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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 음악통신 507] 리뷰: 아투즈컴퍼니 단독기획공연- 다르미가틈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21.11.2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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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4일 수요일 오후 7시30분, 강동아트센터 소극장 드림

예측한 바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공연장을 도착하니 엄마 손을 붙잡은 어린이들이 많아 연극과 판토마임이 가미된 일종의 가족 음악극 같은 형태일 거란 예상은 첫 스테이지에서부터 산산이 깨졌다.

좌로부터 피아노의 에드윈 킴,해금의 소명진,바이올린의 소재완, 플루트의 비비아나 킴,가야금의 안보영, 마임의 정도형 그리고 대금의 신비성

‘음악 속 화합’을 주제로 11월 24일 강동아트센터 소극장 드림에서 무대에 올려진 ‘다르미가틈’ 은 양악과 국악, 시각과 청각, 고전과 현대가 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무대를 통해 나와 타인의 경계를 허물고 ‘다른 것들의 조화’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아투즈컴퍼니의 첫 단독기획 공연이었다. 모차르트의 작은별 변주곡, 비제(사라사테)의 카르멘 환상곡 등과 같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있는 클래식 곡을 국악기로 편곡하여 연주하기도 하고 쑥대머리, 태평가를 클래식 악기로 연주하는 등의 색다른 시도를 함과 동시에 창작곡이자 초연곡인 <별솔>이 선보였다. 또한 무언(無言) 예술인 판토마임이 등장해 뭔가 스토리를 끌고 가려고 했다.

일단 기존 클래식 레퍼토리들에서 굳이 모차르트 <작은별변주곡>이라고 명명할 필요가 없었다. 모차르트 역시 자신의 주제로 작곡한 게 아니라 그 당시 유행했던 노래를 사용하여 12개의 변주곡을 릴레이로 이은 것처럼 이날의 앙상블도 에드윈 킴의 '작은별' 주제 제시 후 대금-바이올린-가야금-플루트-해금 그리고 다시 피아노로의 회귀라는 순으로 각자의 악기가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교와 특성을 제시하며 악기들만의 이디엄 안에 작은별 주제의 일부를 포함했다 에드윈 킴의 피아노는 키스 자렛과 같은 재즈 피아니스트적인 요소로서 본인이 리하모니제이션을 했는지 아님 작/편곡을 맡은 백승현이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일정한 고유의 색채가 <작은별변주곡>뿐만이 아닌 전반적인 공연 내내 지속되었다.

국악기로만 연주한 헨델의 <사라방드> 역시 헨델의 선율이 조금 등장했을 뿐 국악기들이 헨델의 오리지널을 국악기로 전환했다기보단 국악기들이 연주하는 전혀 다른 헨델의 사라방드 선율을 내포한 곡이었다. 반면 <카르멘 판타지>는 사라사테의 것을 바이올린, 해금, 가야금으로 그대로 이식시켰다.

왜 꼭 소극장 상업공연은 연출가와 작곡가는 커튼콜에 등장하지 않지???

백승현의 순수 창작곡 <별솔>에서는 신문희의 <아름다운 나라>의 단편이 묻어 있었다. 그런 식으로 동서양을 망라한 선율들의 파편이 6곡 전부에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이질적을 들리면서 굴절되고 부딪힌다. 판소리 춘향가의 <쑥대머리>에서 푸치니 토스카의 <별이 빛나건만>의 모티브가 처음엔 드라마틱하게 피아노로 잠깐 모습을 비추다가 중간에 대놓고 바이올린으로 나온 이유가 춘향가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할정도 시종일관 서로 다른 것들이 상충된다.

그런데 음악적인 맥락에서만 살피면 그런 요소들이 자연스레 섞이는 게 아니고 부자연스럽다. 어울리지 않고 따로 논다. 국악기, 특히 가야금은 그런 호흡과 기조를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조율을 하여야 했으며 태생적으로 맞지 않은 음률의 악기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정상(正常)에서 벗어나 틀리게 들린다.

강동아트센터 내부에 걸린 다르미가틈 대형 포스터

음악에서 출발한 음악회가 아니라 스토리에 끼워 맞춘 음악이란 느낌이 들어 극을 통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시도가 확연했다. 그게 언어로 되어있는 권리장전이나 인권선언이라면 확실하고 받아들이기 수월하겠지만 적어도 필자는 음악을 들으러 갔고 편하게 들려오는대로, 보이는대로 즐기려고 했는데 안톤 체홉의 <갈매기>나 유모비르 시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 또는 무용극에 베이스를 둔 시간이었다. 음악회는 인간의 감각, 시각, 청각을 이질적인 요소와 경계의 허뭄을 통해 결합해서 생기는 비예측의 변이(變異)를 추구한다. 다양성의 존중이자 열린 사고의 확장이라 할 수 있지만 워낙 변화가 급속하게 일어나고 선악의 구분보단 다양성과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혼란이 가중된다. 결국 음악회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모든 걸 포괄한 연출가의 변은 '다름은 곧 같음이다'라는 일체합일이다. 그래서 음악회 제목도 처음부터 '다르미가틈'이고 공연장의 불빛도 마지막 스테이지에 가서야 밝아오면서 무대의 연주자와 객석의 관객이 드디어 대면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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