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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스낵 시 한 편! 김희준 시인의 '언니의 나라에선 아무도 시들지 않기 때문'

이운주 전문 기자
  • 입력 2022.01.20 15:35
  • 수정 2022.01.2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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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언니에게' 를 중심으로

출처: 알라딘
출처: 알라딘

 

  새해가 밝았다. 놀랍게도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있다. 새해 목표로 흔히 건강 챙기기, 한 달에 한 권 책 읽기 등 다양한 위시리스트를 세운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아니겠나. 거창한 목표보다는 하루에 짧은 시 한 편씩 스텝을 밟아보자. 해당 시집은 19<시인동네>로 등단한 김희준 시인의 작품이다. 2020년 여름, 갑작스러운 사고로 영면했다. 젊은 나이에 유고 시집이 된 이 작품은 시인의 생일이자, 시인이 하늘로 간 지 49일이 되는 날 출간되었다. 분석 전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더 볼 수 없음에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했던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박음질이 풀릴 때 알았지 실로 재봉된 마음이었다는 걸 의사는 누워 있으라 했지만 애초에 봄은 흐린 날로 머무는 때가 많았지 벚꽃과 유채가 엉킨 들판에 어린 엄마와 어린 언니가 있어 놀이기구가 안개 속에 숨어 있었던 거야 숨바꼭질을 좋아하던 언니가 이불과 옥상과 돌담 그리고 유채꽃과 산새와 먹구름 속으로 달려가는

 

한때 비가 내리고 물의 결대로 살 수 없다면 늙지 않은 그곳으로 가자 소매 안에 훔쳤던 벚나무에 대해 사과하는 밤, 나무의 탯줄이 보고 싶었다 뭉텅이로 발견되는 꽃의 사체를 쥘 때 알았던 거지 비어버린 자궁에 벚꽃이 피고 사라진 언니를 생각했어 비가 호수 속으로 파열하는 밤에 말이야 물 속 에 비친 것은 뭐였을까

 

언니가 떠난 나라에선 계절의 배를 가른다며? 애비가 누구냐니, 사생하는 문장으로 들어가 봄의 혈색을 가진 나를 만날 거야 비를 타고 소매로 들어간 것이 내 민낯이었는지 알고 싶어

 

파문된 비의 언어가 언니에게서 나왔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친애하는 언니> 전문

 

 시인은 이미 타계한 후라 이 시집이 유고작이 되었는데, 올리브빛 동산으로 가자는 시인의 말과 함께 녹색 표지가 마음을 아리게 만든다. 4월의 날씨바람과 청록, 유채가 아름답게 시를 연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배경을 상상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묘한 발랄함과 섬세함이 적절히 섞여있는 문체가 이 시인의 자랑이란 생각이 든다.

  시에서 계절이라는 시어는 너무 흔히 사용되어 이제는 다소 상투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는 표현법을 보면 시어를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해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했던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행이 상당한 울림을 준다. 아마 이 시인이 생각하는 언니는 절대적인 종교 같은 존재이자 믿음의 기원, 기대고 싶은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언니의 세상에선 그 누구도 아파하며 시들지 않는다. 이런 간지러운 마음을 주머니에 넣은 꽃잎이라 표현한 것이 정말 탁월하게 느껴졌다. 산문시 형태로 이어지다 2, '박음질이 풀릴 때 알았지 실로 재봉된 마음이었다는 걸' 시작하며 이 마음이 얼마나 헐겁고 위태로웠는지 설명하고 있다. 언니는 떠났는지 사라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먹구름 속으로 달려갔다는 문장을 보면 지금 시인과 닿아있지 않다는 사실은 확실한 듯 보인다. 4월의 바람을 타고간 그리움은 물로 통하고, 다시 계절의 배를 가르며 주위를 환기시킨다. 화자는 바람을 통해 친애하는 언니를 그리고 있지만 사실상 비를 보면 여름이 떠오르기도 하고, 파문된 비의 언어를 생각하면 가을이 떠오르기도 한다. 여러 계절 동안 언니를 그리워 하는 이 화자의 그리움은 저승에서도 계속 될지도 모르겠다.

 이 시집은 나도 잘 몰랐던 내 마음을 설명해주는 듯했다정말 취향껏 읽은 작품이라 작가의 다음 신간을 기대하고 싶지만, 이제는 올리브빛 동산에서만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아프다. 하지만 작가가 남긴 섬세한 문장은 올리브빛으로 오래도록 빛날 테니 그녀가 그리울 때는 시집을 펼쳐보기로 한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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