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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 음악통신 502] 리뷰: 김은진 피아노 독주회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21.11.09 09:52
  • 수정 2021.11.12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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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 월요일 오후 8시, 금호아트홀 연세

입장하면서 지인 피아니스트를 만나 월광 끝나고 인터미션을 한다고 하니 2부가 길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쇼팽 4개의 발라드 다 합해봤자 30분 안밖이요 웬만한 교향곡이나 그랜드 소나타에 비하면 길다고 할 순 없는데 그녀의 길다는 대답이 무슨 의미일까 곱씹어 보았다. 듣는 관객에게 길다는 것인지 아님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한 무대에서 연달아 4개의 발라드를 연주하는 게 힘들고 길다는 건지 아리송했지만 분명한 건 시대의 조류인지 모르겠으나 음악회의 프로그램이 갈수록 짧아지고 기획음악회가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십수 년간 똑같은 곡을 치고 반복해왔지만 변한건 1도도 없는 국내 음악 실정과 갈수록 모든 게 짧아지고 빨라지는 시대적 트렌드에 입각한 변화라는 걸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한편으론 순수하게 무대에 서는 음악인의 음악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보고 들으러 발품을 팔고 정성을 들이는 애호가에겐 충분한 음악적 보상이 돌아오길 바라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1부의 베토벤 월광소나타가 17분 만에 끝나고 15분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필자 빼고 모두 학연, 지연, 혈연으로 얹혀있는 관객들이니 그 시간 동안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담소를 나누면서 해후의 정을 나누겠지만 겨우 한 곡 끝나고 베토벤 월광 연주시간만큼의 휴식 동안 멍하니 다음 곡을 기다려야 하는 필자 입장에선 그 시간이 너무나 아깝고 빨리 김은진의 다음 곡, 다음 연주를 듣고 싶었다. 바꿔 말해 당신이 조성진이나 부흐빈더(부흐빈더의 프로그램 양을 보라!) 연주회에 갔는데 17분 연주하고 인터미션에 들어갔다면 그 허탈함은 어땠을지 한번 똑같은 입장이 되어보라. 김은진은 조성진이 아니라고 반문하는 자는 그만큼 자기들끼리 차등을 둔다고 자인하는 꼴이다.

쇼팽의 발라드 전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김은진

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밖은 찬 바람이 부는 가을인데 홀에 들어오니 마치 한증막 같이 텁텁했다. 마스크까지 쓰고 있으니 불과 몇 분 전의 바깥과 공기가 너무 달라 답답했는데 김은진 역시 갑작스러운 기온과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기 쉽지 않았을 거며 상승된 금호아트홀의 온도에 맞서 소리의 전달이 평상시와는 달랐을 것이다. 하필이면 음들의 바른 균형과 공통의 힘의 분배를 요하는 월광 1악장으로 음악회를 개시해 이중고가 있었음에도 그녀 특유의 완급조절로 잘 헤쳐나갔다. 특히나 1악장의 c#에서 단3도 위의 e-minor로 임시전조되는 부분은 백미였다. 2악장의 트리오는 앞 부분과는 달리 예상치 못한 묵직함으로 균형과 대조를 꾀한다. 반복은 다 지킨다. 역시 정통파, 학구파 피아니스트답다. 가벼움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진지하게 공부하는 피아니스트가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클래식 음악계의 꺼지지 않은 달빛이다.

② 발라드 1번: 쉼표가 말한다.

긴 여운과 휴지..... 페달을 조금 길게 끌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음과 음 사이, 그리고 악보에 적혀 있지 않은 비어 있는 공간을 드러내면서 이끌어간다. 자칫 빠져들기 쉬운 성급함과 조급함을 단호하게 밀어내면서 쉼표도 어엿한 음악의 일부로서 말을 하게 한다. 중간의 Eb 부분은 영롱하기 그지없어 꿈결같은 비단길이다. 샾보다는 플랫 계열이 김은진에게 더욱 어울린다. 다행이다. 쇼팽의 4개의 발라드는 모두 플랫 계열의 악곡이다.

③ 발라드 2번: 살아있네! 리듬이!

안정적이고 극적 박진감이 넘친 이날의 호연이었다. 처음의 서두라고 할 수 있는 F장조 부분은 지극히 평화로운면서도 호숫가의 물놀이 같은 뱃노래를 연상시키는 전개였다. 단락의 구분은 명확했고 코다는 마치 오페라의 중간막이 끝난 거 같은 연출로서 발라드 2번의 막이 내린 거지 전체 악곡의 종결이 아닌 이어짐을 암시하고 막과 막을 넘어 발라드와 발라드를 서로 이어주었다.

④ 발라드 3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김은진의 다양한 모습이 악곡 안에 투영되며 그녀의 인간적인 진면목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해주는 연주였다. 처음과 마지막은 상냥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폴로네이즈의 귀부인으로서의 기품 있는 자태를 보이더니 수줍은 아가씨로 바뀌어 환상을 쫓는다. C#음의 연타도 격렬하기보다는 앙탈을 부리는 거 같다. 그래서 마지막의 한 음이 비록 미끄러졌더라도 우리 모두 무대에 올라가 그녀를 그저 따뜻하게 안아주고 같이 행복감에 젖어 들고 싶다. 김은진 그녀는 사랑스러운 너무나 사랑스러운 의심쟁이 물의 요정이었다.

⑤ 발라드 4번: 나는야 이 거리의 이야기꾼, 시간마술사

형식과 구조의 적절한 파악, 매듭과 매듭 사이의 정경과 배경의 구분, 주어와 부사의 구분으로 김은진은 한편의 발라드 스토리텔러로서 손색이 없었다. 플랫이 4개나 있어서 그런지(앞의 것도 4개긴 하지만 장단조가 다르다) 음색의 조절과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영롱하면서 애수를 품고 있다. 4번에서의 절정은 맨 마지막 클라이맥스 전의 폭발 후의 긴 잔향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게 멈춰 있었다. 시간을 쥐어짜고 뒤튼다. 김은진은 온몸으로 중력을 막아내면서 거기서 축적된 기를 몰아 종지를 향해 숨 가쁘게 치달렸다.

무대 인사하는 피아니스트 김은진

정규 프로그램이 끝나고 지상으로 올라오니 겨우 9시 15분이었다. 그중 인터미션이 15분가량이다. 4개의 스케르초가 더해졌다 하더라도 러닝타임 2시간도 안된다. 혼자 욕심에 입맛만 다시는데 속내를 알면 김은진 아니 국내 피아니스트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곡소리와 구시렁이 귓가에 맴돈다. 피식 터져 나온 웃음과 함께 신촌역으로 향했다. 올 때보다 바람이 훨씬 상냥하게 느껴진다.... 기온은 더 떨어졌지만... 분명 김은진의 기운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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