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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싹트는 연정-1

권용
  • 입력 2021.11.1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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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장천1호분(長川一號墳) 앞방 남벽 부분(모사도), 한성백제박물관

 

1. 불안의 씨앗   

 

숲속 별채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뻐꾸기가 울었다. 아미(蛾眉) 같은 초승달이 소나무 가지 끝에 걸려 있었다. 나무 그늘의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별채의 들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호흡을 안으로 삼켰다.

별채는 환하게 황촉불이 켜져 있었고, 그 문 앞에 근위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봄바람이 소나무 가지를 저울질할 때마다 초승달이 수줍은 듯 얼굴을 갸웃거렸다.

잠시 후 별채의 문이 열리며 호롱불을 앞세운 여인이 나타났다. 소나무 그늘에 숨은 사내는 그 걸음걸이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는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고 여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누구세요?”

후원으로 가는 돌담 모서리에서 여인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며 짧게, 그러나 소리를 죽여 외쳤다.

“연화 낭자! 나, 해평이오?”

사내가 성큼 여인 앞으로 다가섰다.

“어머, 해평 오라버니?”

연화가 초롱불을 조금 높이 들어 해평의 얼굴을 확인했다.

“방금 그대가 별채에서 나오는 걸 보았소.”

“아버님께서 별채에 계신 왕자님의 병간호를 부탁해서…….”

연화는 말끝을 흐렸다.

“왕자님의 다치신 다리는 어떠하오?”

“사부님께서 잘 치료를 해주셔서 크게 염려할 정도는 아니에요.”

“꼭 연화 낭자가 병간호를 맡아야만 되오? 따라온 궁녀들도 있질 않소?”

해평의 불만은 거기에 있었다. 말 경주에서 다리를 다친 왕자 이련을 연화가 병간호 명목으로 자주 만나게 되는 것에 대해 그로서는 내심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오라버니가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건 아버님이 특별히 저에게 당부하신 일이에요.”

연화의 말이 곱게 나갈 리 없었다. 그녀는 해평이 자신에게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당숙 하대곤의 양자이지만, 엄연히 해평은 그의 육촌 오라버니였다. 육촌간이라 해서 연모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고집불통의 성격 소유자인 해평을 싫어했다.   

“왕자님이라니까 마음이 끌리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 아직 솜털도 벗지 못한 애송이일 뿐이오. 연화 낭자보다 네 살이나 어리니 엉뚱한 생각일랑 마시오.”

해평은 어둠 속에서 입술을 비틀었다.

“말 삼가세요, 해평 오라버니! 왕자님께 언사가 너무 거칠군요. 누가 들을까 무섭네요.”

연화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 밤중에 지금 여기엔 낭자와 나 둘뿐이오. 누가 듣는다고…….”

해평은 건들대면서 자꾸만 연화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를 어둠 저쪽에서 듣고 있는 또 다른 사내가 있었다. 바로 추수였다. 그는 혹시 연화에게 못되게 굴면 한 달음에 달려가 해평의 멱살이라도 거머쥘 작정이었다.

“다시는 왕자님에게 그런 언사를 삼가세요. 그리고 어서 물러가세요. 후원은 남정네가 걸음 할 수 없는 곳임을, 오라버니도 잘 알고 있질 않습니까?”

연화는 몸을 홱 돌려 부지런히 후원 별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국 후원 입구에서 연화를 보낸 해평은 못내 아쉬운 마음을 접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이 튀어나왔다.

“참 난 데 없는 곳에서 강적이 나타났군! 틀림없이 당숙께선 연화를 저 애송이 왕자에게 줄 셈인 모양이야. 이런 젠장맞을!”

해평은 저 혼자 투덜거리며 어둠 속을 걸었다. 어느 사이 소나무 가지를 떠난 초승달이 검푸른 하늘에 눈썹처럼 예리하게 박혀 있었다.

“나 좀 봅시다.”

돌담 뒤의 어둠 속에서 불쑥 추수가 나타나자, 해평은 반사적으로 한 발 물러서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누구냐?”

“겁낼 건 없소. 나 추수요.”

“오라, 천제 때 대왕 폐하로부터 보검을 받아들고 거들먹거리던 녀석이로군!”

해평은 한 발짝 성큼 다가서며 추수를 노려보았다.

“말조심 하시오.”

“뭐라고? 허헛, 참! 네놈이 이젠 뵈는 게 없는 모양이로구나!”

“왕자님이 계신 별채와 연화 아씨가 계신 후원 별당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마시오. 대인 어른의 명이시오.”

추수는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뭐라? 그런데 네놈은 왜 이곳에서 얼쩡대고 있는 것이냐?”

“나는 왕자님과 연화 아씨를 보호하라는 특명을 받은 몸이오.”

“특명? 허헛, 참! 당숙께서 욕심이 지나치시구먼! 왕자를 사위라도 삼으시겠다는 건가? 흥, 그게 호락호락하게 되나 보자.”

해평은 갑자기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어 허공을 찔러댔다.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추수는 더 이상 해평의 말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뭐야?”

“그렇지 않소? 다른 것은 다 참아도 대인 어른께 함부로 막말하는 것만큼은 참지 못하오.”

“추수, 이 말갈놈아! 네가 지금 나하고 한판 겨뤄보자는 게냐?”

해평은 추수의 턱을 치받을 듯 삿대질을 하고 들었다.

‘말갈놈!’이라는 말은 추수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욕이었다. 말갈은 원래 같은 피를 나눈 부족들이 아니었다. 여러 부족들 가운데 먹고살 것이 없어 여기저기 떠돌다 끝내는 깊은 산속에 들어와 사냥을 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무리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사냥감이 많고 외방인들의 접근이 어려운 험준한 태백산 자락이나 개마고원 같은 곳에 터를 잡았다. 농사지을 땅도 없고 오직 사냥을 해서 먹고사는 막장인생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오히려 말갈족들은 결집도 잘 되고 생계를 위협하는 외부 세력에 대한 저항심도 매우 강했다. 물론 사냥이 주업이므로 활이며 창을 다루는 솜씨 또한 뛰어났다. 그러나 외부 세력들은 이들을 업신여겨 천민 취급을 했다.

“그대는 뭐 나보다 나은 줄 아시오?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을 하대곤 장군께서 거두어주었다고 들었소. 명색이 양자라 해서 그래도 내가 대인 어른을 생각해 이 정도쯤 대우를 해주는 것이니 그리 아시오.”

추수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그동안 마음속으로 곱씹고 있던 말을 털어놓았다.

“무엇이?”

해평은 곧 폭발할 듯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내가 틀린 말을 한 것이오?”

“감히 내 출신을 들먹이다니? 이렇게 나오면 한 번 해보자는 소린데…….”

“그것이 억울하다면, 어디 그대의 아비와 어미가 누구인지 대보시오. 나는 그래도 친부모가 있소.”

추수의 말에 해평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손을 칼자루로 가져가다가 멈추었다.

“음, 내가 오늘은 참는다. 대왕 폐하께서 머무르고 계시는 이곳에서 소란을 피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 언제고 네놈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맛이 어떤지 보여주고 말리라.”

그러자 추수도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내가 이런 말장난이나 하자고 예서 그대를 기다린 게 아니오. 나는 오늘 낮 천제를 지낼 때 그대가 교시를 묶은 밧줄에 칼을 댔다는 걸 알고 있소. 만약 대왕 폐하께서 그 사실을 아셨다면, 그대는 이미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닐 것이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말해보시오.”

이렇게 따지는 추수를 보고 해평은 갑자기 껄껄대고 웃었다.

“이놈아, 증거를 대 보거라. 증거를! 그리고 뭐, 그대? 내가 어찌 네놈의 그대냐? 천한 것이 예의를 모르는구나. 앞으로 깍듯이 예의를 갖춰라.”

“해평 도련님께서 먼저 내게 이놈 저놈 하지 않았소? 점잖은 체면에 먼저 예를 갖출 줄도 아셔야지. 그리고 교시 사건에 대해서는 내가 입을 틀어막고 있을 것이니, 앞으로 조심하시오. 나 때문에 귀한 목숨 건졌다는 것 잊지 마시고.”

추수는 말문이 막혀 그 자리에 서 있는 해평을 내버려두고 어둠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서쪽 하늘에 걸렸던 초승달이 막 산 능선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자 갑자기 사위가 어둠에 묻혔고, 밤새들의 울음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농밀한 밤이 짙은 회백색으로 깊어가고 있었다. 밤 기온이 내려가며 압록강에서 생긴 안개가 들판을 가로질러 하가촌까지 밀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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