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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천제(天祭) - 5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1.11.08 14:28
  • 수정 2021.11.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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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무용총(舞踊塚) 널방 서북벽(모사도)

 

5. 멧돼지 사냥   

 

태백산의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리면서 땅은 축축한 습기를 머금었고, 하늘에 그물을 친 듯한 나뭇가지마다 연초록의 이파리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미 녹음 짙은 숲속에서는 새들이 잔치라도 벌이는 듯 짹짹거리며 암수끼리 다투는 소리들로 분주했다. 그 소리는 막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는 숲의 수런거림 같았다. 그런 가운데 잎보다 먼저 피어난 봄꽃들로 인하여 숲은 나날이 화려하게 변신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태백산 기슭이 시끄러워졌다. 대왕 사유가 이끄는 고구려 군사들과 태백산 주변에 흩어져 사는 말갈족들이 참여한 전렵 행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술이 뛰어난 장수들과 말갈족 전문 사냥꾼들은 사냥감을 노리고 요소요소에 숨어 길목을 지켰고, 그 밖의 고구려 군사들과 말갈족 장정들은 사냥감 몰이를 하느라 숲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몰이꾼 역할에는 악대들도 대거 참여하여 꽹과리·징·북 등 요란한 악기의 울림이 산 능선으로 햇살처럼 퍼져나갔다.

징, 징, 징!

꽹꽤 괴괭, 꽤앵, 꽹, 꽹!

덩덩, 덩 더덩!

주로 산 능선을 빙 돌며 늘어선 몰이꾼들의 함성과 악대들의 악기 소리가 산을 가득 메우자, 숲속 여기저기 숨어 있던 짐승들이 깜짝 놀라 갈팡질팡 산 계곡 아래로 쏠리듯 몰려들었다.

하대용에게 선물로 받은 한혈마의 호피 가죽 안장에 높다랗게 올라앉은 대왕 사유는, 악기 소리가 들려오는 산 능선을 올려다보았다. 깊은 산중에 들면 산의 제 모습이 모이지 않는 법이었다. 거기서는 태백산 정상이 보일 리 만무했다. 그러나 신령이 깃들인 산이란 생각은 대왕으로 하여금 저절로 마음을 정제하는 자세를 갖게 했다.

전날 마상훈련에서 말 달리기로 우승한 해평 또한 대왕에게 상으로 받은 백마를 타고 사냥감 찾기 위해 숲속을 누볐다. 가까운 곳에서 숲속을 날다람쥐처럼 달리는 추수는 말도 타지 않고 맨 몸으로 사냥에 나섰다. 두 사람은 서로 전렵 행사에서 공훈을 세우기 위해 은근히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자 이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날 마상훈련에서 낙마하여 다리를 다친 관계로 하가촌에 남아 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대용의 딸 연화도 사냥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왕자의 병간호를 해주어야 한다며 집에 남아 있도록 지시했다.       

추수는 연화가 이번 전렵 대회에 참가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못내 아쉬워했다. 두 사람은 스승 을두미 밑에서 오래도록 손발을 맞추며 무술 연습을 해왔기 때문에 호흡이 척척 맞았다. 이번 사냥은 그동안 닦은 무술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특히 추수는 전날 말 달리기 경주에서 말 머리 하나 차이로 해평에게 진 것을 억울하게 생각해, 이번 사냥에서만큼은 자신이 큰 공을 세우겠다고 마음속으로 벼르고 있었다. 그가 사냥을 나와서 말을 타지 않는 것은, 오히려 숲속에는 나무들이 많아 자유롭게 달리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는 늘 사냥을 할 때 맨몸으로 숲속을 누볐고, 공중그네를 뛰듯 밧줄을 이용해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너뛰었다.

“멧돼지는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 천제(天祭)에 올릴 교시(郊豕)로 쓸 것이니라.”

검붉은 빛깔로 번뜩이는 적토마 위에서 대왕 사유가 숲속을 향해 외쳤다. 화려한 호피로 된 말 장식 위에 올라앉아 있어서일까, 그 모습은 더욱 근엄해 보였다.

대왕의 명을 들으면서 추수는 때마침 밧줄을 잘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사냥감을 생포하기 위해 그는 어깨에 밧줄을 짊어지고 다녔다. 그것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할 때 그네처럼 사용하거나, 사냥감을 사로잡을 때 올가미로 이용하는데 아주 요긴한 사냥 도구였다. 그가 간혹 사냥감을 생포하는 것은 돈 많은 부호와 고관대작들이 사슴이나 멧돼지의 생피를 마시기 위하여 특별히 주문해 올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활이나 창을 쓸 경우 피를 흘리게 하지 않고는 사냥할 수가 없었다. 일단 피를 흘린 사슴이나 멧돼지는 생피를 마시는 사람들에게 점수를 받지 못했다. 온전히 살아 있는 짐승을 생포하여 단도로 멱을 따서 따끈한 생피를 받아 마셔야만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천제에 쓸 교시라면 단 한 방울도 피를 흘리지 않고 생포한 멧돼지여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추수는 마음속으로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해평을 이기고야 말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최근 들어 해평의 연화를 대하는 눈빛이 남다르다는 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해평은 명색이 하대곤의 양자로 연화와는 육촌 간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하가촌에 나타나면 해평은 연화의 거처인 후원을 자주 기웃거리곤 했다. 분명 연화에 대해 흑심을 품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추수 역시 언제부터인가 연화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마음속에 아로새기고 있었다. 자신은 신분상 연화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연모의 정이 깊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이른바 짝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부쩍 해평의 연화를 바라보는 눈빛이 강렬해진 것을 느끼게 되자,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주먹 같은 울분이 치솟아 올라왔다. 이번 전렵 행사 때 그는 연화가 보는 앞에서 멧돼지를 생포하여 해평의 기를 보기 좋게 꺾어놓고 싶었다. 그런데 연화는 왕자 이련의 병간호를 위해 하가촌에 머물고 있었다. 추수는 점점 더 불안한 마음에 휩싸였다. 하필이면 왜 말 경주를 할 때 왕자가 낙마를 했느냔 말이다. 또한 뒤미처 달려온 연화는 어찌하여 말에서 떨어진 왕자를 도와주었지 모를 일이었다.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당사자는 해평이었는데, 새롭게 왕자 이련이 나타나 더욱 그의 마음을 좌불안석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

추수는 자기 자신에게 마음속으로 물었다. 그러고 나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비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의 상대로 연화는 너무 버거웠다. 그렇지만 연모하는 마음을 쉽게 떨쳐버릴 수도 없었다.

이제 다시금 추수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대왕에게 잘 보여서 자신이 고구려의 훌륭한 장군이 된다면 당당하게 연화를 사랑할 자격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란 새로운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사냥감을 몰기 위해 외치는 고구려 군사들의 함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고구려 악대의 악기 소리도 더욱 요란해졌다. 그런 소리의 향방과 강도를 보고 사냥감이 어디로 쫓기고 있는지 감을 잡는 것이 중요했다. 추수는 말갈족들과 함께 태백산 자락과 개마고원 등지에서 오래도록 사냥을 해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몰이꾼들의 소리를 듣거나 계곡의 지형지물만 보고도 귀신 같이 짐승들의 도주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추수는 팔이 긴 원숭이처럼 빠르게 몸을 날려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너뛰었다. 그의 발은 땅보다 나무 가지 위에서 더 많이 놀았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들어선 숲속은 나뭇가지와 이파리 들이 하늘을 가려 궂은 날씨보다도 더 캄캄했다. 그 속에서 날렵하게 움직이는 추수의 동작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뛰는 청설모처럼 민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 멀리서 어느 새 사슴 한 마리를 잡아 말 등에 매달고 달려오는 해평의 모습이 보였다. 활에 정통으로 맞았는지 사슴은 피를 흘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추수는 활로 잡는 사슴 같은 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직 천제지낼 때 교시로 쓸 멧돼지를 생포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와아, 우아아!

산 저편으로부터 몰이꾼들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바로 그때 높은 산에서 몰이꾼들에게 쫓겨 산비탈을 내려오는 멧돼지 한 마리가 있었다. 그것을 먼저 본 것은 해평이었다. 그는 활시위에 활을 먹이다 말고, 일순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멧돼지를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는 대왕의 외침을 들었기 때문이다.

멧돼지는 해평을 피해 곧바로 대왕을 향해 돌진해왔다.

“아앗! 폐하가 위험하닷!”

해평이 이렇게 소리치는 바로 그 순간, 밧줄로 만든 올가미 하나가 나무 위에서 날아가 멧돼지의 목에 척 걸렸다. 든든한 나뭇가지에 건 밧줄의 한쪽 끝을 쥔 추수는 나무 위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그 바람에 올가미에 걸린 멧돼지는 나무 위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말았다. 그러나 멧돼지의 무게가 많이 나갔으므로, 이번에는 땅으로 곤두박질치면서 반대로 추수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바로 그때 추수는 순발력 있게 굵은 나무 가지에 얹힌 밧줄을 풀면서 땅 위로 사뿐 뛰어내려 생포한 멧돼지의 다리를 묶어버렸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과연 장사로다. 저 큰 멧돼지를 순식간에 생포하다니!”

말 위에서 대왕 사유는 추수를 향해 손을 번쩍 들어주었다.

“폐하! 큰일 날 뻔했사옵니다. 몰이꾼들의 함성에 겁을 집어먹은 멧돼지라 산비탈을 달려 내려오는 속도가 무섭사옵니다. 제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이니, 자칫하면 폐하께서 크게 다치실 뻔했사옵니다.”

밧줄로 단단히 묶어 멧돼지가 더 이상 버둥거리지 못하게 한 추수가 대왕을 향해 허리를 꺾었다.

“그대가 내 생명을 지켜주었구나! 그대 덕분에 오늘 좋은 구경을 했다.”

대왕은 매우 흡족하여 껄껄 너털웃음을 웃었다.

태백산 천제에 쓸 멧돼지를 생포하면서 전렵 행사는 모두 끝났다. 그날 잡은 사냥감은 사슴 열다섯 마리, 창으로 잡은 멧돼지 네 마리, 추수가 밧줄 올가미로 생포한 멧돼지 한 마리였다. 그리고 활을 쏘아 잡은 꿩은 수십 마리가 넘었다.

그날 가장 큰 공로를 세워 포상을 받은 사람은 천제 때 상에 올릴 멧돼지를 생포한 추수였다. 부상으로 대왕은 평소 아끼던 엄심갑(掩心甲)을 내놓았다. 특수 철로 만들어 창이나 화살이 뚫을 수 없는 최고급의 가슴 보호용 갑옷이었다.

“잘 보관토록 하여라. 이 엄심갑이 한번쯤은 그대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을 것이다.”

대왕의 말에 추수는 감격하였다.

“네, 대왕 폐하! 성은이 망극하오이다.”

추수는 두 손으로 받아든 엄심갑을 한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해평의 눈길이 사뭇 휘어져 있었으나, 주변의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등을 돌리고 있었으므로, 물론 추수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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