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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대통령이다] #1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되는데 또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용준
  • 입력 2017.02.03 00:00
  • 수정 2020.07.1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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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대통령이다’는 여성을 대표할 수 없는 한 여자의 유령이 한 나라를 집어삼킨 현재, 이 시대를 살아 내는 한 민초 여자와 동갑내기 신부 박용성, 경마 기자 이영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새 연재소설입니다. 작가는 “간통죄가 합헌이어도, 여자는 위헌”이라며, “우리를 대표한다는 대통령에게, 우릴 창조한 신에게만 유죄라고 통보한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습니다. - 편집자 주.

#1.
오른손으로 나무 덧문을 열었다. 수십 개의 구멍 사이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달가량 목소리는 쉬지 않고 계속됐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굳게 믿으며 그동안 지은 죄를 뉘우치고 사실대로 고백하십시오.”
“고해한 지 일주일입니다. 주님께 제 죄를 고백하러 왔습니다.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되는 제가 이번 주에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떨렸지만, 단호했다. 누구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았기에 죄라고 여기는 걸까.

“자매님, 사랑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사랑받지 못할 자격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

침묵은 길어졌다.

“더 하실 말씀은 없나요? 그러면….”
“잠깐만요, 신부님. 그냥 저의 잘못을, 사랑받은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해 주세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까지도 대속해 준다면서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을 받는 건 은총입니다.”
“부탁할게요. 신부님은 제 편이 되어 주셔야 하잖아요….”

여자는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사 집전까지 시간이 얼마 없어 일단은 다음에 대화하자고 한 뒤, 지혜서를 읽으라고 덧붙였다. 기분이 상했는지 여자는 고해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제야 기억난다. 추측컨대 그 여자 같다.

4년 전, 여자는 그 자태를 드러냈다. 성당은 처음이라고 했지만, 하느님에 대해서는 묻질 않았다. 청년들과는 곧잘 어울렸다. 찬양이 좋다며 성가대도 지원했다. 강해 때면 기다렸다는 듯 성가대석에서 꾸벅꾸벅 졸았는데 신비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 같아 내심 못마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살 연하의 형제와 사귄다는 얘기도 들렸다. 세례성사는 받았지만, 견진성사 교육을 하던 중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형제의 아이를 임신해 성당을 떠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하지만 형제는 떠나지 않았다.

그 여자가 한 달 전부터 다시 성당을 찾았다. 프란체스코 교종께서 4박 5일간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간 직후였다. 늘 같은 목소리들, 별다를 것 없는 죄의 고백만 들렸기에 오랜만에 전해진 여자의 소리는 반가웠다. 그런데 용서를 바라는 내용이 일관됐다.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되는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정은 말하지 않았다. 이유가 궁금했다. 고백하는 게 아니라 이런 죄를 지었노라고 통보하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했다.

청년미사 도중 입구 쪽 맨 끝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봉헌하러 앞으로 나온 여자를 찬찬히 뜯어봤다. 보통 키에 통통한 몸매. 빛바랜 갈색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마는 넓었고 코끝은 약간 비틀렸으며 피부는 투명했다. 입술은 두툼했고 양미간 사이 주름은 깊게 파여 100m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층층이 접힌 목주름은 나이테 같아 여자의 연식을 짐작케 했다. 몸에 짝 달라붙은 하얀색 티셔츠 사이로 비친 가슴은 거만한 그 자태를 숨기지 못하고 고스란히 드러냈다. 한여름에는 어디에서든 시선을 조심해야 한다. 여름에는 모든 여자가 예뻐 보이는 법이다. 가슴 큰 여자가 미련한 게 아니라 내가 미련하게 느껴졌다.

영성체 예식 때 성체를 받으러 나온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구멍이 송송 뚫린 미사포 사이로 나를 훑으며 살짝 웃는 눈빛이 묘했다. 마치 비웃는 것 같았다. 성체를 든 내 손이 떨렸다. 손을 마저 내밀지도 않았는데 여자는 훔치듯 성체를 앗아 갔다. 고해실의 그 여자, 목소리 주인공이 아닌 것 같았다.

궁금했다. 미사가 끝난 뒤 사무실에 들러 교인 명부를 찾아봤다. 여자의 이름은 이미아. 영화 쿼바디스의 여주인공 이름과 닮았다. 세례명은 클라라, 79년생으로 나와 동갑이다. 한자가 특이했다. 아름다울미(美)에 아이아(兒)를 썼다. 아이는 순수할 때에만 아름다울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은 살아남고자 영악하기를 선택해 예쁘지 않다. 오늘날 여자들이 아이 갖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알려진 것처럼, 몸매가 망가진다거나 경제력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다. 영악한 아이 영혼이 자기 영혼을 잠식하고 이겨 먹을까봐 두려운 것뿐이다.

증명사진을 보니 성체를 낚아채고 비웃던 그 쌍꺼풀 없는 눈이 또다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집은 성당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성동마을의 아파트다. 직업이 특이했다. 사진작가. 그러고 보니 4년 전 성당에서 보육원을 방문했을 때 여자가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딱딱하지는 않았지만, 사물 대하듯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자세를 취할 것을 주문해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던 상황이 기억났다.

직접 대면해 그 목소리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즉각 답을 얻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텨야 한다니 이번 주도 길게 느껴질 것 같다. 성일을 기다리는 평일의 일상은 외롭고 지루하다. 하지만 다음 주도, 그다음 주도 목소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교중미사에서도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성당에 다시 강림한 후부터는 늘 혼자였기에 여자의 신변에 대해 물어볼 사람도 없다. 새 신자를 관리하는 차원이 아니다. 여자로 느껴진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이상하게 끌리고 궁금했다. 고해실에서 흐느끼던 목소리와 달리 날 비웃던 눈빛, 마지못해 하는 그 억지스러운 고해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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