이죠. 감사하게 생각할 일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여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부님은 믿음과 사랑 중에 어떤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느님의 말씀에도 있듯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난 믿음이 먼저라고 생각해요.” 여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티오키의 성 이냐시오께서는 믿음은 시작이고 사랑은 완성이라고 하셨지요. 믿음이 없어도, 믿음이 깨져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본질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남자가 화답했다.
“오래전 이야기가 요즘 시대에 통하나요? 믿을 수 있어야 사랑할 수 있는 거예요.”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사람도 믿을 수 없는 법이다. 보이는 사람도 못 믿는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믿느냐고 따지는 건 믿는다는 고백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신적인 사랑을 인간에게 기대하는 근본 전제의 오류를 자주 범한다. 사랑받기만을 원하면서도 내가 그 사랑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교만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다.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온갖 이성을 만나면서도 자신이 바라는 사랑은 없다고 믿고야 마는 오류를 정당화한다. 사랑하며 상처를 받는 것은 싫기에 에로스에 그치기도 한다. 상대를 이용하고 즐기다가 끝낼 뿐이다. 사랑을 모르는 게 아니라 사랑의 이데아, 아가페를 알고 원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닫아 버린다. 달콤함과 책임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계에 그칠 수밖에 없는 사랑만을 겪어서 사랑의 원형을 믿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경우도 흔하다.

우리 삶은 이데아의 모방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믿음이 없는 곳엔 물론 사랑도 없다. 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믿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에로스와 믿는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가페는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래서 여자도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자조한 걸까. 믿음을 사랑하지 않아서 사랑을 믿거나 믿지 않는 최악의 범주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여자는 모를 것이다. 비식자층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무지의 결과다. 물론 오늘날 의외로 많은 사람 그것도 식자층이 라임에 맞춰 띄어쓰기하는 경우가 많아지긴 했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연인들 간의 에로스, 친구들 간의 필리아, 그리고 가장 완벽한 사랑의 모델인 아가페….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에로스에서 아가페로 넘어가는 단계에는 인내와 믿음이 필요하고 서로 신뢰해야 하는….”
“신부님, 오늘 우리가 시간이 많지 않거든요. 카지노에 놀러 가기로 했어요. 코에 바람 좀 넣어야죠. 더 하실 말씀 없으시죠?”

어리석음을 지적하고자 한 마음을 알아챈 걸까. 그래서 더는 듣기 싫다는 걸까. 중간에 말을 끊은 여자는 회피하려고 들었다.

“앞으로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눕시다. 예전처럼 청년들과 함께 어울리며 공동체성을 경험하고 신앙의 성숙을 이뤄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생을 사는 이유, 창조된 이유는 결국 영혼의 성장 때문입니다.”
“좋은 말이지만 지금 전 이 사람이면 충분해요. 예전 사람들은 별로 보고 싶지 않고요. 보잘것없고 다 잊었는걸요. 천주교인들이라고 별거 있나요. 그래도 당분간 성당은 나올게요.”

여자로서의 현실감, 강자를 선택하려는 생존 본능이 강했다.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 사랑의 힘으로 삶을 살아 내는 것 모두 여자에게는 선택 사항에 지나지 않는 걸까. 하지만 그 바탕에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여자를 지배하고 있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홍정환 시몬이 말한 어두운 기운이다.

“주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고 발걸음을 이끌어 주셨으니 기대가 됩니다. 형제도 자주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럴 것 같군요.”

두 사람은 또 서둘러 길을 떠났다. 주차장까지 배웅했다. 경마장 보도 차량이 맞다. 저 남자의 정체는 또 무엇일까. 개신교인에 철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경마를 하고 이혼한 여자와 사귀는 이유는 왜일까. 스스로 구덩이를 파며 여자에게 끌려가는 이유가 짐작되지 않는다. 상처가 커서 상처가 없는 척 가장하려는 것일까. 남자도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지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여자를 다그치지도 못했다. 기도하자는 말도 잊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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